마케팅의 꽃, 포지셔닝

김춘추가 읽은 642년 한반도의 맥락

by 초월김

642년 가을,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은 공포와 비탄에 잠겼다.

신라 서쪽의 최전방 요새이자 수도를 지키는 마지막 관문인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이 백제 장군 윤충에게 허무하게 함락당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의 패배는 뼈아팠다.

성주이자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과, 그의 딸 고타소가 죽임을 당했다.

김춘추는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단순한 영토 상실이 아니었다.

수도의 대문이 뚫린 것이자, 국가의 존망이 걸린 부도 위기였다.

당시 신라는 국력 면에서 명백한 시장 3위이자 꼴찌였다.

1위 고구려는 북쪽을 장악했고, 2위 백제는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대야성 전투는 신라라는 브랜드가 자력으로는 절대 경쟁자들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신라의 리더 김춘추(당시 왕은 선덕여왕이었다)는 무리하게 군사를 일으켜 복수전을 감행하는 대신, 싸움의 맥락 자체를 바꾸는 냉정한 승부수를 던진다.

그는 먼저 가장 가까운 강자, 고구려로 향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였다.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손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냉정했다.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과거 신라가 빼앗아간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면 동맹을 맺어주겠다고 요구했다.

영토를 내놓으라는 수용 불가능한 요구였다.

김춘추는 이를 거절했고, 고구려는 그를 감금해버렸다.

신라의 최고 귀족이 적국에 인질로 잡힌 것이다.

김춘추는 간신히 탈출해 목숨을 건지고 돌아왔지만, 이 실패는 그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이 좁은 한반도 안에서 아등바등해서는 답이 없다. 판을 밖으로 키워야 한다."


김춘추는 시야를 확장했다.

고구려라는 내수 1위 업체와의 협상이 실패로 끝난 뒤, 그는 더 큰 플랫폼을 찾았다.

글로벌 거대 세력인 당나라로 건너가 담판을 지은 것이다.

여기서 그의 천재적인 포지셔닝 능력이 발휘된다.

그는 당나라 황제에게 신라를 도와달라고 구걸하는 망해가는 나라로 포지셔닝하지 않았다.

대신, 당나라가 가장 골치 아파하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략적 파트너로 신라를 재정의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려면 남쪽의 교두보가 필요합니다. 우리 신라가 바로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손을 잡으십시오."

김춘추는 당나라라는 거인의 욕망을 정확히 읽어냈고, 신라를 그 욕망을 실현시켜 줄 유일한 대안으로 포지셔닝했다.

고구려와의 실패한 협상이 오히려 그에게 더 큰 그림을 보게 만든 셈이었다.

대야성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나당연합군 결성의 씨앗이 되었고, 만년 3등 신라는 결국 1, 2위 경쟁자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마케터에게 이 사건은 맥락적 포지셔닝의 위력을 보여주는 최고의 교과서다.

김춘추의 여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았고, 실패로부터 배웠으며, 더 큰 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브랜드가 가진 힘이 부족하고 위기에 처했다면, 김춘추처럼 싸움의 판을 키우거나 바꿔야 한다.

제품력 싸움에서 밀린다면, 누구와 손잡을지, 고객의 어떤 상황 속에 들어갈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한 번의 실패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STP 전략의 마지막 단계, 포지셔닝도 결국은 맥락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브랜드가 고객의 머릿속 전쟁터에서 김춘추의 역전승을 재현할 수 있을까?

해답은 좌표가 아니라 맥락에 있다.

STP 전략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포지셔닝이다.

포지셔닝이야말로 마케팅의 최종 목표이자 꽃이라 할 수 있다.

고객의 머릿속에 우리 브랜드가 어떤 이미지, 어떤 의미로 각인되는지가 브랜드의 운명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소비자는 정보 과부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언제든 정보를 검색하고 구매할 수 있는 환경에서, 소비자에게 우리는 어떤 브랜드라고 명확히 인식시키는 것은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어설픈 이벤트나 현혹하는 메시지는 통하지 않는다.

단기적으로 소비자를 낚을 수는 있어도, 중장기적인 재구매와 충성도로 이어지는 포지셔닝은 불가능하다.

공들여 쌓은 이미지가 예상치 못한 이슈로 하루아침에 무너지기도 하고, 마케팅 메시지는 화려하나 상품의 본질이 빈약해 포지셔닝에 실패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포지셔닝 전략 수립을 위해서는 우선 두 가지 핵심 개념, POD(Points of Difference)와 POP(Points of Parity)를 기억해야 한다.

POD(차별화 포인트)는 경쟁사와 명확히 다르며, 고객이 우리를 선택해야만 하는 강력하고 긍정적인 이유다.

POP(유사성 포인트)는 해당 카테고리의 제품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기본 자격 요건이다.

이것이 결여되면 아무리 뛰어난 차별점도 무의미해진다.

즉, 경쟁자들과 동등한 수준의 기본기를 갖추되, 우리 브랜드만의 확실한 한 방을 고객의 뇌리에 꽂는 것이 포지셔닝의 기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마케터가 생각하는 차별점이 소비자에게는 닿지 않을 수도 있고, 기본기가 충분하다고 믿었으나 실상은 엉망인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잡한 정보과부하 시대의 마케팅에서 효과적인 포지셔닝은 어떻게 완성될까?

여기서 맥락(Context)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맥락은 포지셔닝을 재정의 할 수있게 만든다.

과거의 포지셔닝이 시장 지도 위에 우리 제품의 좌표를 찍는 고정된 활동이었다면,

현대의 맥락적 포지셔닝은 지도 자체를 바꾸는 동적인 활동이다.

같은 제품이라도 놓인 맥락에 따라 경쟁자가 달라지고, 고객이 느끼는 가치가 완전히 변하기 때문이다.

전통적 포지셔닝이 제품 중심으로 나는 맛있는 커피다라고 외친다면, 맥락적 포지셔닝은 상황 중심으로 나는 야근할 때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커피다라고 속삭인다.

맥락을 선점하면 물리적 스펙 경쟁에서 벗어나, 고객의 라이프스타일 속 습관을 장악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 활용 전략은 CEP(Category Entry Point, 카테고리 진입점) 관리라고도 불린다.

이는 단순히 타겟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삶 속 결정적 순간을 파고드는 것이다.

첫째, 상황적 맥락(Situational Context)은 고객이 브랜드를 떠올려야 하는 구체적인 시간, 장소, 상황을 규정한다.

오리온 초코파이는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정(情)이라는 맥락을 입혀 한국인의 관계 문화 속 선물로 자리 잡았다.

하이트진로의 테라는 맛보다 소맥 말 때 가장 맛있는 맥주라는 회식 맥락을 공략해 시장 판도를 뒤집었다.

넷플릭스는 자신들의 경쟁자를 타 방송사가 아닌 수면 시간이나 친구와의 대화 주제로 정의하며 고객의 시간을 점유했다.


둘째, 문화적 맥락(Cultural Context)은 시대정신을 브랜드 정체성으로 삼는 것이다.

파타고니아는 옷을 파는 것을 넘어 지구를 구하는 활동이라는 맥락을 제공함으로써 환경을 중시하는 소비자들에게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가 되었다.

곰표 맥주 역시 제품력 이전에 당시 유행하던 레트로와 펀슈머 문화를 완벽히 활용해 밀가루 회사가 맥주 시장을 흔드는 이변을 낳았다.


셋째, 데이터 맥락(Data-Driven Context)은 고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적의 타이밍에 메시지를 던지는 전략이다.

토스는 단순 송금 앱을 넘어 신용점수가 변동될 때, 이자 납입일 등 고객의 금융생활 전반의 맥락을 읽어내어 금융 비서로 포지셔닝했다.

스타벅스 사이렌 오더가 비 오는 날이나 출근 시간에 맞춰 메뉴를 추천하는 것 또한 고객의 상황 맥락을 읽어 나를 알아주는 카페로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잭 트라우트가 말한 "차별화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Differentiate or Die)"는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맥락 포지셔닝의 시대에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바꿔보면 어떨까?

"연관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무시당한다."

아무리 차별화된 제품도 고객의 현재 상황과 연결되지 않으면 선택받지 못한다.

미디어 파편화가 극심한 지금, 우리 제품이 최고야라는 외침보다 "지금 너 피곤하지? 이럴 땐 이게 딱이야"라며 옆구리를 찌르는 맥락의 힘이 훨씬 강력하다.

성공적인 포지셔닝은 POD와 POP라는 기본기 위에, 고객의 삶 속 맥락을 깊이 이해하고 그 순간에 침투하는 능력에서 판가름 난다.

정보 과부하 시대의 스마트한 소비자들은 단순한 차별화가 아니라, 자신의 지금 이 순간과 진정으로 연결되는 브랜드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맥락과 페르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