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은 마케터였다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은 시대를 앞서간 최고의 '맥락 마케터'였다.
10년간 글만 읽던 가난한 선비 허생은 어느 날 아내의 핀잔을 듣고 집을 나서며 이렇게 말한다.
"애석하다. 내 본래 책 읽기를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이제 칠 년인걸..."
그는 한양의 대상인 변부자에게 찾아가 만 냥을 빌린다.
변부자는 의아해하면서도 허생의 당당한 태도에 이끌려 돈을 빌려준다.
허생은 큰돈을 벌기 위해 시장을 분석할 때, 단순히 '부자'나 '서민' 같은 소득 수준으로 고객을 나누지 않았다.
대신 조선 양반들이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제사(祭祀)'라는 맥락에 주목했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제사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가문의 정체성이자 양반으로서의 체면을 결정짓는 핵심 행사였다.
제사상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면 불효자로 낙인찍히고, 사회적 신뢰를 잃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했다.
허생은 이 절박함을 꿰뚫어봤다.
그는 빌린 만 냥으로 안성 장터에서 제사상에 올릴 과일을 제주도에서는갓을 만드는 말총을 모두 사들였다. 평소라면 "너무 비싸다"며 흥정하던 사람들도, 제사나 혼례를 치러야 하는 '절박한 상황(Context)'이 닥치자 부르는 게 값이 되더라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삿날은 미룰 수도, 취소할 수도 없는 고정된 일정이었기에 수요의 가격 탄력성이 극도로 낮아지는 순간이었다.
허생은 고객을 막연히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나 '말총이 필요한 사람'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그는 '체면과 의례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양반'이라는 페르소나로 타겟을 좁혔기에 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결국 허생은 몇 달 만에 수만 냥을 벌어들이고 변씨에게 빌린 돈을 갚는다.
이것이 바로 죽은 인구통계 정보가 아닌, 살아있는 맥락을 읽었을 때 발휘되는 힘이다.
허생이 보여준 이 통찰은 현대의 STP 전략 수립 과정, 그중에서도 리타게팅의 맥락과 맞닿아 있다.
단순히 내 홈페이지에 방문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며칠이고 광고로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우리 홈페이지에 언제 들어왔는지, 왜 들어왔는지, 누가 들어왔는지, 그리고 무슨 상품을 보았는지에 따라 고객의 맥락을 추정하여 리타게팅의 횟수, 반복 주기, 노출 상품 등을 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STP의 첫 단계인 Segmentation에 있어서 맥락은 어떤 식으로 검토해야 할까?
Segmentation은 대부분 연령, 성별, 거주지 등의 인구통계 정보로 국한시키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Micro Segmentation의 중요성과 성과가 강조되면서 관심사로 확대하여 고객을 구분하기도 한다. 그런데 관심사는 고객의 성향에 가까운 데이터라 맥락과는 결이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
예를 들어 내가 독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매번 인터넷에서 책만 찾아보는 것은 아니다.
책에 관심이 많은 편이지만 옷도 찾아보고, 먹을 것도 찾아본다.
넷플릭스의 사례를 보자.
그들은 30대 남성이라는 인구통계 데이터보다 '지금 이 고객이 어떤 상황에서 접속했는가'를 더 중요한 세분화 기준으로 삼는다.
같은 30대 직장인이라도 금요일 저녁 거실의 대형 TV로 접속했다면 '주말을 앞두고 긴 호흡의 영화를 즐기고 싶은 맥락'으로 분류되어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가 추천된다.
하지만 월요일 출근길 지하철에서 모바일로 접속했다면 '짧은 시간 동안 가볍게 소비할 콘텐츠가 필요한 맥락'으로 파악되어 20분 내외의 시트콤이나 애니메이션이 화면 상단에 뜬다.
즉, 사람은 하나지만 맥락에 따라 그가 속한 세그먼트는 시시각각 변한다.
이것이 정적인 데이터로는 잡아낼 수 없는 '살아있는 맥락'이다.
나이키가 런닝화를 구매하려는 고객을 세분화할 때도 맥락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30대 여성, 운동 관심 있음'으로 분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녀가 런닝화를 찾는 맥락이 '마라톤 풀코스 도전을 위한 기록 단축'인지, 아니면 '퇴근 후 한강을 산책하며 인스타그램에 올릴 #오운완 인증샷'을 위한 것인지에 따라 제안해야 할 제품은 완전히 달라진다.
전자의 맥락이라면 쿠셔닝과 반발력을 강조한 기능성 라인을, 후자의 맥락이라면 트렌디한 디자인과 색감을 강조한 라이프스타일 라인을 노출해야 한다.
고객의 진짜 니즈는 '나이'가 아니라 '운동을 하려는 이유(맥락)'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관심사에 맥락을 구체화하여 더하면 페르소나가 된다.
페르소나는 막연한 '대중'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듯한 '특정 1인'을 설정하여 마케팅의 방향을 날카롭게 다듬는 도구다.
'가정간편식(HMR) 정기구독 서비스'를 런칭한다고 가정하고, 서로 다른 두 가지 페르소나 예시를 들어보자. 같은 서비스를 판매하더라도 페르소나에 따라 마케팅 메시지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첫 번째는 "갓생살기 김대리"다.
32세 남성, 서울에 거주하며 IT 기업에서 5년 차 대리로 일하는 1인 가구 직장인이다.
자기 관리에 관심이 많지만 늘 야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건강을 챙기고 싶지만 요리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고, 배달 음식의 높은 칼로리와 비용이 부담스럽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퇴근하고 오면 9시인데, 재료 손질하고 치우는 게 너무 귀찮아요."
이런 김대리에게는 "퇴근 후 5분, 나를 위한 건강한 한 끼. 설거지 걱정 없는 완벽한 저녁"이라는 메시지가 필요하다.
시간 절약, 균형 잡힌 영양소, 간편한 뒤처리를 강조해야 한다.
두 번째는 "스마트 맘 박과장"이다.
38세 여성, 경기 신도시에 거주하며 초등생 자녀 1명을 둔 워킹맘이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아이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싶어 하고, 주말에는 가족 캠핑을 즐긴다.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안전한 식재료인지가 중요하고, 매일 반찬 고민에서 해방되고 싶어 한다.
"매번 배달 음식이나 인스턴트를 아이에게 주려니 죄책감이 들어요"라는 게 그녀의 고민이다.
박과장에게는 "엄마의 마음으로 고른 유기농 재료, 우리 아이 안심 반찬 정기배송"이라는 메시지가 효과적이다.
식재료의 안전성, 아이 입맛 맞춤, 식단 고민 해결을 강조해야 한다.
페르소나 마케팅은 "모두를 만족시키려다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다.
페르소나 A에게는 '효율성'을, 페르소나 B에게는 '안전성'을 이야기해야만 고객은 "이건 내 이야기다"라고 느끼고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페르소나는 시장을 나누는 세그멘테이션(S) 단계의 도구인가, 아니면 대상을 정하는 타게팅(T) 단계의 도구인가?"
결론적으로 페르소나는 두 단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가교(Bridge)'이자 '결정타'다.
세그멘테이션이 시장을 인구통계나 취향별로 나누는 논리적인 '분해' 과정이라면, 타게팅은 그 조각들 중 우리에게 가장 유효한 시장을 고르는 전략적 '선택'이다.
이때 페르소나는 차가운 데이터 조각으로 나누어진 타겟 그룹에 구체적인 맥락의 옷을 입혀 '살아있는 인격체'로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즉, 세그멘테이션 없이는 페르소나를 만들 재료가 없고, 페르소나 없이는 타게팅된 고객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공감할 수 없다.
맥락이 담긴 페르소나를 완성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타겟 고객의 입장이 되어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이는 STP의 마지막 단계인 포지셔닝(Positioning)에서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메시지를 뽑아내는 원동력이 된다.
결국 STP 전략의 핵심은 단순한 인구통계적 구분이 아니라, 고객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허생이 제사라는 맥락을 꿰뚫어본 것처럼, 오늘의 마케터도 고객이 놓인 맥락을 읽어낼 때 비로소 제대로 고객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