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 것보다, 안아준 것들 덕분에

by 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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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에서, 우간다의 12월은 늘 그렇듯 나에게 ‘정리’라는 단어를 먼저 건네준다. 새해를 향해 서두르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차분히 돌아보게 하고, 애써 덮어두었던 마음의 결들을 하나씩 펼쳐 보게 만든다. 그렇게 한 해를 되짚다 보니, 올해의 끝자락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감정은 다름 아닌 감사였다. 모든 것이 잘 풀려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지 않았던 순간들 속에서 더 또렷해진 감사였다.


관계 안에서의 실수들이 있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생각했던 말과 태도들이 시간이 지나 부메랑처럼 돌아왔고,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내 영혼을 갉아먹던 시기가 있었다. 변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괴롭게 했고, 애써 외면해 왔던 나 자신의 후진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던 시간은 전혀 쉽지 않았다. 그 무렵, 우리 집 뒤로 난 소나무 길을 나는 자주 오갔다. 우리는 그 길을 편하게 ‘숲’이라고 불렀는데, 어떤 날은 그 숲을 몇 번이고 왕복하며 말을 쏟아내듯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마음에 쌓인 말들을 그 길에 두고 나오면, 신기하게도 다시 일상을 살아낼 힘이 생기게 해 준 사람이 있었다. 아무 조언을 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걸어주며 들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시간들이었다. 또 어떤 이는 내 생일에 좋은 재료들만 골라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대단한 말 대신, 정성으로 건네진 한 그릇의 국은 올해 내가 받은 가장 깊은 위로처럼 느껴졌다. 또 다른 이는 문득 나의 안부를 묻는 연락을 보내오며, 그저 내가 잘 지내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특별한 이유도, 급한 용건도 없었던 그 메시지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도착해 마음을 오래 붙들었다. 더 나은 모습이 아니라, 가장 부족하고 초라한 모습 그대로의 나를 외면하지 않고 품어준 이들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감사로 스며들었다. 여전히 그 좋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올해를 버텨낸 이유는 충분했다.


오랜 시간 마음을 붙들고 고민해 오던 아이들 교육에 대해서도 새로운 길이 열렸다. 수없이 흔들리며 이것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되묻던 시간 끝에,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방식으로 방향을 보여주셨다. 그 길 위에서 선한 것들을 하나씩 보여주시며, 흔들리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고 따라와 보라고 말씀하시는 듯했다. 확신이라기보다는 신뢰에 가까운 마음이었지만, 그 신뢰로 한 걸음을 내딛게 하신 인도하심 또한 올해의 큰 감사 중 하나로 남았다.


글을 쓰는 자리에서도 감사한 일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의 작가가 함께 마음을 모아 글을 쓰고, 12월 31일 오늘, 마침내 최종 표지 시안과 원고를 마주하게 되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시간을 통과해 온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며, 결과보다 과정이 먼저 떠올랐다. 쉽게 쓰이지 않았던 문장들, 포기하고 싶던 순간들, 그럼에도 다시 앉아 써 내려간 시간까지. 이 모든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리고 함께였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에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올라왔다.


그리고 아이들이 쓴 감사 일기를 읽으며 또 한 번 마음이 멈췄다. 학교와 선생님, 친구들을 떠올리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즐겁고 귀한 시간이었다고 고백하는 아이들의 문장 속에는, 내가 애써 가르치려 했던 것보다 이미 더 많은 은혜가 담겨 있었다. 아이들의 하루에 ‘감사’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이, 부모로서 또 하나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한 해의 끝에서 돌아보니, 올해는 무언가를 더 이루어서 감사한 해라기보다, 부족한 나를 품어준 관계와 흔들리는 길 위에서도 손을 놓지 않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리고 일상에서 조용히 쌓여간 작은 감사들이 모여 만들어진 한 해였다. 우간다의 12월이 늘 그렇듯, 천천히 정리하며 마주한 이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고백하게 된다. 올해도, 참 많이 감사했다고. 그리고 그 감사가 내년으로 이어지기를,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 되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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