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에 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으며, 외국 곡은 A부터 Z까지, 가요는 자음 순대로, 노트를 쪼개고 쪼개 곡마다의 느낌들을 기록했더랬다. 가사가 좋으면 적어두기도 했고.
한창 수능 준비에 열을 올려야 했던 열여덟에는 공부보다는 학교 방송국 아나운서를 하며 연주곡과 컨트리 팝에 빠졌었다. 등교 시간마다 낭독의 소리와 선곡된 음악에,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학생과 선생님의 걸음걸이가 가벼워지길 바랐기에 그 선택에 후회가 없었다.
컨트리 팝- 나는 워낙 넓고 다양하게 보다는 한 가지를 여러 번, 깊게 사랑하는 편이라, 보수도 이런 보수도 없는, 보수계의 최고봉인 아빠에게 혼날 것을 각오하며 당시 푹 빠져있었던 사이먼 앤 가펑클 LP를 사달라고 했었다. 호통과 함께 ‘음악은 무슨!!’ 하실 줄 알았는데, 당신이 음악을 좋아하셔서 그랬는지, LP며 CD는 원하면 때마다 사주셨다. 지금 떠올려도 한자리에 앉아 사이먼 앤 가펑클을 들었던 그날은… 행복했던 순간으로 손꼽는다.
스무 살이 되어서는 예대를 다녔으니, 끼 있는 음대생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학교 축제인 날이었다. 짐 브릭만의 밸런타인이란 곡을 부른 남학생에게 빠져 재즈를 하나도 모르던 나는, 각종 재즈 바를 돌며 마치 재즈 평론가라도 되겠다는 듯이 음악을 듣곤 했었다. 하지만 그 애 때문에 입문한 재즈였기에, 마음이 식으며 안녕하고 말았다.
뒤늦게 멋 부리기에 눈을 뜬 스물다섯에 나는, 동대문의 의류 쇼핑몰을 자주 가던 때였다. 우연히 상설무대서 공연하는 록 밴드 음악을 보게 됐고, 신선한 데다 신세계였다. 태어나 처음 듣는 사운드의 강렬함이 방황기였던 스물다섯에게 톡 쏘는 사이다 맛이었다. 처음은 그 밴드의 공연을 보기 위해 홍대 록 클럽을 들락거렸는데, 그러면서 다른 인디밴드들을 만나며 자연스럽게 더 깊게 들어가게 된 음악 세계.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던 록에서부터 헤드뱅잉까지 이어지는 하드코어로까지, 때로는 마음 맞는 친구와, 그게 아니면 대부분은 혼자 즐기다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다 스물다섯 겨울에, 예수를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고부터는 가요를 경멸하는 태도로 찬송가와 국내외 CCM만 고집하며 들었었다.
그리고 2014년, 내 나이 서른다섯에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 첫째 주안이를 뱃속에 가졌을 때에도, 둘째 예주 때에도 다양한 장르를 두루두루 오가며 음악과 떨어진 적이 없는 삶을 살았다. 주안이는 클래식 실황 공연 앨범부터 다양한 장르를, 예주는 아예 24시간 종일토록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 채널로 태교를 했으니…
때로는 학업을, 때로는 친구를, 때로는 직장을 잃었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의 선택은 언제나 자유의지였고, 결과 또한 내 몫이었기에 후회보다는 행복 그 자체였다. 그래서 지난날을 돌아보면 나는 Best One의 삶이었던 적은 없다. 그러나 Only One의 삶을 살았기에 내 삶을 행복으로 충전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가끔 아이들과 신나는 음악에 맞춰 막춤 추기를 하고는 하는데, 최근 ‘태일’이라는 가수와 ‘문을 여시오’라는 노래를 접하게 됐다. 며칠 후면 아이들과 춤판을 벌일 듯싶다. 이 또한 행복한 순간이 될 것이라 믿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