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야 하는 이유
알람소리에 잠이 깬다. 일어나자마자 침대 정리를 한다. 그리고 화장실에 간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옷방에 들어간다. 잠옷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거울 앞에 선다. 눈바디를 쓱 보고 체중을 예상한다. 그러곤 체중계 앞에 선다. 약간의 긴장이 감돈다. 체중계에 올라가 진실을 마주한다. ‘역시 내 눈은 정확해’ 뿌듯하다. 몸상태를 보면 체중을 정확하게 맞추는 편이다. 매일 정확한 비교를 위해 아침 공복에, 하루에 한 번만 잰다.
잘 찌지도 빠지지도 않는 편이다. 정해진 시간만큼 움직이고 웬만하면 배고프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먹는 양도 비슷해서 그런지 몸무게의 차이가 거의 없다. 계절의 변화, 식욕의 변화, 생활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살이 찌거나 빠지면 내 몸무게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한다.
증량은 자신 있다. 나이 드니까 한창때에 비해 양이 줄긴 했다. 날이 갑자기 더워지는 환절기에는 심지어 안 먹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워낙 음식을 즐기는 대식가여서 빠진 살은 의지만 있으면 금방 회복 가능하다.
문제는 감량이다. 설연휴에 때 찐 3킬로를 지금까지 잘 유지 중이다. 원래 명절에는 3킬로 정도는 쪄야 잘 보낸 거라는 생각 한다. 보통은 일주일 정도 지나면 내 생활패턴으로 돌아오면서 급하게 찐 살이 빠지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겨울에는 내가 좋아하는 간식이 유난히 많아서인지 나의 식욕은 겨울 내내 사그라들지 않았고 늘어난 위는 나의 식욕을 잘 감당해 줬다.
옷차림이 가벼워지기 전까지는 다이어트를 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았다. 겨울에 찐 살은 롱패딩 속에 쏙 감출 수 있어서 티도 별로 안 난다. 하지만 내 몸을 매일 보는 나는 나의 지방세포들이 어디에 자리 잡았는지 정확히 보인다. 그들은 팔과 배가 가장 안전하고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고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3개월간 내 몸의 일부가 돼 버린 살은 쉽게 떠나려고 하지 않을 거다. 내가 생활의 변화를 반기지 않듯, 내 몸은 항상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제 날도 따뜻해지고 여름을 맞이하기 전에 살을 빼야 할 거 같긴 한데 마음먹기가 쉽지 않다. 살을 굳이 빼야 할까? 그냥 이대로 살까? 살 빼지 않을 이유를 굳이 만들어본다.
1. 우선 나이 드니까 의지가 약하다.
실제로 세상에는 나의 다이어트보다 중요한 일이 무척이나 많다. 거기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자기 합리화에 능한 나이가 돼 버렸다.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뚱이 좀 뚱뚱하면 어떻고 좀 마르면 어떠하리’,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배를 곯아가면서 체중조절씩이나 하나, 연예인도 아니고’, ‘요즘 MZ 세대는 옷에 몸을 맞추지 않는다던데, 나도 젊은 느낌으로 내 몸에 세상을 맞춰봐?’ 등등.
2. 살이 있는 게 마른 것보다 훨씬 예쁘다.
어렸을 때는 모델처럼 마른 몸이 예뻐 보였다. 희한하게 나이가 드니까 마른 몸이 예뻐 보이지도, 되고 싶지도 않다. 미의 기준은 지극히 개인취향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변화된 나의 아름다움의 기준은 건강하고 자연스러움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녀노소 살이 좀 있어야 예뻐 보인다.
3. 내 몸을 혹사시키고 싶지 않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몸에서 영양분이 부족하니 채워달라는 신호라고 믿는다. 나는 배고프면 늦은 밤에도 ‘내 몸이 영양분을 원하는군’ 이렇게 자기합리화하면서 먹는다. 배가 부르면 잠이 잘 오고 심지어 아침까지 배가 부르면 바로 안 먹어도 되니까 더 기분이 좋다. 배고프면 몸 상하니까 다이어트하면 안 될 것만 같다.
4. 원하지 않는 부위에 살이 찌고 빠진다.
나는 얼굴살이 없는 편이다. 20살 때 사진을 보면 예쁘다. 객관적으로 예쁜 게 아니라, 두 볼에 가득 차오른 살이 싱그러워 보여서 예쁘다. 나이 들어서 살이 찌면 배에 찌고, 빠지면 소중한 얼굴과 가슴에서 빠진다. 살이 찌고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배는 양옆, 앞뒤로 영역을 확장하게 되고, 얼굴과 가슴은 소박해지는 이상한 몸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살을 빼고 싶지 않다.
5. 누구를 위한 다이어트인가?
누구에게 내 몸을 보여줄 일이 없다. 몸매를 뽐낼만한 자리도 없고 평소에 노출 있는 옷을 입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애초에 나에게 관심이 없을뿐더러, 잘 보이고 싶은 사람도 없는데 왜 살을 빼야 하나 싶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유를 나열하며 역시 다이어트는 필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지으려는데, 내일 아침 체중계에 올라갈 생각을 하자 아찔하다. 몸집을 한껏 키운 내 지방세포들은 안전하게 안착해 모든 적응을 마쳤건만, 나는 아직도 체중계에 찍힌 숫자가 낯설다. 이 숫자는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아니었음 한다.
내일 아침 체중계에 올라가기가 두려워진 나는 2주 동안 우선 2킬로만 빼야겠다고 급하게 마음먹는다.(3킬로 다 빼면 정 없으니까) 이 결심을 막 했는데, 심지어 지금 밤 10시가 넘었는데 갑자기 허기가 느껴진다. 어제 먹다 남은 피자가 냉동실에 있는 것도 생각이 난다. 역시 다이어트는 내일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