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한 롤에 담긴 계절

필름 사진을 통해 느린 기록이 주는 특별함

by 비치나


4603_03.jpg 전주의 늦여름

사진을 찍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필름은 그중에서도 조금 다른 리듬을 가지고 있다.

한 롤에 한정된 컷 수 그리고 당장 확인할 수 없는 결과. 그래서 필름으로 계절을 담는 일은 늘 기다림을 동반하고 그 기다림 덕분에 더 특별해진다.



4603_12.jpg 날씨가 정말 좋았던 날이었다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나는 필름 사진이 계절의 분위기를 조금 더 잘 담아낸다고 믿는다.

아마도 촬영 전, 오늘의 하늘과 공기를 살피고 어떤 필름이 어울릴지 오래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미 계절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절마다의 공기와 햇살을 떠올리며 그 깊이를 그려본다. 필름 한 롤을 고르는 순간, 계절은 이미 사진 속에 절반쯤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다. 속된 말로, 필름 촬영은 늘 조금 ‘쫄린다’.

원하는 장면을 얻기 위해 머릿속으로 수십 번 장면을 시뮬레이션하고 빛의 위치를 따라 움직이며, 노출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디지털이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을 실수들이 필름에서는 곧바로 되돌릴 수 없는 결과로 남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카메라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오래전에 만들어진 수동 카메라다.

사실 필름 카메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당근마켓에서 단돈 13만 5천 원에 렌즈 두 개까지 포함된 채로 글이 올라왔길래 냉큼 주워왔다. 스스로 잘 샀다며 장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가벼운 마음으로 했던 첫 수리비만 7만 원이 들었다. 카메라 가방을 들고 ‘이게 맞나…’ 중얼거리며 퇴근길 버스에 앉아있던 그 허무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뒤로는 매년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이 카메라를 ‘건강검진(수리)’을 주기적으로 맡기고 있다. 정이 들어버려 이제는 고장 날까 봐 내가 더 조마조마하다.



000044830002.jpg 필름을 제대로 끼우는 방법을 몰라 한 컷 안에 36번을 겹쳐서 찍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초반엔 특히 많이 헤맸다. 필름을 잘못 감아 통째로 날리기도 했고, 노출을 못 맞춰 사진이 까맣게 혹은 하얗게 날아간 걸 받아 들고 울먹이던 날도 있었다. 한 번은 필름을 몇 개나 망치고는 친구에게 “나 사진 안 찍어!”라며 버럭 한 뒤(친구는 잘못한 게 없었다.) 집에 와서 이불에 코를 박고 울었던 적도 있다. 그런데 며칠 뒤 또 카메라를 챙겨 나가던 내 모습이 스스로도 우습다.(친구는 뒤에서 장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현상소 사장님이 먼저 알아보는 단골이 되었다. 낯설고 어렵던 필름 사진이 어느새 내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치며 알게 되었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단순히 셔터를 누르는 일이 아니라 빛과 계절 그리고 그 순간의 나 자신과 마주하는 행위라는 것을.



4603_15.jpg 여름날의 빛

현상소에서 사진을 받아 드는 순간은 언제나 마법 같다. 셔터를 눌렀을 땐 미처 몰랐던 표정, 이미 지나가버린 계절의 공기와 냄새가 사진 속에서 되살아난다. 여름에는 녹아버릴 듯 투명하고 뜨거운 햇살과 가을에는 어느덧 서늘해진 공기, 겨울에는 숨결이 하얗게 피어오르던 차가움까지 사진 속에 남아 있었다.


분명 찍을 때는 손끝이 얼어붙을 만큼 추워서 “다시는 겨울에 찍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막상 사진을 받아 들면 이상하게도 그 계절의 아련하고 낭만적인 무드만 남는다. 여름의 뜨거움은 빛나는 청춘으로, 가을의 쓸쓸함은 따뜻한 그리움으로, 겨울의 매서움은 고요한 평화로 남는다. 추억이란 결국 그렇게 미화되어, 다시 또 그 계절을 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온다.


이렇게 보면, 필름 한 롤에는 단순히 계절만 담기는 게 아닌 것 같다.

그 계절을 마주하며 내가 느꼈던 긴장과 기다림 그리고 그 순간 곁에 있었던 사람들의 표정과 마음까지 함께 새겨진다. 필름은 빠르게 사라지는 계절을 천천히 붙잡는 수단이자 지나간 시간을 다시 불러내는 방법이다.


나날이 필름 값은 오르고 찍고 나서도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없는 불편한 매체지만,

내가 굳이 굳이 필름을 고집하는 건 바로 이 느리고 특별한 매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오늘도 필름값을 벌기 위해 일하는 나.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