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2003년, 북경
중국에서 살기 위해서는 중국어를 해야만 했다.
수도 북경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 시절 내가 기억하는 북경은 몇 가지 장면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거칠게 쏟아지던 북경 억양, 국방색 인민복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도시 전체를 낮게 덮고 있던 회색 공기.
아침은 늘 뿌옇게 시작됐다.
햇빛은 있었지만 선명하지 않았고, 건물들은 완성되지 않은 골격처럼 어딘가 비어 있었다. 골목을 가로지르는 자전거 바퀴는 느린 리듬으로 굴러갔고, 사람들은 그 리듬에 맞춰 하루를 시작했다.
관공서와 시장, 학교—모든 생활은 중국어로 이루어졌다.
외국인을 위한 배려는 없었다. 그저 모두가 자기 언어로, 빠르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뿐이었다.
그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마주한 벽은 언어였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사이, 나는 북경어언대학(北京語言大學)에 등록했다. 낯선 언어를 하루라도 빨리 내 삶의 언어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문장이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으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고, 틀릴 것 같으면 차라리 침묵을 택하는 편이었다.
머릿속에서 문장을 몇 번이고 굴려보다가,
겨우 한 마디를 꺼내고,
그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입을 닫았다.
북경에서는 그런 나의 성향이 더 또렷해졌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나는 늘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공부했다.
이 낯선 언어가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나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교까지는 작은 미니버스를 타고 다녔다.
정해진 정류장이 따로 없어서, 내릴 때가 되면 큰 소리로 외쳐야 했다.
“下车!(샤처!)”
‘여기에서 내려요’라는 뜻의 그 한마디를 말하기까지,
나는 매번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연습을 해야 했다.
나는 나를,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고 싶었다.
아이들의 학교 행사에도 조금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체육대회 날이면 운동장은 부모들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땀을 흘리며 달렸고,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들이 나를 발견하고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순간, 아이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학교에서 열린 국제 음식 축제에도 참여했다.
각 나라의 부모들이 자기 나라 음식을 만들어 오는 행사였다.
나는 김밥을 말고, 잡채를 만들고,
아이들이 좋아할 닭꼬치를 준비해 학교로 갔다.
운동장에는 인도 카레의 향과 이탈리아 파스타 냄새,
그리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중국 향신료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사람들 속에 들어와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생활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이번에는 일이 하고 싶어졌다.
내가 번 돈을, 내가 직접 써보고 싶었다.
그 단순한 바람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나는 아이들을 보낼 어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북경 시내의 한 외국어 학원을 찾게 되었다.
아이들 수업 상담을 받던 중,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선생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의사를 밝혔고,
다음 날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곳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아침에는 북경어언대학(北京語言大學)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오후에는 북경 시내 어학원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하루가 가득 찼다.
가끔은
내가 다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다시 나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돈을 벌고,
다시 경제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내 삶을 단단하게 붙잡아 주었다.
뜻밖의 선물도 있었다.
직원 자녀 할인 덕분에 아이들은 수업을 조금 더 저렴하게 들을 수 있었고,
그 여름 내내 중국어와 영어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아이들은 그때
“귀가 트였다”고 말했다.
그 여름,
북경 시내의 한 어학원에서
아이들도, 나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내가 번 돈으로 생활비와 아이들 학원비를 감당했고,
남편의 수입은 그대로 저축할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어느새 나는 북경의 생활이 조금은 익숙해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북경어언대학(北京語言大學)의 과정을 마친 뒤에는 중국 대학에서 중국어를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였다.
남편에게 새로운 발령장이 나왔다.
다음 도시는 홍콩이었다.
서울을 떠난 지 1년 6개월 만에,
나는 다시 짐을 싸야 했다.
막 익숙해지려던 도시를 뒤로하고,
다시 낯선 곳으로.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움직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