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으로 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음식을 만들기도 하며,
붓글씨를 쓰고, 종이 접기나 도예, 나무공예 같은 일에도 관심이 많았다.
손끝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새 종이를 접을 때의 바스락 거림,
붓끝에서 번지는 먹의 향,
반죽 위로 흩어지는 밀가루의 따뜻한 냄새.
그런 순간들은 내 안의 고요를 깨우는 작은 의식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무언가를 꾸준히 오래 하기란 쉽지 않았다.
쉽게 시작하고, 쉽게 접는 성격 탓에
열정은 금방 불타올랐다가도 어느새 식었다.
작은 성취감 뒤엔 늘 “다음엔 뭘 해볼까”라는 조급함이 따라왔다.
그래도 한 가지, 유일하게 계속 이어온 일이 있다.
바로 일기 쓰기다.
수십 권의 다이어리.
색깔도, 모양도, 표지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그 안엔 공통된 글씨체,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내 마음의 결이 담겨 있다.
그 속에는 기쁨도 있고, 분노도 있고,
실패, 후회, 희망, 다짐이 뒤섞여 있다.
어떤 날은 눈물이 번져 글씨가 흐릿하고,
어떤 날은 너무 행복해서 글이 춤추듯 흘러간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스스로를 돌아봤다.
‘왜 그렇게까지 힘들었을까?’
‘그때 나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일기 속의 나는 나에게 늘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묻고, 적고, 다시 쓰며
조금씩 마음을 다듬었다.
해외에서 살아온 세월 동안
손에 잡히는 것보다 마음에 남는 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집은 늘 작았고, 살림은 최소한이었다.
아이 둘과 함께 이사 박스를 늘 곁에 두고,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해야 하는 삶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손끝으로 남기는 기록만은 놓지 않았다.
매일 밤, 집이 잠잠해지면
작은 책상 위에 일기장을 펼치고 펜을 들었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하루를 다시 살아내는 그 시간만큼은
세상 그 어떤 부귀도 부럽지 않았다.
일기에 남은 하루의 흔적은
내 삶의 자취이자, 또 다른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흩어지는 삶 속에서도 종이 위에 남겨진 글자는
변하지 않는 나의 축이 되어 주었다.
머물지 못하는 삶을 살더라도
글만은 언제나 제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은 즐거웠지만,
글쓰기는 내 마음을 다스리는 유일한 도구였다.
그림을 그리며 느끼는 몰입도 좋고,
음식을 만들며 경험하는 창조의 기쁨도 좋았지만,
글을 쓰는 동안에는 세상이 잠시 멈췄다.
글자 하나를 적을 때마다 마음이 정리되고,
문장 끝마다 나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무엇보다 글은
형체 없는 감정을 밖으로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듯 조심스럽게 모양을 갖추게 해주는 일이었다.
흔들리던 마음도 글로 적히는 순간
자리와 이름을 얻어 차분해졌다.
혼자의 시간을 사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기록의 힘’ 때문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펜을 들어 글을 적을 때,
나는 내 마음을 돌보는 법을 배웠다.
그날의 후회도, 불안도, 작은 기쁨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였다.
이동이 잦은 삶 속에서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글만은 떠나지 않았다.
흩어지는 시간 속에서도
글은 나를 잃지 않게 붙잡아 주는 단단한 줄이 되었고,
내일의 내가 다시 찾아올 수 있는 흔적이 되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이 작은 습관이
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나 자신을 잃지 않게 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일기 속에서 나를 지키고,
나를 살아가게 했다.
어떤 날은 글이 눈물이 되고,
어떤 날은 희망이 되었다.
지금도 펜을 잡는 순간
나는 다시 나를 만난다.
세상의 소음이 잦아들고,
조용히 내 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찮아, 오늘도 잘 살았어.”
그리고 이제, 나는 조심스럽게 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솔직히 말해, 내 삶을 꺼내 보인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부끄럽고, 때로는 스스로 마주하기조차 힘든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단 하나다.
숨기고 덮어두는 동안 나는 더 흔들렸고,
그러나 기록으로 꺼내 적는 순간
비로소 내가 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흔적들을 글로 붙잡아
내 삶을 다시 세우고,
혹시 나처럼 흔들리는 누군가에게도 손을 내밀고 싶다.
나는 크게 성공한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화려하고 멋지게 산 인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삶이어도 남길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소리 없이 지나간 하루들에도
기록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특별하지 않은 삶일지라도
그 속에는 분명 마음의 결이 있고,
글을 쓰다 보면 그 결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 조용한 순간들을 붙잡아
나만의 언어로 남기고자 한다.
이 글은 그렇게 시작된다.
나의 이야기를 위한 기록이자,
누군가에게는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조용한 한 줄이 되기를 바라며.
“쓰는 동안 나는 흔들렸지만, 쓰고 난 나는 더 단단해졌다. 이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도 조용한 빛처럼 스며들기를."
손으로 세상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작은 것들을 만들고, 하루의 감정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흩어지는 시간을 붙잡아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가장 깊이 이해하게 한 것은
그 모든 순간을 기록으로 남긴 일기였습니다.
흔들리던 마음도 글 위에 올려놓는 순간
조금씩 모양을 갖추고, 차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말로 다 꺼내기 어려웠던 감정들,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 남아 있던 자리들을
조용히 글로 엮어 본 기록입니다.
제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 여전히 부끄럽고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나누고 싶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제가 글을 쓰며 저를 이해했듯,
이 기록이 누군가의 마음에도
작은 숨, 한 줄의 위로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당신의 하루 속에서도
조용히 빛을 건네는 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