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버틴 자리들 [20장]
그때의 나는, 살기 위해 일했고
살고 있다는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공부와 생계를 동시에 붙들기에는 내가 너무 버거워졌다는 걸.
결국 나는 휴학을 했고, 고졸 학력으로 OO그룹의 판촉 사원이 되었다.
오리엔테이션과 훈련 기간을 마치고,
매장으로 첫 출근을 하던 날, 새 구두 안쪽에서 발뒤꿈치가 먼저 벗겨졌다.
매장 안은 하루 종일 사람 소리로 가득했고,
무슨 일을 하게 될지보다 오늘 하루를 끝까지 서 있을 수 있을지가 더 중요했다.
그곳에는 삶에 바로 던져진 사람들이 많았다.
집안을 책임지는 소년, 소녀 가장들,
아픈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자기 인생을 미뤄 둔 청년들,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삶의 무게를 어깨에 얹고,
하루의 끝마다 기계처럼 다시 내일을 준비하던 중년의 노동자들.
진열대 앞에서 무거운 박스를 나르고,
굳은 손으로 바코드를 찍고,
무릎을 굽혀 물건을 채우고,
할인 스티커를 붙이며 시간을 견디던 사람들.
모두 빠듯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눈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무엇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서 ‘진선’이라는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다.
나와 동갑이었지만 이미 입사 3년 차였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지는 집안의 가장이었다.
하루 종일 매장에 서 있다가도 퇴근하면 곧장 어머니의 작은 분식집으로 가서,
진선이는 말없이 앞치마부터 둘렀다.
가스 불을 켜고 냄비에 고추장과 설탕을 풀어 달고 매콤한 떡볶이 국물을 만들고,
떡을 넣어 국물이 보글보글 숨 쉬기 시작하면 젓가락으로 어묵을 밀어 넣었다.
한쪽에서는 튀김 솥이 치익 소리를 냈다.
진선이는 김말이와 고구마를 뒤집어 금빛이 오르길 기다렸다가,
철망 위에 올려 기름을 털었다.
팬에서는 맛탕이 서로 부딪히며 딱딱 소리를 냈다.
진선이의 손끝에는 매운 김과 뜨거운 기름, 끈적한 설탕이 겹쳐 남아 있었다.
그것은 ‘맛있는’이라는 말로는 다 담기지 않는,
진선이의 또 하루를 사는 냄새와 온기였다.
진선이는 늘 씩씩했다.
나는 힘들다, 억울하다, 왜 나만 이러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진선이는 홀로 남은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는 것이
자기 삶의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 말 앞에서 나는 숙연해졌고, 부끄러웠고, 흔들렸다.
그 아이에게서 나는 처음으로
‘긍정의 삶’이라는 태도를 보았다.
판촉 사원의 세계는 또 하나의 학교였다.
출근을 하면 각 메이커에서 나온 사원들이
물건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매대 진열부터 했다.
발주하고, 유통하고, 진열하고,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까지.
사람이 먹고사는 구조를 몸으로 배웠다.
처지가 비슷해서인지 동료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늘 쉽게 마음에 닿았다.
그들의 대화 속에는
연애와 결혼, 포기와 책임,
삶을 버티는 방식과 무너지는 순간들이 그대로 섞여 있었다.
그 안에 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늘 반 발쯤 떨어져 서 있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때 이미 나는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머무는 사람일 거야’라고.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매장이 있다. 이태원의 OO체인.
외국인이 많았고, 종종 말을 걸어왔다.
잘하는 영어는 아니었다.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건 중학교 때 외워 두었던 문장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이 나왔다.
두려움보다 ‘통한다’는 감각이 먼저 왔다.
어느 날 점장이 그 모습을 보고
나를 이태원 지점 고정 사원으로 요청했고,
그해 나는 ‘회사를 빛낸 사원’으로 표창과 성과금을 받았다.
전 판촉 사원 MT에서 성공 사례 발표자로 무대에도 섰다.
1년 남짓 지나자 등록금 몇 배의 돈이 모였다.
진급 제안도 받았다.
이곳에서는,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생활이 유지된다는 감각은 생각보다 달콤했다.
나는 흔들렸다.
‘굳이 학교로 돌아가야 할까. 그냥 여기서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거 아닐까.’
그런데 마음 한쪽에서 같은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이게 정말 네가 바라던 삶이야?’
결국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뭐가 되든, 졸업만은 하자고.
복학 이후의 삶도 쉽지 않았다.
공부에 매달렸지만 돈은 늘 모자랐고,
장학금을 받아도 등록금은 늘 비어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아르바이트로 부족한 숫자를 메워야 했다.
복학과 동시에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동기들은 이미 다른 속도로 다른 세상에 가 있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버텼다.
대학 5년 동안 나는 화양동 언덕의 무허가 천막집에 살았다.
철거 통보는 반복되었고, 마음은 늘 경계 위에 있었다.
그때의 나는 강해지고 싶었다.
엄마와 동생들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그래서 밤낮으로 일하고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숨이 가빠졌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몸이 먼저 무너졌다.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일을 그만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물러났고,
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하루를 살게 되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와 오래 함께 있었다.
강해지고 싶었지만,
나는 생각보다 약했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겸손해졌고,
그래서 하루를 천천히 살게 되었다.
치료는 길었고, 계절은 몇 번 바뀌었다.
어느 오후, 의사는 짧게 말했다.
“완치입니다.”
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나는 바로 기쁘지도 못했다.
병원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다가
그제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따뜻했다.
햇빛이 유리문을 지나
내 발등까지 흘러들어 와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들국화가 피어 있었다.
누가 심지 않은 자리에서
작은 꽃들이 바람에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길가에 핀 들국화가 나처럼 느껴져서
그래서 더 오래 보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자주 앉았고, 종이를 펼쳤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잘 쓰기 위해서도,
보여 주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살아 있다는 감각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여전히 나는
이룬 것이 없었고,
앞은 흐렸고,
불안했고,
가진 것도 많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이 하나 생겼다.
나는 다시 숨을 쉬고 있었고,
계절을 느끼고 있었고,
내 손이 가는 쪽으로 내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스무 살의 바닥에서,
나는 끝이 아니라 나만의 ‘방향’을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나를 살게 했던 그 모든 순간처럼
조용히, 나의 손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손에서 기록되어 마음으로 이어지고,
그 마음은 행동이 되고,
그 행동은 결국 내 인생을 바꾸게 되리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연재는 한 사람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 스무 살의 바닥까지 흘러왔습니다.
집, 시장, 학교, 마트, 병실, 그리고 다시 종이 앞까지 이어진 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늘 손으로 버텨 왔습니다.
물건을 나르며, 음식을 만들며, 장부를 적으며, 그리고 결국에는 글을 쓰며 살아왔습니다.
그 손의 움직임이 저를 하루로 데려왔고, 그 하루는 다시 저를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글들을 쓰는 동안, 저는 특별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라지지 않게 붙잡아 두고 싶었습니다.
제가 지나온 날들, 저를 스쳐 간 얼굴들,
그리고 무너질 듯하면서도 끝내 꺼지지 않았던 감각 하나를.
어쩌면 이 연재는 과거를 정리하는 일이기보다,
앞으로의 나를 선택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떤 속도로 살 사람인지,
어디에 마음을 기울일 사람인지,
무엇을 놓치지 않고 살고 싶은 사람인지를 이 기록을 통해 배웠습니다.
이제 [마음이 버틴 자리들] 연재는 여기서 멈춥니다.
하지만 기록은 멈추지 않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쓰고, 만들고, 적고, 남길 것입니다.
조용히, 손으로.
이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지나온 시간들에도, 아직 꺼지지 않은 무엇이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