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버틴 자리들 [19장]
대학 2학년.
등록금을 마련할 길은 완전히 막막해졌다.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다 했고,
근로장학금도 신청해서 학교에서 일을 했지만
등록금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은행 학자금 대출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집도, 땅도, 담보도, 소득증명도 없는 집안에서는
대출조차 사치에 가까웠다.
그때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모의 첫째 딸의 남편, 사촌 형부.
결혼식에서 한 번 스쳐 본 사이,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형부는 내가 아는 유일한 회사원이었다.
나는 사촌 언니에게 어렵게 부탁해
형부의 갑근세 영수증을 복사해 은행에 제출했다.
은행에서는 보증을 서 준 당사자의 내방을 요청했다.
난 또 어렵게 부탁했고,
다행히 형부는 아무 말 없이, 기꺼이 보증을 서주었다.
그 덕분에 한 학기 등록금 70만 원의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영수증 한 장으로 학자금 대출을 받아 은행을 나오는 순간,
나는 울컥했다.
창피함과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온 눈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때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것이 있다.
“빨리 이 빚을 갚고,
나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 이후로 나는 휴학과 복학을 반복했다.
커피숍, 아이스크림 가게, 슈퍼 점원, 과외….
손끝에 땀 냄새가 배어드는 일들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존심이 상했던 때는
삼촌의 큰딸인 사촌 언니네 슈퍼마켓에서 일하던 때였다.
언니는 신길동에서
슈퍼마켓과 속셈학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언니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일하다가 결혼했고,
형부네가 시골에서 쌀을 보내오면
그 쌀을 팔아 가게를 키워 갔다.
쌀가게에서 슈퍼로, 슈퍼에서 학원으로,
사업은 조금씩 확장돼 갔다.
소위 공부 잘했다던 나는
언니네 학원 강사가 아니라
언니네 슈퍼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학원 강사로 일하고 싶었는데…’
씁쓸한 생각이 자꾸 따라붙었다.
“내 학벌이 언니 눈에는 모자랐나 보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다가도 또 다른 내가 속삭였다.
“아니야. 아직 졸업을 안 했잖아.
지금은 할 수 없는 거야.”
스스로를 달래며 겨우 숨을 고르곤 했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나는 물불 안 가리고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했다.
말없이 몸으로 때우며 푼돈을 벌었다.
문득, 언니의 지난 시절이 떠올랐다.
언니가 중고등학생이던 때,
우리 집이 아직 평온했고 온전했던 시절,
언니는 엄마가 하던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받아 가곤 했다.
그 언니가 이제는 나를 고용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조금 더 작아졌다.
영화의 필름이 바뀌듯,
인생의 아이러니가 눈앞에서 조용히 펼쳐지고 있었다.
대학 생활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느라
캠퍼스의 낭만도, 상아탑의 진리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채 흘러갔다.
가난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갔다.
나는 무엇을 하려면 선택해야 했고,
그 선택을 하는 순간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아 있는 순간들이 있다.
대학 방송국 동아리 기자로 활동하며
용돈을 벌었다.
대학 곳곳에서 일어나던 크고 작은 일들을
사건과 사고로 묶어 교내 방송을 만들었고,
그 일로 언론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또 하나,
연극 여주인공으로 무대에 섰던 시간이다.
연극은 정말 우연이었다.
학교 매점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연극부 선배와 대학로에서 일하던 프로 연출가에게
요즘 말로 하면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다.
그들이 준비 중이던 작품은 <카사블랑카>였다.
연극은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했기에
처음엔 망설였다.
게다가 부끄러움이 많던 내가 여주인공이라니.
그런데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분명히 해 보고 싶었다.
나에게도
엄마가 가졌던 예술적 기질이
조금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한겨울 내내 연습한 끝에 막이 올랐다.
분장 냄새, 뜨거운 조명,
무대 바닥을 타고 올라오던 진동,
커튼 뒤에서 뛰던 심장 소리.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마지막 날,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긴 박수를 보내주었다.
커튼콜의 빛 아래에서
잠시나마 나는
학교의 ‘유명인’이 되었다.
짧고도 뜨거운,
내 청춘의 축제 같은 순간이었다.
그 무대에 함께 섰던 친구들은
지금도 내 곁을 지켜주는 소중한 벗들이다.
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화양리 언덕의 무허가 천막집,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집에서
나는 램프 하나 켜놓고 공부했다.
그 희미한 불빛이
그 시절의 나를 지탱해 주던
유일한 희망이었다.
삶은 빠듯했고,
나는 늘 초조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들이 내 삶의 바닥을 단단히 다져주었다.
나는 가난 속에서
인간 가치의 존엄을 배웠고,
결핍 속에서
선택의 의미를 배웠다.
그 모든 시간이
내 삶의 근육이 되어
오늘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
그때의 나는
버티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았다.
지금의 나는
기록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산다.
기록은 살아남은 자의 언어이다.
그래서 나는,
사촌 형부의 갑근세 영수증에서 시작된 그 빚을
오늘도 기록이라는 언어로 천천히,
그러나 끝까지 갚아 나가고 있다.
✍️ 작가 노트
이 글은 등록금 앞에서 처음으로 존엄이 시험대에 올랐던 시절을 돌아보며 쓴 기록입니다.
사촌 형부의 갑근세 영수증으로 겨우 학자금 대출을 받던 순간,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였고,
동시에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그 경험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삶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나는 방송국 보도부 기자로 활동하며 언론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학교 곳곳의 사건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해 원고로 만들었고,
그때 처음으로 ‘글로 돈을 벌고 있다’는 감각을 가졌습니다.
생계를 위해 선택한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내가 기록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 가장 이른 출발점이었습니다.
그 무렵 내 주변에는 삶을 먼저 짊어진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장과 골목에서 일하며
가난을 부끄러움이 아니라 노동으로 견뎠습니다.
나는 그 삶의 현장 속에 있었고,
그들 틈에서 노동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이 글은 한 개인의 대학 시절 기록이지만,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음지의 사람들’의 초상이기도 합니다.
가난 속에서도 존엄을 놓지 않으려 했던 마음,
결핍 속에서도 각자의 삶을 일구어 가던 손들의 기억입니다.
그때의 나는 버티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았고,
지금의 나는 기록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