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시험이 끝난 날, 나는 배가 고팠다.

마음이 버틴 자리들 [18장]

by 이도화
"시험이 끝난 날, 나는 유난히 배가 고팠다."

시험이 끝난 날, 나는 이상하게도 기쁘지도, 후련하지도 않았다.


교문을 나설 때 그냥 배가 고팠다.
마음은 어디에도 내려놓을 수 없었는데, 몸부터 허기졌다.
그래서 학교 앞 분식집으로 갔다.


떡볶이와 어묵을 시켰다. 떡볶이에는 김말이도 넣었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나에게 주는 포상이었다.
허겁지겁, 우걱우걱 삼키다가 문득 눈물이 났다.


그동안 나를 지탱해 오던 ‘견뎌야 한다’는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자,
그 자리에 막막함이 고여 들었다.
마치 오래 붙잡고 있던 난간에서 손을 떼고 나서야
비로소 느껴지는 허공처럼. 무섭고, 허전했다.


이제는 무엇을 붙잡고 하루를 살아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 다시 힘을 써야 할지 몰랐다.


버티는 시간이 끝난 자리에는 자유보다 먼저 낯선 침묵이 찾아왔다.
그 침묵을 깨기 위해 나는 다시 무엇인가를 붙잡아야 했다.


시험이 끝났다는 건 목적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군가 정해 준 계단을 다 내려오고 나니 이제는 내가 방향을 골라야 했고,
그 순간, 나는 기쁨보다 막막함을 먼저 배웠다.


1985년, 스무 살의 나는 재수를 하고 싶었다.
이과반에서 특별히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었고, 시험 역시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들어가지 못하면 대학이라는 문턱을 평생 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 성적이 허락하는 학교에 조용히 발을 들였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은 선명한 문장이라기보다,
물에 번진 잉크처럼 흐릿했다.
’대학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사실은 감정이 너무 복합적이라
나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기쁘지 않아서 슬픈 것도 아니고,
힘들어서 울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어디에 도착했는지,
이곳이 내가 가려던 길이 맞는지
나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교정에 앉아 있으면 바람은 좋았고,
내 이름이 적힌 학생증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 위에 기쁨이라는 감정만 빠져 있었다.


스무 살은 환해질 줄 알았다.
조금은 가벼워지고, 조금은 당당해지고,
적어도 ‘해냈다’라는 말쯤은 자연스럽게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내 안에는 “이제 뭐지?”라는 질문만 남아 있었다.


내가 다니게 된 대학은 명문도 아니었고,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곳도 아니었다.
그 사실이 괜히 자존심을 건드렸다.
“나도 친구들처럼 더 잘하고 싶었는데…”
작아 보이는 비교는 생각보다 오래도록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엄마는 말했다.
“네 친구들은 다 명문대 갔다는데… 나는 네가 제일 잘할 줄 알았어.”


왜 엄마는 그 사실을 그토록 또렷한 말로 내리꽂았을까.
그 말은 칼처럼 가슴에 박혔다.
그때의 나는 그 말 안에 숨어 있던 사랑과 걱정의 무게를 알아채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가난은 여전히 발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등록금을 낼 방법이 없었다.
입학금은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매 학기마다 마음은 늘 피를 말렸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 굳이 읽지 않아도 될 책을 펼쳐 두고,
노트 가장자리에 의미 없는 선을 그었다.
손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마음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기쁨은 언제나 성취의 보너스처럼 자동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어떤 시작은 박수보다 침묵에 더 가깝다는 것을.


스무 살의 나는
어른이 된 기쁨보다
혼자 서 있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그해의 봄은 유난히 조용했고,
사진 속의 나는 웃고 있었지만
기억 속의 나는 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기뻐해도 된다는 허락 같은 것,
혹은
이제부터의 나를 설명해 줄
아주 작은 문장 하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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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노트

이 글은 시험이 끝난 뒤 찾아온 공허에서 시작된 기억을 더듬으며 쓴 기록입니다. 오랫동안 “견뎌야 한다”는 말로 하루를 버텨 온 시간들이 끝났을 때, 기쁨 대신 허기와 침묵이 먼저 찾아왔던 순간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스무 살은 환해질 줄 알았습니다. 대학생이 되면 조금은 가벼워지고,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말쯤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막막함, 비교에서 오는 자존심의 상처, 그리고 여전히 놓아주지 않던 가난과 책임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시절, ‘시작’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던 무게를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이 기록을 통해 저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반드시 환호 속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아무 말도 없는 자리에서 혼자 서는 일일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순간들 역시 삶의 중요한 한 페이지였다는 것을, 지금의 제가 조심스럽게 인정해 보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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