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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Jan 15. 2021

인생은 정처 없이 방황하는 여행

역마 - 이묵돌

 '리뷰왕 김리뷰'.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페이스북 페이지이다. 엉뚱하고 재치 있는 리뷰를 올리던 이 사람은 한때 일 년에 억을 넘게 벌 정도로 성공했었다. 그러나 그는 돌연 리뷰 콘텐츠를 포기했다. 이유는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 이런 어이없는 이유로 '리뷰왕 김리뷰'는 떠나고 '이묵돌'이 나타났다.




 내가 김리뷰를 처음 알게 된 건 중학생 때 피키캐스트라는 앱을 통해서였다. 힘들고 외롭던 시기, 우연히 김리뷰의 게시물을 보게 되었다. 정신 나간 드립과 리뷰가 퍽 재밌었다. 하루 만에 김리뷰의 모든 게시물을 정주행 했다. 며칠 후 웬 논란이 터지더니 김리뷰는 피키캐스트를 떠났다. 그렇게 김리뷰는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몇 년 후 페이스북을 찾아보니 김리뷰는 여전히 리뷰를 하며 잘 살고 있었다. 회사를 세웠다고 한다. 콘텐츠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이상한 이름의 회사를 세웠다. 몇 달 후에 회사가 망했다. 자살 시도를 했다고 한다.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래나 뭐래나.


 이때쯤에 김리뷰가 쓴 진지하고 긴 글을 읽게 되었다. 그저 웃기기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지한 글을 읽으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어떻게 사람이 재밌는 글과 진지한 글을 동시에 수준급으로 쓸 수 있을까 궁금할 정도였다. 나는 김리뷰를 다시 구독하기 시작했다.


 고3, 온갖 스트레스와 무기력증에 시달릴 때, 다시 김리뷰를 찾아갔다. 김리뷰는 '페이스북에 이딴 글 쓰지 마'라는 페이지를 새로 만들어 그곳에 글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올라온 글 하나. <역마>. 2화 정도 읽은 후에 '이거 읽다가 끝도 없이 읽어서 자소서 쓸 시간도 부족하겠다' 싶어 나중에 몰아 읽기로 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찾아온 여름방학. 나는 게으름증이 더 심해져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학교에 다니던 중에는 원치 않더라도 사람을 만났는데, 방학에는 집에만 있어서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 유튜브를 보고 있던 와중, 택배기사가 초인종을 누르더니 작은 봉투를 건넸다. 이게 뭐지 싶어 10초 정도 봉투를 바라보다가 떠올렸다. 지난 6월, 페이스북에서 <역마>를 책을 낸다는 텀블벅을 보자마자 바로 후원했었지. 드디어 책이 나왔구나. 나는 그날 바로 책을 펼쳐서 끝까지 읽었다.


 <역마>를 읽은 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간접 경험을 위해서이다. 내가 할 수 없는 행위를 소설이나 수필을 통해 대신 경험하는 것. 아무 계획도 목적지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다. 페이스북을 통해 이 글을 읽을 때만 해도 고3에 불과했다. 대학 입시 따위에 영혼을 팔아야 했던 시기.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학교 수업을 듣거나 자습을 하고,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기숙사에 돌아가 또다시 공부하거나 유튜브를 보다 새벽 한두 시에 잠에 드는 생활의 반복. 벗어나고 싶었지만, 떠날 자신은 없었다.


 대학생이 되고 책으로 다시 읽은 <역마>는 더 좋았다. 문장은 훨씬 정갈하게 다듬어졌고, 중간중간 삽입된 삽화는 따스했으며, 마지막 엔딩 부분은 여전히 감동적이었다. 김리뷰의 여정이 마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일주일 정도 지난 사람이 담담히 경험담을 말해주는 것처럼 다정하게 들렸다. 그리고 이 인간은 뭐 이리 음식 묘사를 잘하는지. 당장 이 음식을 먹고 싶게 만드는 묘사력을 지녔다. 가히 책을 읽으면 사람이 실종된다는 명성에 걸맞다.




 고백할 게 있다. 이 글을 두 번이나 읽었음에도, 나는 바뀐 게 전혀 없다. 나란 놈은 여전히 겁 많은 찌질이기 때문에, 몸을 눕히고 있는 이 집을 박차고 떠날 용기가 없다. 여전히 하루 종일 집에서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있다. 글 하나로 사람이 180도 바뀌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래도 그나마 나아진 게 있다면, '나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이라면 '집을 혼자 떠난다'라는 상상은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 나서 '나도 이 사람처럼 방황하고 싶다, 마음껏 떠돌아다니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발전이다. 매너리즘과 염세주의에 빠져 있던 나의 고개를 들어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었다.


 어쩌면 이 <역마>가 사람의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 계획 없이 세상에 던져지고, 딱히 원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던 곳에 다다르다 또다시 정처 없이 떠나는 여정. 이게 바로 인생 아닐까. 너무 난폭하게 비유한 것 같긴 하다만 뭐, 인생을 흔히 여행에 비유하지 않는가. 인생이라는 여행은 관광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호텔에서 와인을 마시는 호화로운 여행보다는, 작은 배낭 하나 메고 목적지 하나 없이 떠돌아다니는 여행에 더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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