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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Jan 17. 2021

헤어진 연인의 기억을 지우고 싶다면

영화 『이터널 선샤인』



1.


 한 남자가 전철을 기다린다. 서류 가방을 들고 서 있던 남자는 반대편 플랫폼에 몬턴 행 열차가 도착한 것을 보고 뭔가에 홀린 듯 뛰어간다. 남자는 그대로 몬턴 행 기차를 타고 떠난다. 회사를 결근하고 몬턴의 겨울 바다를 걷는 남자. 남자는 그곳에서 머리색이 파란 여자를 만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연인 사이가 된다. 어느 날 둘은 크게 싸우고 연락을 하지 않게 된다. 조엘이 사과하기 위해 선물을 들고 클레멘타인이 일하는 서점에 찾아갔다. 그러나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모른 척했고, 다른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알고 보니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모른 척한 게 아니라 조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웠기 때문에 정말로 못 알아본 것이었다. 조엘은 자신도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한다. 클레멘타인과의 연애를 회상하고, 그녀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처분한 후, 기억을 지우는 기계 장치에 몸을 맡기고 최근 기억부터 없애나간다.


 최근 기억. 클레멘타인과 악담과 상처를 주고받는 게 일상인, 권태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기억이 사라지자 조엘은 환호한다. 자신의 기억 속 사라져가는 클레멘타인을 향해 잘됐다며 소리친다. 그러나 점점 오래된 과거로 갈수록 클레멘타인과 행복했을 때 기억이 사라져가자 조엘은 괴로움을 느낀다. 갈라진 빙판 위에서 누워 밤하늘을 쳐다볼 때,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이 사라지려고 한다. 조엘은 제발 이 기억만은 남겨달라고, 이 기억만은 없애지 말아 달라며 절규한다.


 조엘은 그녀와의 행복했던 기억을 지키기 위해 도망친다. 더 깊은 기억으로, 수치스럽고 창피한 기억으로 도망친다. 그러나 이내 곧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슨 짓을 해도 기억이 사라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받아들이기로 한다.


"때가 됐어, 조엘. 이제 곧 사라질 거야."

"알아."

"우리 어쩌지?"

"그냥 즐겨."
 
-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해변에서 계단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마지막 기억. 해변의 주인 없는 집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마지막 인사를 한다.


이번엔 남는 게 어때?

문밖으로 나왔는걸. 남은 기억은 없어

다시 와서 최소한 인사라도 해. 우리가 한번 했던 것처럼. 안녕, 조엘

사랑해

 -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주인 없는 집에서 헤어지며




2.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관 가는 게 귀찮기도 하고, 영화에 재미를 붙여본 적이 없다.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가 내가 너무 영화를 안 보는 것 같아서 왓챠나 넷플릭스라도 결제해서 의무적으로라도 보기로 했다. 왓챠플레이를 결제했다.


 왓챠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던 도중, <이터널 선샤인>을 발견하였다. 영화는 별로 안 봐도 영화 리뷰는 자주 본다. <이터널 선샤인>은 수많은 영화 중에서도 내 기억 속에서 강렬하게 남아 있는 영화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보기 시작했다.


 무려 반년 만에 보는 영화. 명작을 선택한 건 잘한 일이었다. 첫 단추로 이상한 영화를 봤으면 영화에 재미를 못 붙일 뻔했다. 새벽 1시에 보기 시작해 3시까지 쉬지 않고 보고, 평점 5점을 주었다.




3.


 나도 평론가나 유튜버처럼 영화를 분석해보고 싶다. 그러나 책과는 다르게 영화는 여러 번 보는 데 큰 힘이 든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한 영화를 여러 번 돌려보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겠다.


 내가 주의 깊게 본 것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이다. 영화 초반에서 '나는 염색을 자주 해요'라면서 머리색이 중요한 키포인트라는 걸 대놓고 어필한다. 그녀의 머리색은 세 가지다. Blue Ruin, Agent Orange, Green Revolution. 나중에 찾아보니 빨간색 머리도 있다던데 아무래도 나는 빨간색과 주황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머리색의 역할은 타임라인 구분과 클레멘타인의 감정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일단 타임라인 얘기부터 하자면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은 조엘과 만나기 전, 조엘과 만나는 중, 조엘과 헤어진 후로 나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역행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시간선 구분이 살짝 어렵다. 나는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을 통해서 시간선을 구분했다.


 중요한 건 클레멘타인의 감정이다. 클레멘타인은 조엘과 만나기 전에는 초록색 머리였다. Green Revolution. 레볼루션이란 '혁명'이란 뜻이다. 혁명은 이전에 없던 커다란 변화이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만나서 연인이 되는, 관계의 변화를 뜻한다.


 조엘과 만나는 중에는 오렌지색(빨간색) 머리를 한다. Agent는 요원이란 뜻인데 별 의미는 없어 보인다. 그냥 클레멘타인의 충동적이고 활발한 성격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 클레멘타인이 오렌지색 머리일 때는 행복한 순간만 이어진다. 클레멘타인이 자신의 상처를 조엘에게 고백할 때는 아예 주위를 모두 오렌지색으로 덮어준다.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이 든다.


 조엘과 헤어진 후에는 파란색 머리를 한다. Blue Ruin. 푸른색 붕괴. 파란색은 차갑고 슬픈 색이다. 이 영화는 조엘 시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클레멘타인의 입장은 알 수 없다. 클레멘타인이 조엘과 헤어지고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보여주는 은유이다. 클레멘타인이 파란색 머리를 하고 조엘과 다시 만나 바다와 호수를 간다. 바다는 조엘과 처음 만났던 장소이고, 호수는 조엘과 함께했던 가장 소중한 추억의 장소이다. 공교롭게도 바다와 호수 모두 파란색이다. 이별 후의 머리색이 첫 만남 그리고 연애 중 최고의 순간의 색과 대구를 이루는 게 의미심장하다.


 두 번째로 눈여겨본 것은 카메라의 흔들림이다. 아무리 영화를 안 본다고 해도 카메라를 찍는 방식이 여러 가지 있다는 것은 안다. 보통은 카메라 흔들림을 최소화하기 위해 엄청 무거운 카메라로 찍고, 긴박한 상황을 찍을 때는 핸드 카메라로 찍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눈에 띄게 화면 흔들림이 많았다.



 이 화면의 흔들림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이 그녀의 감정을 나타내는 지표로 봤다면, 화면 흔들림은 조엘의 감정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조엘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화면의 흔들림은 조엘의 감정을 반영한다.


 초반 조엘이 몬턴행 기차를 탈 때부터 화면이 흔들린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이 사라지는 와중에는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화면이 미친 듯이 흔들린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함께 행복해하는 장면은 흔들림이 없다. 화면 흔들림이 많을수록 조엘의 감정이 격동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4.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사람들은 처음 만날 때 가공된 모습만 보여준다. 그 가공된 모습에 빠져 연인이 된다. 그러나 만남이 지속될수록 자신들의 본래 모습을 꺼내 보인다. 편안함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게 했던 가공된 모습과 본래 모습 사이의 괴리감을 느끼고, 그것으로 인해 상처 받고, 싸우고. 싸움을 반복하면 권태가 온다. 그리고 결국 헤어진다.


 이것이 일반적인 연애다. 일반적인 연애가 끝나고 찾아오는 후폭풍은 거세다. 이별 직후에는 연인과 싸웠던 기억, 지겨웠던 기억, 안 좋은 기억만 머리에 떠올라 괴로워한다. 특히나 끝이 안 좋았다면 더더욱 그렇다.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당하거나, 잠수 이별을 당하는 등.


 연인이란 매우 조심스럽고 불안정한 관계다. 그 관계는 단단한 콘크리트처럼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관계다. 그래서 연애는 끝이 중요하다. 한때 자신의 모든 걸 맡겼던 상대와 더 이상 못 보는 관계가 된다는 것. 견디기 힘들다.


 이 영화는 연인 사이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만나 연인이 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추억을 쌓으며 행복한 연애를 이어나가지만, 점차 서로가 익숙해지고 본래 모습이 나옴에 따라 상처를 입히고 받으며 갈등이 쌓이고, 결국 봇물 터지듯 싸움이 터지고 헤어진다.



 사람들은 헤어지고 나면 사랑을 주고받는 사이에서 기억을 지우고 싶은 사이가 될 때까지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연애를 회상한다. 그리고 실컷 욕을 하며 화를 삭이다가, 정말 행복했던 때를 추억하며 슬퍼한다. 그렇게 이별을 극복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연애는 특별하지 않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얻고 명작 타이틀을 얻었다. 연애를 여러 번 하고, 이별을 여러 번 겪은 후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 감상이 달라진다고 한다. 아직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느낀 감상은 형편없다. 누구나 알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 따위 밖에 없다.


 사랑을 이해하고 싶어서 여러 글을 찾아보고,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봤다. 그러나 짝사랑도 해본 적 없는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누군가와 한눈에 반해 연인이 되고, 서로에게 질려 상처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 평생 안 보는 관계로 변한다는 게. 머리로는 알아도 전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다. 사랑은 경험으로만 배울 수 있나 보다.




5.


 <이터널 선샤인>. 왓챠 첫 영화로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연애를 여러 번 겪어본 사람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며 흠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을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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