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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너무 발전해서 인류가 멍청해지는 이야기

by 천비단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내 아들이 어쩌고 저째?!”


뽀글 머리를 한 중년 여성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 외쳤다. 어찌나 목청이 큰지 문밖에서 복도를 오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무슨 일인지 살펴볼 지경이었다.


“어머님, 좀 고정하시고….”


흰 가운을 입은 남성은 당황한 듯 손가락으로 안경을 치켜올렸다.


“검사결과가 나온 걸 그대로 해석해드린 건데 화는 내시지 마시고요….”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화를 안 내?” 뽀글 머리가 흰 가운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손에 든 사진을 흔들었다. “지금 내 아들이 바보멍청이라고 한 거 아냐?”


“아닙니다!” 흰 가운이 황급하게 손을 흔들었다. “바보라는 건 지능이 정상보다 떨어지는 사람이죠. 아드님은 지능을 측정하는 게 불가능해요!“


”그게 그거잖아!‘ 뽀글 머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어머님, 모니터를 보세요.” 흰 가운은 처음 만나보는 유형의 보호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미 열댓 번은 반복한 설명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아드님이 말과 행동이 너무 굼떠서 찾아오셨다고 했죠. 한글을 떼는 게 유난히 느렸다고도 하셨고요. 첫날에 아동지능검사를 실시했더니 결과가 처참했죠. 그래서 뇌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되셔서 저희 뇌신경 연구소에 찾아오셨고요.”


“당연하지. 내 아이가 지능이 낮다니! 말도 안 되지. 뇌에 이상이 있는 게 확실해.”


“자. 이 사진을 보세요.” 흰 가운이 모니터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가리켰다. “이건 아드님 뇌를 스캔한 겁니다. 어느 부위가 얼마나 활성화되는지 보는 거예요. 이걸로 어느 부위에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죠.”


“그래. 그건 이해했어.” 뽀글 머리가 팔짱을 끼고 전투적으로 눈을 부라렸다. “그런데 왜 뇌 스캔 사진이 새까맣냐고!”


“제가 설명드리지 않았습니까.” 흰 가운은 이해력이 부족한 건지 현실을 부정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뽀글 머리가 하도 답답해서 가슴을 두들기고 싶은 심경이었다. 제발 이번에는 받아들였으면 하고 한 글자 한 글자 끊어서 말했다. “아드님은 뇌가 활성이 안 돼요.”


“그러니까…” 뽀글 머리는 변함없는 흰 가운의 대답에 따지고 들었다. “뇌가 활성이 안 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죽은 사람도 아니고 멀쩡히 살아 있는데!”


“어머님, 뇌 스캔은 대뇌피질의 전기 신호를 스캔해요.” 흰 가운이 항복의 의미로 목소리를 짙게 깔았다. “인간 뇌는 대부분 대뇌피질에서 기능하거든요. 숨 쉬고 똥 싸고 하는 생명활동에 관한 활동은 대뇌피질이 아니라 뇌간으로도 충분해요. 하지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등 고차원의 사고는 대뇌피질이 담당해요. 대뇌피질에만 문제가 생기면, 멀쩡히 살아는 있어도 인지 활동은 못 할 수 있는 겁니다.”


흰 가운은 최대한 쉬운 용어로 설명하고자 애썼다. 뽀글 머리는 자신을 유치원생 취급하는 듯한 흰 가운의 말투며 태도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 아들을 이렇게 똥멍청이 취급하다니. 정말 불쾌하기 짝이 없네! 세계 최고 수준의 뇌 연구소라더니. 서비스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야 연구소니까요….” 흰 가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님, 잘 들으세요. 아무리 뇌 활성도가 낮아도 대뇌피질이 존재하는 한 스캔은 돼요. 하지만 지금 아드님의 경우는 스캔이 아예 안 돼요. 이게 무슨 뜻이냐….”


뽀글 머리가 아무 말 없이 흰 가운을 쳐다봤다. 어디 한번 지껄여 봐.


“…제가 보기엔, 아드님은 대뇌피질이 없는 것 같아요.”


“참나, 어이가 없어서.” 뽀글 머리는 실소를 터뜨렸다. “사람을 바보 취급하는 것도 유분수지. 뭐라고? 대뇌피질이 없어? 이봐요, 아무리 나라도 대뇌피질이 뭔진 알아. 뇌 껍질 아니야. 근데 그게 없다니. 말이 돼?”


“저도 믿기 힘들어요. 하지만….” 흰 가운이 책상에 두 손을 쾅 치고 뽀글 머리 쪽으로 상체를 뻗었다. “이것 말고는 해석의 여지가 없어요. 어머님?”


“왜, 왜?” 뽀글 머리는 갑자기 태도가 적극적으로 변한 흰 가운 때문에 당황했다. 얼핏 흰 가운의 눈동자에서 불타는 열정과 광기가 보인다.


“아드님을 저희 연구소에 맡기시죠.”


“뭐?!” 뽀글 머리의 성대에서 찢어지는 까마귀 소리가 났다. “맡기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저희가 아드님의 뇌를 면밀히 연구해서” 흰 가운이 번개와 같은 속도로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원인이 뭔지, 치료는 어떡할지, 모두 알아내겠습니다!”


흰 가운이 뽀글 머리의 양손을 꼭 쥐었다. 뽀글 머리가 기겁하며 손을 빼내려했으나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건 인류 최초 사레입니다. 대뇌피질이 없는 인간이라니! 이런 건 그 어디서도 보고된 적 없어!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연구가 될 거야. 어머님, 제게 아드님이 꼭 필요합니다!”


뽀글 머리는 비명을 지르며 연구소를 뛰쳐나갔다. 흰 가운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다른 병원과 연구소, 대학기관을 전전하며 아들을 치료하려 애썼다. 아들이 십 대 중반이 될 때까지 한 문장도 제대로 말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뽀글 머리는 다시 흰 가운이 있는 연구소에 찾아갔다. 아들을 내줄 테니 맘대로 연구를 하든 뭘 하든 치료만 해달라 애걸복걸했다. 연구원들은 아들이 죽을 때까지 연구했고, 죽은 뒤에는 뇌를 적출해 연구를 이어갔다.


‘대뇌피질 상실증’의 첫 번째 환자 사례 이후로 몇십 년에 걸쳐 ’대뇌피질 상실증‘ 환자가 증가했다. 이들은 대뇌피질이 부분 혹은 전체가 존재하지 않아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신생아 천만 명 중 한 명 꼴로 나타나던 것이 점점 백만 명 중 하나, 십만 명 중 하나로 늘어나더니 결국 만 명 중 하나가 되었다. 정부는 그제야 심각성을 느끼고 ‘대뇌피질 상실증’을 사회적 문제로 인정했다.






“…대뇌피질 상실증의 원인이 뭐라고요?”


회의장 중앙에 앉은 빨간 넥타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발언자를 쳐다봤다.


“대뇌피질 상실증의 원인은” 자신만만한 표정의 회색 정장이 또박또박 말했다. “바로 스마트 기계입니다.”


“하아—”


빨간 넥타이가 손으로 눈두덩이를 감싸쥐었다. 회의장 곳곳에서 한숨 소리,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멍청해진 이유가 스마트 기계 때문이다, 이 말입니까?”


“바로 그겁니다! 위원장님, 제가 준비한 자료를 보시죠.”


회색 정장이 쇼핑백에서 종이뭉치를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자료를 받은 사람들은 표지에 큼직하게 적힌 제목을 읽고는 넘겨볼 시늉도 하지 않았다. 회색 정장이 빨간 넥타이에게 자료를 건네러 빔프로젝터 앞을 지나갔다. 스크린에 거뭇한 그림자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빨간 넥타이는 손에 쥐어진 종이덩이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봤다.


“다음 회의에 참석할 때에는 파일을 준비해서 미리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빔프로젝터랑 태블릿 둬서 뭐합니까.”


“죄송합니다 위원장 님.” 회색 정장이 자리에 돌아와 멋쩍게 웃었다. “제가 최근에 디지털 디톡스를 시작해서요.”


“디지털… 뭐요?”


“지금 여기 계신 분들도 제 설명을 듣고 나면 디지털 디톡스를 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회색 정장이 목을 가다듬었다. 두꺼운 종이를 촤라락 넘겼다. “모두 34페이지를 봐주십쇼. 여기를 보시면….”


회색 정장은 말을 멈추고 사람들이 종이를 넘기길 기다렸다. 아무도 종이를 넘기지 않는다.


“여러분, 34 페이지를…” 회색 정장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못 들었나 싶어 다시 말했다.


“그냥 진행하세요.” 빨간 넥타이가 훠이훠이 손을 흔들었다.


“도표를 직접 보셔야 이해가…”


“그냥 하라고!”


빨간 넥타이가 고함쳤다. 회색 정장이 부자연스럽게 기침을 두어번 했다.


“그럼 설명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인류는 놀라운 속도로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2050년에는 모든 전자기기에 음성 기반 챗GPT가 탑재되었고, 경쟁에 지친 삼성과 애플이 합작하여 스마트 나노머신을 내놓기도 했죠. 인간의 삶은 기게로 대체되었습니다. 글 쓰는 것, 그림 그리는 것, 말하는 것, 사람과 대화하는 것, 저녁 메뉴를 고르는 것, 심지어 애인을 만나는 것까지. 지금은 당연시되는 것들이 그 당시에는 엄청난 혁신이자 패러다임의 전환이었죠. 스마트 기계. 그것이 우리 인류를 더 나은 존재로 인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스마트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늘어나자 인간은 점점 아무것도 안 하기 시작했습니다. 흰 종이를 앞에 두고 어떤 문장으로 글을 시작할지 고민하기 대신 AI에게 3000자 분량의 글을 써달라고 명령하고, 맘에 드는 이성과 어떻게든 친해지려고 애쓰기보다 소개팅앱이 추천해준 이성의 프로필 사진만 대충 훑어보고 만날지 차단할지 결정했습니다. 인간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스스로 생각하길 포기하고 판단을 모두 기계에게 미뤘습니다. 이 행태가 몇백 년 이어지다가 오늘날에 와서야 인간의 뇌가 ‘진화’한 겁니다.”


회색 정장이 ‘진화’를 말하는 대목에서 유독 눈을 부릅뜨며 발음을 강조했다.


“대뇌피질이 사라진 게 ‘진화’라는 말이오?” 출입구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안경뚱보가 비꼬듯 말했다. “어떻게 대뇌피질이 얇아져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할 수 없는 게 진화라 할 수 있소?”


“당연히 진화죠.” 회색 정장이 왜 그런 걸 묻냐는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답했다. “어차피 복잡한 사고는 기계가 다 해주고, 아무리 멍청하고 능력 없다 해도 죽지는 않으니. 대뇌피질을 사용해 그곳에 에너지를 낭비할 바에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쓰는 것입니다. 만약 대뇌피질이 사라지는 게 생존에 치명적이었다면 진작에 대뇌피질 상실증은 10년 안에 사라졌을 겁니다. 아직까지 대뇌피질 상실증이 나타나는 건 인류에게 더이상 ‘생각할 능력’이 필요 없어졌다는 방증이죠.”


회의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회색 정장의 장장한 연설에 무어라 반응할지 정하지 못한 분위기였다. 안경뚱보는 애먼 종이뭉치를 만지작거렸다.


“…대뇌피질 상실증이 ‘진화’라는 발언은” 빨간 넥타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적어도 본 회의와는 어울리지 않군요. 저희는 대뇌피질 상실증을 고쳐야 할 병으로 규정했고, 당장 해결이 시급한 사회문제로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것이 ‘진화’라면 해결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회색 정장이 책상을 양손으로 내려쳤다. “이건 ‘해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인류의 새로운 진화를 목도하고 있음에 감사해하고 감격해야 합니다. 이토록 빠른 시간 내에 눈에 띌 정도로 큰 진화가 일어나는 건 생명과학 역사상 처음입니다. 여러분, 어떤가요? 막 흥분되지 않습니까?”


회색 정장이 두 팔을 뻗으며 말을 마쳤다. 마치 연극의 마지막 씬을 장식한 주연 배우와 같은 모습이었다. 열정적이고 광적인 회색 정장의 연설에 회의장에는 당혹스러운 공기로 잠겼다. 인류가 멍청해지고 있는 것이 ‘진화’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분위기였다.


“저기…”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의원이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질문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어떤 게 궁금하시나요?” 회색 정장이 과장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의원은 종이뭉치를 만지작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원래 있던 대뇌피질이 사라지는 거면… 그건 ‘진화’가 아니라 ‘퇴화’… 아닌가요…?”


“생물학에 ‘퇴화’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회색 정장은 답답한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업던 게 생기든, 있던 게 사라지든 모두 ‘진화’입니다. 형질의 변화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모두 진화라고 부르죠. 퇴화라는 단어는 생물학에 무지한 인간들이 멋대로 만들어낸 몰상식한 단어입니다.”


“그…러면” 젊은 의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회색 정장을 불안하게 쳐다봤다. “왜 디지털 디톡스를 하세요?”


“응? 디지털 디톡스?” 빨간 넥타이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예, 그, 회의 시작 전에 디지털 디톡스를 하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저기… 저 과학자 분께서….”


“그렇죠. 그게 왜요?” 회색 정장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니까, 왜 하시는지 궁금해서….”


“제 말 못 들으셨습니까? 당연히 제 대뇌피질을 지키기 위해서죠.”


젊은 의원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아니, 그러니까…” 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방금 전까지는 대뇌피질이 사라지는 게 인류의 진화라고 찬양하셨으면서, 왜 본인은 대뇌피질이 사라지는 걸 거부하시냐…고요.”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회색 정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저는 연구를 계속해야죠. 대뇌피질이 사라지면 곤란하단 말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민생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허구언날 모여서 공론하고 정책을 수립하시는데 멍청해지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 저를 따라서 다 같이 디지털 디톡스를…”


“바로 그거야!” 책상을 쾅 내려치는 소리가 회의장을 채웠다. 별안간 폭격이 떨어지는 듯한 파괴력에 회의장의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빨간 넥타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젊은 의원이 “무엇이 말이에요… 위원장 님?” 하고 묻자 빨간 넥타이는 눈빛을 희번득하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대뇌피질 상실증의 해결책 말이야!”






“난 더는 이렇게 못 살아!”


다혜는 소파에 대자로 누워 방방 뛰며 양팔을 휘둘렀다. 다혜의 몸이 인조가죽에 닿을 때마다 팡팡거리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아, 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아름이 버럭 화를 냈다. “가만히 좀 있어라! 어떻게 사람이 2분도 가만히 못 있어?” 그러고는 냅다 다혜의 허벅지를 찰싹찰싹 때렸다. “악! 아파!”하는 단말마가 끊기지 않았다.


“지치지도 않아? 어떻게 3시간 동안 지랄을 떨 수 있지?”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국가가 국민들 기계 사용을 금지시켜? 무슨 독재국가도 아니고… 아 아파 그만 때려어!”


아름의 손찌검을 바둥거리며 팔로 막던 다헤는 허벅지를 맞으나 팔로 막으나 똑같은 맨살이어서 똑같이 아프단 사실을 깨닫고 꽥 소리쳤다. 아름은 아랑곳 않고 계속 때렸다. 이번에는 반드시 다혜의 입을 틀어막겠다는 결의가 엿보인다.


“지금 너만 답답하냐? 나도 짜증 나!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조용히 좀 있어!”


“어떻게 조용히 있어?!” 다혜는 소파 위를 네발로 기어 아름에게서 멀어졌다. 무릎을 움켜 안고 벌겋게 달아오른 살을 문지르며 호소했다. “벌써 한 달이 넘었어. 폰도! 와치도! 태블릿도! 다 뺏겼어. 심지어 에어컨도! 열대 기후인 한국에서 에어컨을 켜지 말라는 건 범죄 아니야?”


“에어컨 없이도 시원해지는 방법이 있잖아.” 아름은 소파 밑에 손을 넣더니 커다란 부채를 꺼냈다.


“뭐야, 부채? 지금 나보고 에어컨 대신 부채로 버티라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릴…”


다혜는 치와와처럼 아름에게 돌격했다. 그러자 아름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혜에게 부채를 던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네가 나한테 부채질해야지.”


“….”


다혜는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부채질했다. 아름은 “크어— 시원타!”하며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며 “강풍!”이라고 외쳤다.


얌전히 부채질하던 다혜는 별안간 결연한 목소리로 “…안 되겠어!”라고 말하며 소파 위에 일어섰다. 들고 있던 부채는 아름에게 냅다 던졌다. 부채 모서리가 아름의 정수리에 직격하여 ‘깡’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악!” 소리와 함께 아름은 머리통을 움켜쥐고 바닥에 뒹굴었다. 많이 아파보였지만 다혜는 신경 쓰지 않고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는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다혜는 두 팔을 벌려 어설픈 연극톤으로 말했다. “국가에게 국민의 기계 사용을 결정지을 권리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기계를 사용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고, 권리입니다. 하지만 국가는 하루아침에 우리의 소중한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우리의 분노를 저들에게 보여줍시다!”


다혜는 말을 마치며 오른팔을 머리 위로 뻗었다. 다혜의 귓가에 가상의 박수 소리와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내가 지금 분노한 대상은 국가가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 아직도 고통이 안 가셨는지 아름은 정수리를 지혈하듯 움켜쥐며 엎드린 채로 이를 갈았다.


“어때? 나 좀 재능 있는 거 같지 않아? 나 나중에 정치나 할까?”


다혜가 기대에 가득 찬 말투로 말하며 슬쩍 눈을 떴다. 그곳에 아름이 서 있었다. 안광을 내뿜으며 다혜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친구야, 내가 정말 미안해. 우리 대화로 해결하지 않으렴?”


아름은 함성을 지르며 다혜에게 돌격했다. 소파 위에서 뒤엉키다가 아름이 다혜를 제압하며 올라탔다. 그리고는 쉬지 않고 온갖 험한 짓을 했다. 다혜의 비명이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가야겠다.”


아름은 시계를 보더니 바닥에 떨어진 책을 가방에 넣고는 가방을 챙기고 일어났다.


“오늘도 병원 가?”


“자주 가야지. 넌 학원 안 가냐?”


“이렇게 더운데 무슨 학원이야…. 안 가.”


아름은 현관문을 나서며 “잘하는 짓이다.”하고 핀잔을 주었다. 다혜는 소파에 벌러덩 누운 채로 아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현관 바깥으로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름은 금세 햇빛 사이로 사라졌다.






시위가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2달이 지난 뒤였다.


‘스마트 기계 사용 금지 반대 시위’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큰 전국 규모의 시위가 되었다. 스마트 기계 사용 금지에 분노한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모임 수준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도시를 가득 채울 정도로 행렬이 늘어섰다. 붉은 계열의 모자와 얼굴 절반을 가리는 마스크, 분노를 눌러 담은 표어가 쓰인 피켓으로 무장한 그들은 밤낮 가릴 것 없이 거리를 행진했다.


다혜는 당혹스러웠다. 역사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시위’라는 것을 처음 목격했다. ‘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갖고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모여서 항의한다’는 개념을 다혜가 이해하기란 불가능했다. 다혜는 시위를 현재에는 사라진 고대 의식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그 시위가 실제로 일어났고, 그것 때문에 학교에 가지도 못하고, 나라가 요통을 앓는다는 현실을 믿기 어려웠다. 물론 다혜도 ’스마트 기계 사용 금지‘가 불만이긴 했다. 이것 때문에 겨드랑이에서 끈적끈적한 열감이 이는데도 에어컨을 쐬지 못하고, 스마트폰으로 최애 애교 클립 영상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다혜는 도저히 거리에 뛰쳐나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때려부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울고 불며 고통스럽게 절규하는 그들의 외침이 와닿지 않았다.


여름 열기가 꺾이고 입동을 준비할 시기였다. 다혜는 아름의 집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오늘도 다혜는 아름을 만나지 못했다. 최근 아름이 보이지 않았다. 원래였다면 아름에게 무슨 일 있느냐고 메시지를 보냈겠지만, 국가 차원에서 금지되었다. 나라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친구가 연락이 닿지 않자 다혜는 불안했다. 다혜는 선생님을 찾아가 아름의 집주소를 알아내어 틈만 나면 찾아갔다. 그러나 아름의 집은 항상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드려도 쿵쿵거리는 소리만 공허하게 고막을 채울 뿐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다혜는 광장 옆을 지나쳤다. 그곳은 공원에 흔히 있는 광장으로, 시위자들이 매일 모이는 장소였다. 광장에서 사람들의 흥분한 고함 소리와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란스러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다혜는 어쩐지 그 소음에 위축되어 코트를 여미고 잰잰걸음으로 빠르게 지나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사람들 중앙에 놓인 단상으로 한 소녀가 올라갔다. 소녀는 위태롭지만 강인한 걸음걸이로 올라와 마이크를 집었다. 아아, 하며 마이크 상태를 확인했다. 다혜의 걸음이 멈췄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익숙하다 못해 친숙하고 소중한 목소리였다. 다혜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다혜의 시선은 마이크를 든 소녀에게 멈췄다. 동그란 안경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소녀. 소녀는 천천히 마스크를 벗었다.


“아름아…?”


믿을 수 없었다. 아름이 그곳에 있었다. 다혜가 몇 달 동안 만나지도 못했던 가장 소중한 친구가 결단을 내린 표정을 짓고 시위자들 사이에서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아름아! 네가 왜 거기 있어?”


다혜는 아름을 향해 달려갔다.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 분노와 절규로 얼룩진 소음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나 단상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사람들은 마이크를 쥔 새로운 연설자에게 집중하느라 애처롭게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다혜에게 길을 비켜주지 않았다. 아름도 다혜를 보지 못한 듯했다. 다혜는 마이크를 든 아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평소 조용하게 책만 일으며 지내는 애가, 사람들 앞에 나서길 극도로 싫어하는 네가, 대체 왜 거깄니.


“여러분… 제게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아름이 가냘프지만 비장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저보다 세 살 어린 남동생이었습니다. 툭하면 장난치고 누나 골탕 먹이길 좋아하는 어리광쟁이였습니다. 동생은 병이 있었습니다. 꽤 심각한 병이었습니다. 동생이 TV를 보며 춤을 추다가 처음으로 증상이 발발해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에는, 정말 동생이 다시는 못 깨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다행히 치료는 쉬웠습니다. 몇십 년 전이었다면 평생 병원 안에서 언제 건강이 악화될지 걱정하고, 내일은 오늘보다 덜 고통스럽기를 바라기만 했어야 하는 병이었지만, 이 병을 위해 고안된 의료용 스마트 기계가 개발된 이후로 큰 지장 없이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기계 덕분에 동생은 예전처럼 활기차게 지냈습니다. 쓰러진 건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던 것처럼, 마치 애초에 쓰러진 적이 없던 것처럼 아이다운 생명력을 과시하며 지냈습니다. 제 가족은 주기적으로 기계를 가동하고, 기계가 처방해준대로 조치하면서 살았습니다. 약간 귀찮은 숙제가 생겼을 뿐, 생활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죠. 하지만….”


아름은 잠시 말을 멈추고 관중을 바라보았다. 아름의 시선이 다혜 쪽에서 멈췄다. 순간 아름과 다혜의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다혜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친구를 올려다보았다. 다혜의 시선 끝에 닿은 소녀는 자신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기계가 작동을 멈췄습니다. 저희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워낙 예민한 기계라 종종 꺼진 적이 있었거든요. 저희는 매뉴얼에 따라 기계를 고쳤습니다. 그런데 기계는 켜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이러지? 제조사에 연락했습니다. 직원이 하라는 대로 다 했습니다. 하지만 켜지지 않았습니다. ‘왜 이러지?’ 직원이 당황했습니다. 그제야 저희 가족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아름의 목소리가 절규하듯 커졌다. 광장의 분위기가 아름에게 압도되어 그 어느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동생에게 발작이 찾아왔습니다. 일전에 보았던 그 발작이었습니다. 저희는 다급하게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입에 거품을 물며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트는 동생의 손을 붙잡고 울었습니다. 병원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오래 걸렸고, 동생의 생명은 너무나 빠르게 사그라들었습니다. 차 안과 밖이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동생의 손이 굳기 시작해 제 손을 하염없이 쥐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몸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이 빠져나갔음을 느꼈습니다.”


아름의 뺨을 타고 한 줄기 강이 흘렀다. 여기저기서 탄식과 애처로움이 섞인 소리가 새어나왔다.


“...제 동생이 땅 속에 묻히는 것을 보고 며칠이 지난 뒤에야 저는 왜 동생이 죽어야만 했는지 알았습니다. 바로... 동생의 병을 관리하던 휴대용 기계가 ‘스마트 기계’로 분류되어 국가가 작동을 금지시킨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 돼.” 하고 중얼거리며 다혜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믿기 힘들었다. 설마 국가가 사람 생명과 관련된 스마트 기계까지 사용을 금지시켰을까. 그렇게 비상식적이고 파렴치한 짓을 벌였을까. 그러나 다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소중한 친구의 절규에 사무치게 공감하듯, 주변에서 영정 사진을 품에 안고 소중한 이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오열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아름이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스마트 기계 사용 금지 정책’만 아니었다면 제 동생은 살 수 있었습니다. 제 동생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소중한 가족, 연인, 친구도 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우매하고 독단적인 국가 때문에 저희는 사랑하는 이를 잃었습니다. 더는 저희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여러분! 저희는 일어서야 합니다. 저희는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함께 맞서 싸웁시다!”


아름은 오른팔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손이 미끄러져 스마트폰의 음량을 최대치로 키운 것처럼 한순간에 함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흥분한 관중들이 “싸우자! 싸우자!”하고 외치며 팔을 힘차게 흔들었다. 아름은 감정이 벅차오른 듯 연설을 마쳤음에도 단상에서 내려가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호응에 감격하고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눈물이 범람하는 아름의 눈이 다혜와 마주쳤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주시했다.


다혜는 더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 1초라도 더 있다간, 자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돌이킬 수 없는 존재로 변할 것 같았다. 아니야, 저렇게 슬픔과 배신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아름이일 리 없어. 중얼거리며 다혜는 뒤돌았다. 광적으로 기뻐하며 환호하는 사람들과, 손가락으로 어딘가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치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달렸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름이 동생을 잃은 것처럼, 다혜는 갈 곳을 잃었다. 다혜는 눈을 질끈 감고 무작정 달려 광장을 벗어났다.


그때였다.


방금 빠져나온 광장에서 불길한 파열음과 비명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국민의행복당’ 소속 의원, 백희나입니다.”


라디오에서 젊은 의원의 말이 흘러나온다. 냉담하고 사무적인 목소리다.


“올해 초, 정부는 ‘스마트 기계 사용 금지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했습니다. 대뇌피질 상실증 환자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중대한 사안에 정책을 시급하게 시행하여 예상치 못한 희생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희생으로 인해 희생자의 유가족분들께서 거리에 나와 대규모 시위를 하셨습니다. 정부는 이를 몹시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하였고, 유가족분들께 사과드렸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안타깝게 희생된 분들과 상심이 크셨을 유가족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이크를 향해 허리를 숙이는 듯 옷감이 비비적대는 소리가 들린다.


“국민 여러분, 정부는 모든 과오를 인정합니다. 정부의 실책으로 인해 피해 입은 모든 분들께 적절한 배상과 사죄를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그와 더불어 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진통을 극복하고 대뇌피질 상실증으로 인해 고통받는 국민이 없을 때까지 노력하겠습니다. 저희를 믿고 의지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국민의행복당’ 백희나였습―”


라디오가 허공을 날아 벽에 부딪혀 박살 난다. 기계는 참담한 신음과 함께 작동을 멈춘다.




<신(新) 러다이트 운동의 전개 과정과 영향에 대하여>, 2025.06


<스마트폰을 하는 소녀>, painted by ImageF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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