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전역한 뒤 대학교에 복학하고 한 학기가 지나던 때였다. 복학을 하니 매일 술자리가 잡혔다. 군대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도 잠시, 다시 대학교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함께 웃고, 넉살 좋은 척 대화를 나누고, 잔을 부딪히고 술을 들이켰다. 이런 하루하루가 반복되니 나는 금방 지쳐갔다.
그날은 6월의 주말이었다. 햇빛이 매섭게 내려쬐기 시작하는 초여름이었다. 나는 본가에 내려와 있었다. 그날은 아무 목적 없이 집 근처 시내를 걷고 있었다. 분명 외출한 목적은 있었을 것이다. 영화를 봤다든지, 노래방에 갔다든지. 나는 아무 이유 없이 외출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그날 내가 왜 그곳을 걷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저기요, 혹시... 너 연주 맞지?”
길을 걸어가던 도중 뒤에서 어떤 여자가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봤다. 백육십도 안 되어 보이는 작은 키에 새하얀 블라우스와 연분홍색 플리츠 스커트를 입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왼쪽 어깨에는 고양이가 그려진 하얀색 에코백을 메고 있었다. 여자는 똘망똘망한 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누구세요?”
“나 지현이. 최지현. 기억 안 나? 중3 때 같은 반이었는데.”
여자가 반가운 듯이 말했다. 자신이 찾던 사람이 맞다는 확신을 가진 말투였다. 나는 필사적으로 중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아… 최지현?”
최지현. 중학생 때 교실에 한 명씩 꼭 있는 키 작은 여자애였다. 작은 키에 예쁘장한 미모 덕에 꽤나 귀여운 아이였다. 기억을 떠올리자 6년 전 모습과 지금 눈 앞의 여자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오, 나 기억하는구나?”
“응… 오랜만이다.”
분명 내 기억에 지현이와 나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몇 번 대화를 나누고, 지나가다 만나면 인사하는, 같은 반 친구에 불과한 관계였다. 졸업 이후에는 한 번도 연락한 적 없었다.
지현이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나를 지나쳐서 걸었다. 발랄하고 들떠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별 대꾸도 하지 못하고 지현이 뒤를 따랐다.
카페로 이동하면서 대체 나를 왜 찾아왔을까 생각해보았다. 중학생 동창인 여자애가 몇 년 후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돈이 필요한가? 빌려줄 돈은 없는데. 아니 애초에 돈이 필요하면 친한 사람에게 빌려야지 왜 나를 찾아와? 그럼 혹시…?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념을 억지로 떨쳐 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여자가 말을 걸기만 하면 온갖 음흉한 상상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남자의 본능이다. 나는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금방 마음이 어질러졌다.
2.
“나는 프라푸치노. 너는?”
“아, 난 밀크티.”
나는 남색 앞치마를 두른 카운터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어째선지 여자와 단둘이 카페에 왔으니 내가 계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야. 내가 사주려고 했는데. 왜 네가 사?”
“그냥 오랜만에 만난 거고, 네가 일부러 찾아온 거니까.” 나는 별일 아니라는 양 무심하게 말했다.
카페는 한적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 무리 몇밖에 없었다. 전형적인 동네 카페였다. 이렇게 작은 카페에서 프라푸치노라는 고급 메뉴까지 판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주문을 하고 자그만한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여학생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흠흠, 그래서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
지현이가 헛기침을 하며 침묵을 깼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어쩐지 긴장한 표정이었다.
“뭐, 대학교 가고, 군대 가고, 전역했지. 복학한 지 얼마 안 됐어.“
“다행이다. 여기 오는데 너 군대 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지현이가 과장된 몸짓으로 머리를 긁으며 헤헤 웃었다.
“왜 연락도 안 하고 왔어? 진짜로 나 군대 갔으면 어쩔려고.”
“여기 도착하고 전화할 생각이었어. 옛날에 네가 어디 사는지 알려줬잖아.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찾아왔어. 근데 버스에서 내리는데 딱 네가 보이더라. 그래서 바로 뛰어가서 말 걸었지. 딴 사람이었으면 엄청 쪽팔렸을 텐데.”
지현이는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부끄러워서 나와 눈을 마주치기를 피하는 모습이였다.
지현이의 말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6년 동안 만나지 않은 나를 뒷모습만 보고 알아본 걸까. 중학생 때 이야기한 내 집주소를 어떻게 기억하는 걸까. 자꾸만 주제넘은 상상이 떠올라 체온이 올라갔다.
잠시 말이 없던 지현이가 고개를 들더니 의미심장한 말투로 물었다.
“너 여자친구 있어?”
“여자친구?”
나는 깜짝 놀라서 멍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현이는 아랑곳 않고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너 SNS를 전혀 안 하니까, 여친이 있는지 없는지 알 방법이 없어서. 그래서….”
갑자기 지이잉 하는 진동이 울렸다.
“아, 이거 울린다. 가져올게.”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진동벨이 붉은 빛을 반짝이며 울었다. 나는 황급히 진동벨을 들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긴급상황이었다. 내 두뇌는 지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을 해석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중학생 때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가 6년 만에 날 찾아왔다. 그런데 그 여자애가 내게 여친이 있냐고 묻는다. 아무리 연애 쪽으로 둔감한 나여도 알 수 있었다. 지현이는 나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트레이를 들었다. 초코칩이 뿌려진 휘핑크림 산과 얼음이 둥둥 띄어진 밀크티가 놓여 있었다. 트레이를 들자 밀크티의 수면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에 반해 휘핑크림은 아무 떨림 없이 안정적이었다.
여자가 다가오면 거부감이 든다. 나는 이 거부감을 다루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 거부감 때문에 지금까지 여자 한번 사귄 적이 없었다. 내게 관심을 보이던 여자들도 몇 명 있었지만 나는 모두에게 거리를 두었다. 이런 종류의 모든 만남을 밀어내기만 했다. 그 결과 더이상 내게 다가오려는 여자는 없었고, 내게 있어 연애란 멀고도 먼 이야기였다.
자리로 돌아가며 어떤 말을 할지 생각했다. 이번에도 역시 거절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곳까지 찾아왔어도, 단호하게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대화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3.
“나 곧 죽어.”
“…뭐라고?”
“대장암에 걸렸어. 말기래. 몇 달 못 살아.”
지현이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하마터면 무심코 넘어갈 뻔했다. 지현이의 말을 이해하고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세상의 어두운 면은 전혀 겪지 않은 듯한 순수한 미소를 띠우면서,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고 환하게 얘기하는 이 여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게 옳을까. 혼란스러웠다.
“왜…? 어쩌다 암에 걸렸어?”
말을 하고 나서야 멍청한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암환자에게 왜 암에 걸렸냐고 묻다니. 지현이가 시선을 창문 밖으로 옮겼다.
“그러게? 모르겠어. 술을 좋아하긴 해도 그렇게 많이 안 마셨는데. 햄버거를 자주 먹어서 그런가? 하하.”
지현이는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어딘가 억지로 웃는 듯한 슬픔이 서려 있었다.
“치료는? 치료해도 못 살아?”
“너무 늦었대. 항암치료를 받아도 살 확률이 엄청 낮을 거래. 뭐, 그래도 치료는 받을 생각이야.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 건 억울하니까.”
지현이는 빨대로 휘핑크림을 뒤적였다.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빨대를 따라 휘핑크림이 초코시럽과 섞이며 무너져내렸다.
“그러면 나는 왜 찾아왔어? 빨리 치료받아야지.”
나는 점점 지현이의 얘기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갑작스럽게 나를 찾아와 암에 걸렸다느니 죽는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대체 왜? 나도 모르게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항암치료 받으면 머리도 빠지고 몸도 엄청 약해지잖아. 그래서 치료받기 전에 내 인생에서 소중하고 의미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중이야.” 지현이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나와 눈을 맞추더니 활짝 미소지었다. “그리고… 네가 마지막이야.”
“…내가 너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라고?”
“응.”
순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당혹스러워하는 나를 두고, 지현이는 배시시 웃었다.
“나, 너 좋아했거든. 네가 내 첫사랑이야.”
사람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실을 접하면 뇌가 정지한다. 신경계를 이루는 모든 신경세포의 시냅스가 완전히 뒤섞이고, 전기신호가 역행하고, 곧이어 정전된다. 나는 몇초간 입을 헤벌레 벌리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자, 다시 한번 상황을 정리해보자. 6년 전 중학교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가 찾아왔다. 그런데 죽을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첫사랑이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고 어떤 말을 건네야 하지?
벙찐 나를 두고 지현이는 아무 말 없이 휘핑크림을 맛있게 퍼먹고 있었다. 왼손으로 옆머리를 귀 뒤로 고정하고, 찰랑거리는 귀걸이를 늘어뜨렸다.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로, 내 반응을 즐기고 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날 사로잡은 거부감은 어느새 당혹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미안해.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말이나 해서. …푸훗!”
지현이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내 표정이 꽤나 볼만했나 보다.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본 것도 그거 때문이야. 첫사랑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여친이 있으면 그림이 이상해지니까.”
지현이는 왼손으로 배를 쥐고, 오른손 검지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마치 스탠딩 코미디를 직관하는 관객처럼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별안간 울컥했다. 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는 거야?”
“…응?”
“대체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지현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말했잖아. 인생에서 소중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고….”
“아냐, 그걸 묻는 게 아니야. 너는 왜 나를….”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꽉 다물었다. 더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분명 화가 났다. 연락도 없이 나를 찾아와 곤란한 고백을 하는,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여자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의문이 나를 가로막았다. 내가 이 여자에게 따질 권리가 있는가? 따진다면 과연 무엇을 따져야 하는가? 죽음을 목전에 앞둔 사람이, 자신의 첫사랑을 만나러 왔는데, 대체 왜 찾아왔냐고,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나를 한 끗도 배려해주지 않고 제멋대로 찾아와서는, 그렇게 슬픈 미소를 보여주냐고, 그렇게 슬픈 눈동자로 날 바라보냐고, 어떻게 면박할 수 있을까. 그럴 자격이 나 따위에게 있기나 한 걸까.
우리는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프라푸치노가 거의 바닥을 보였다. 컵 벽면에 크림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에 반해 내 앞에 놓인 밀크티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듯 처음 상태 그대로였다. 얼음이 녹아서 오히려 수면이 높아진 것 같다.
“미안해. 네 기분은 전혀 생각하지 못해서. 너무 내 멋대로였지? 만나서 반가웠어.”
지현이가 에코백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마.”
나는 떠나려는 지현이의 손목을 잡았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른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팔이 불쑥 튀어나갔다.
“…나 때문에 기분 나빴던 거 아니었어?” 지현이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당황함이 묻어나왔다.
기분이 나빴나? 모르겠다. 그때 내 심정은 나쁘다 좋다 정도로 정의내릴 수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속에서 꿈틀대며 울렁거리는 이것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지 지금 이 여자를, 지현이를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가지 마. 멋대로 굴 거면 끝까지 해. 커피 한 잔 마시고 헤어지려고 찾아온 건 아닐 거 아니야.”
나는 절박하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자 지현이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피어올랐다. 지현이가 테이블을 짚고 상체를 기울여 내게 바짝 다가왔다.
“진짜? 그럼 나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돼?”
“응. 다 해. 다 해줄게.”
“그럼 우리 같이 밥 먹자.”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내가 사줄게.”
“영화도 보자. 너랑 같이 보고 싶은 거 있어.”
“응, 나 영화 보는 거 완전 좋아해.”
“손 잡고 싶어.”
“잡아도 돼. 마음껏 잡아도 돼.”
“너랑 포옹도 하고 싶어. 키스도 하고 싶어.”
“다 해줄게. 정말이야. 그러니까 제발….”
“와, 진짜?!”
끝에 다다러서는 나는 거의 우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지현이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했다. 지현이가 양손으로 내 손을 꼭 쥐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진짜로….”
지현이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아아,
그 웃음.
그 미소.
그것 때문이었다.
4.
“너 정말 괜찮아?”
지현이가 침대에 걸터앉아 말했다. 내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지현이 앞에 꿇어앉은 채 지현이를 올려다봤다.
“응. 괜찮아.”
“연애해본 적 없다며. 너 지금 나한테 처음을 주겠다는 거야. 계속 말했지만, 난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이고 그러니…”
“그런 소리 하지 마!”
내가 소리쳤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제발….”
결국 하루 동안 참던 눈물이 쏟아졌다. 지현이가 내 목을 끌어와 품에 안았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지현이의 아랫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죽는 사람은 난데 왜 네가 울어.”
지현이가 내 등을 토닥거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양팔로 지현이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지현아… 난 모르겠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건지.”
“무슨 감정을 느끼는데?” 지현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몰라… 모른다고….” 내가 칭얼거리듯 대답했다. “지현아, 나는 한 번도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어.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을 모르겠어. 내가 널 좋아하는 걸까? 6년 만에 다시 만난 너를 하루 만에 좋아하게 된 걸까?”
나는 더더욱 지현이를 끌어안았다. 지현이의 품은 슬프도록 따뜻했다.
지현이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주야, 내가 옛날에 어느 소설을 읽었어.”
“무슨 소설?”
“음… 제목이 기억이 잘 안 나네. 아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나?”
“그게 무슨 이상한 책이야….”
“맞아. 그 책 엄청 이상해. 사랑 소설인데, 남주인공이 바람둥이야. 바람둥이가 진정한 사랑을 한다니! 근데 그 이유가 뭔지 알아?”
지현이가 어느 순간부터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고 있었다.
“바로 '연민' 때문이야. 한 여자에게 너무나도 큰 연민을 느껴서, 그래서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여자를 선택해. 웃기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가족이 아닌 이상 서로 알고 지낸 시간보다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지낸 시간이 훨씬 많을 텐데, 사랑에 빠진다거나, 첫눈에 반한다거나,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동안 나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내 짧은 경험으로는 그것은 불가해한 영역의 개념이었다. 옛날 사람들이 지구는 평평하다 믿었던 것처럼, 나 또한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내가 기억에 잘 남지도 않은, 난데없이 나타난 지현이를 하루 종일 따라다니고, 지금 호텔방에서 지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유를 나조차도 알지 못했다. 나를 조종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감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민’
지현이 입에서 나온 그 단어를 듣고 하루 종일 나를 옥죄던 감정의 정체를 알아냈다. 나는 지현이가 내게 죽는다는 사실을 고백한 순간부터 지현이를 연민하고 있었다. 그 연민이 나로 하여금 지현이에게 순종하도록 기능하게 했다.
“연주야.”
지현이가 애틋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진정한 사랑은 연민이라는 감정이래.”
나는 고개를 들어 지현이를 바라보았다.
“그럼 난 너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지현이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글쎄…. 그건 너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지현이는 내 어깨를 잡고 나를 떼어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눈물이 시야를 적시는 와중에도 지현이는 잔인하게도 예뻤다.
“너는 지금 뭘 하고 싶어?”
지현이가 말했다.
“나는… 난….”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현이의 입술이 내 입술을 뒤덮었다. 내 목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나는 지현이의 등을 감쌌다. 서로의 혀가 뒤엉켰다. 지현이가 내 바지를 벗겼다. 나는 지현이의 단추를 풀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갈 때마다 지현이의 속살이 드러났다. 마지막 단추까지 풀어 헤치자 아담한 가슴을 가린 브래지어와 보드라운 배와 야릇한 배꼽이 나타났다. 나는 점점 흥분해갔다. 그와 동시에 이 새하얀 피부 아래에 까맣게 득실거릴 암세포가 그려졌다. 그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나 자신이 비참했다. 비참함을 참을 수 없어 지현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랑해, 연주야.”
우리는 섹스했다. 나는 내 아래에 누운 가녀린 몸이 한순간 부서질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다. 지현이는 내 맘을 알기라도 하는지, 내가 불안을 느낄 때마다 내 눈물을 닦아주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 미소에 못 이겨 지현이한테 사랑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5.
“어서 와. 오랜만이네.”
여름이 수그러들고 낙엽이 지기 시작하는 날이었다. 지현이는 침대 위에 이불을 덮고 앉아 있었다. 환한 미소는 그대로였으나 환자복을 입으니 지현이가 환자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이런 모습 보여주긴 싫었는데. 이거 잘 어울려?”
지현이가 어색한 듯 노란색 비니를 만지작거렸다. 언뜻 보면 숏컷을 한 여자가 머리카락을 모두 비니 안에 숨긴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렵게 입을 떼었다.
“항암치료는 언제부터 받아?”
“이것저것 검사하고, 아마 3일 후부터 본격적으로 받을 거야.”
“수술은?”
“잘 모르겠어. 몸 상태 보고 결정한대.”
지현이는 덤덤한 말투였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지현이는 나를 바라볼 때마다 미소를 지어주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마다하지 않을 수 없는 눈빛으로 내 영혼까지 지그시 주시했다. 그 눈빛은 나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밑바닥에 숨어 있던 연민을 자극했다.
나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지현이의 손을 잡았다. 휘핑크림처럼 새하얗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이 작은 손이 야위고 생기를 잃을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눈물이 흘렀다.
“입원한 건 난데 왜 네가 울어.”
지현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손길에 응답하듯 내가 간절하게 말했다.
“지현아, 사랑해.”
“응, 나도 사랑해.”
“그러니까 제발 죽지 마.”
“연주야, 예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살 확률은…”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줘. 난 네가 떠나는 게 싫어.”
나는 지현이의 말을 막았다. 흐르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현이가 나를 어린 자식을 품는 어머니처럼 끌어안았다. 나는 지현이의 허리를 안았다. 지현이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연주야. 너는 사랑을 처음 해보지?”
“응. 맞아. 네가 처음이야.”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꼭 알아야 하는 게 있어.”
“뭘 알아야 하는데?”
지현이는 잠시 숨을 참았다가, 작게 내쉬었다.
“모든 관계에는 이별이 존재해. 아무리 사랑해 죽지 못하는 관계여도, 어느 형태로든지 이별은 찾아오기 마련이야.”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지현이는 멈추지 않았다.
“연주야, 나는 아마도 죽을 거야. 그렇게 우리는 이별할 거야. 이 사실을 외면하면 안 돼.”
“그만, 제발 그만….”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대비 없이 이별을 맞이하지. 그래서 이별이 맘 아프고 슬픈 거야.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아서.”
“….”
“그런 점에서 우리는 행운이야. 우리는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많으니까. 다가올 이별에 충분히 슬퍼할 시간이 있으니까.”
지현이는 계속해서 오붓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운명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지난 삼 개월 동안, 지현이는 차곡차곡 이별을 준비해왔다. 죽기 전 소원이라며 나와 함께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고, 다양한 음식을 먹고, 수많은 영화를 보고, 수도없이 섹스하면서, 커져가는 병마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그에 반해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다. 지현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해왔다. 지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고, 바라는 것을 모두 해왔다. 내가 지현이를 사랑하는가 따위의 질문은 어느 순간부터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뒤얽힌 감정을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지현이를 사랑했다. 다른 연인들이 그러하듯, 이별 따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돌연 지현이가 항암치료를 받겠다고 선언했을 때, 나는 무너져내렸다. 억지로 기피해왔던 이별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가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병원에 가지 말고 나와 함께 있어달라고. 그리하면 아무 문제 없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결심을 굳힌 지현이는 스스로 머리를 밀고 병원에 갔다. 나와 이별하기 위해.
“난 헤어지기 싫어….”
내 목소리가 수만 갈래로 갈라졌다. 몸을 둥글게 말아 지현이의 품속에 틀어박히고 싶었다. 지현이의 체온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지현이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가 꼭 헤어질 거란 뜻은 아니야. 우리가 헤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 사실에 슬퍼하고, 이별이 찾아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자는 거야.”
지현이는 내 울음이 멎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우리는 병실 침대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넌 이기적이야.”
“응, 맞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
“비겁해.”
“그것도 맞아.”
“무책임해.”
“하하, 쌓인 게 많나 보네.”
“어느 날 갑자기 무작정 찾아와서는 나한테 이런 감정을 알려주고, 내 처음을 다 가져가고. 그러면 책임져야지. 날 책임져줘야지. 그런데 자기는 곧 죽을 거라고, 나보고 이별을 준비하라고 하잖아. 너무하잖아? 난 그럴 수 없는데…. 너무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이야.”
나는 최대한의 원망을 최선을 다해 쏟아냈다. 지현이는 조용히 내 불평을 들어주다가 작은 숨을 삼켰다.
“연주야, 나 너 처음 만났을 때, 사실 거짓말한 거 있어.”
“거짓말?”
나는 지현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지현이의 속눈썹이 가냘프게 떨렸다.
“나 원래 치료 안 받을 생각이었어. 그냥 맘껏 놀다가 죽을 생각이었어. 부모님도 내 맘대로 하라고 했고.”
실제로 지현이는 삼 개월 동안 아무 치료도 받지 않았다. 나는 지현이의 시한부를 외면하느라 지현이가 왜 치료를 받지 않는지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럼… 왜 이제와서 치료를 받기로 한 거야?”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현이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내 가슴팍에 몸을 숨기며 나를 꽉 안았다.
“나도 널 사랑하게 됐으니까. 네가 날 사랑하게 된 것처럼.”
나는 지현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내 허벅지 위로 지현이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정말로, 너랑 하루만 같이 보내고 그냥 죽을 생각이었어.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내 맘대로 안 되더라. 너랑 사귀고나서,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다가… 너랑 오랫 동안 같이 있고 싶어졌어. 그런 어설픈 욕심이 생겼어. 너랑 함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서, 너를 사랑하고 싶어졌어.”
“지현아….”
또다시 연민이 나를 움켜쥐었다. 그 손길에 나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지현이를 위해, 사랑을 위해, 연민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쳐야만 했다. 도망칠 길은 없었다.
“연주야. 나 꼭 살게. 치료 열심히 받고, 살아서 돌아올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지현이의 눈물이 보석처럼 떨어졌다. 나는 지현이한테 키스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포옹하고 키스를 나누었다. 서로의 침과 눈물과 입술이 뒤섞였다.
“사랑해, 지현아.”
“나도 사랑해.”
“우리 꼭 살자. 우리 살아서 만나자.”
“그래, 그러자. 살아서 만나자. 살아서 사랑하자. 꼭 그러자.”
부드럽게 아스러진 연민이 우리에게 온전히 배어들 때까지 우리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프라푸치노 위에 놓인 위태로운 휘핑크림 같았다.
6.
정장을 대여한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처음 신는 구두는 한 걸음 떼는 것조차 어색했다.
지현이는 끝까지 나의 처음을 훔쳐갔다.
액자 속 지현이는 언제나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주변을 장식한 꽃들과 어우러져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에 하염없이 슬픔이 몰려왔다. 슬픔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슬픔이 머리를 짓뭉갰다.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어 바닥에 엎드린 채 연민을 흘려보냈다.
지현이와 보낸 시간은 사랑을 하기에는 턱없이 짧았지만 병이 옮기에는 충분했다. 지현이한테 사랑을 받으면서 지현이의 암세포도 같이 받았다. 그 암세포는 내 사랑을 파고들어 큼지막한 종양을 키웠다.
결국 나는 너로 인해 사랑암에 걸리었다.
증상은 프라푸치노를 보기만 해도 너를 떠올리고, 앞으로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