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그리고 생일 축하해
푸른 하늘 아래로 구름이 흘러가고, 따사로운 햇빛이 운동장 위 아이들을 내리쬐고, 친구들과 책상에 둘러앉아 한가로이 수다를 떠는, 언제나처럼 평화로운 3월의 하루였다.
하지만 지금 평화가 깨졌다. 반 친구들이 웅성거리며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내 앞에는 그 녀석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그 녀석에게 말했다. 그 녀석은 눈썹을 살짝 꿈틀대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싫다고. 안 알려줄 거야.”
“아니, 잠깐만.” 나는 그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말을 더듬을 뻔했다. “그니깐… 생일을 알려주기 싫다고?”
“응.”
그 한 음절을 끝으로 더 할 말 없다는 듯이 그 녀석은 입을 닫았다. 그 녀석은 두 팔을 직각으로 책상에 받치고 책을 펼쳐 잡은 자세에서 꿈쩍하지 않았다. 그 태도가 왠지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져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왜? 왜 생일을 안 알려줘?”
“생일을 공개하기 싫어.”
“게시판에 우리 반 친구들 생일판 만들기로 한 건 알지?”
“난 그거 반대했었어.”
“어쨌든 학급회의에서 통과했잖아. 그럼 너도 해야지. 넌 우리 반 아니야?”
“내 생일 공개하기 싫다니깐? 나만 빼고 만들면 되잖아.”
눈을 질끈 감았다.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벽과 대화하는 듯했다. 한숨을 크게 내쉰 뒤, 그 녀석의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네 생일이 비밀로 할 정도로 중요한 날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 무슨 신비주의 컨셉이야? 왜 생일을 안 알려주겠다는 거야?”
“이유는 없어. 어쨌든 나는 싫어. 나 책 읽어야 하니깐 좀 가줄래?”
그 말을 끝으로 그 녀석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하고 몇 번 더 불러봐도 무시한다. 손에서 책을 뺏어 얼굴에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뭐라 더 말하려던 차에 종이 울렸다. 그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툭 치고 지나쳐 사물함에 갔다. 나는 기가 차서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학급게시판 꾸미기는 내가 반장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추진한 프로젝트였다. 친구들의 생일을 게시판에 월별로 써놓고 장식한 뒤, 한 달에 한 번 생일파티를 열어 롤링페이퍼를 쓰는, 내가 며칠을 고심한 끝에 준비한 이벤트였다. 지난번 학급회의에서 제안했을 때 반 친구들이 모두 좋아하며 찬성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게시판을 꾸미기도 전에 생일을 조사하는 단계부터 복병을 만날 줄은 몰랐다. 기억에 잘 남지도 않는 남자애 하나가 지 생일을 안 알려준다고 하다니. 아, 가만히 생각하니 회의 때 반대에 손 든 유일한 놈이었다.
존재감도 없는 애 하나가 내가 고심해서 세운 계획을 망치다니. 잔잔한 연못에 잠겨 있던 폭탄이 갑자기 터진 기분이다. 이대로 가면 결국 생일파티는 흐지부지될 것이고, 내 반장의 명예에 커다란 흠집이 갈 것이다. 저 녀석 하나 때문에.
절대 그럴 수는 없지.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무실로 달려갔다. 교무실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담임 선생님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문을 열어젖히고 큰 소리로 선생님을 불렀다.
“샘!”
선생님이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나를 보았다.
“어, 미지야. 무슨 일이야?”
나는 선생님에게 달려가 의자 팔걸이에 달라붙은 채 말했다.
“샘, 저희 반 게시판에 생일판 만들기로 했잖아요. 근데 안형재가 생일을 안 알려줘요.”
“형재가 생일을 안 알려준다고?” 선생님이 눈을 껌뻑였다. “생일을 왜 안 알려주지?”
“모르겠어요. 그냥 알려주기 싫대요.”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샘, 걔 생일 언제에요?”
담임 선생님이 ‘흐음’ 소리를 내며 눈썹을 들썩이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선생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당연히 선생님이 그 녀석 생일을 알려줄 거라 믿었다. 믿었는데…
“미안하지만 형재가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하면 선생님도 알려줄 수 없어.”
“왜요! 샘은 걔 생일 알잖아요!”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다. 선생님이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생일은 개인정보여서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함부로 알려줄 수 없어.” 선생님이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타이르듯 말했다. “샘이 이따가 형재랑 얘기해서 알려달라고 해볼게.”
“아니 그래도….” 나는 팔걸이에서 손을 놓고 똑바로 섰다. “겨우 생일인데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알려주기 싫어해요.”
울먹이는 표정으로 궁시렁대봤지만 소용없었다. 선생님은 미안하다, 자기가 얘기해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결국 나는 아무 소득 없이 교무실을 나왔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기 생일을 남한테 알려주기 싫다는 이유는 대체 뭘까? 내 상식으로는 생일을 숨길만한 이유 따위 없다.
운이 나빴다. 중학교에 올라오자마자 이상한 놈을 만났다. 왜 하필 처음으로 반장이 된 지금 우리 반에 저런 놈이 있는 걸까.
선생님이 이야기한다고 했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방과후에 게시판을 만들기로 한 친구들한테 사과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게시판을 못 만들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왜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반장 체면이 코 푼 휴지처럼 구겨져 교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자리에 앉아 다음 수업을 준비하려는데 그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 녀석은 여전히 구석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 최고의 증오를 눈빛에 담아 그 녀석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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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나는 조회가 끝나자마자 교무실로 가는 선생님 뒤를 따라갔다.
“샘, 걔 생일은 어떻게 됐어요? 어제 방과후에 걔랑 얘기했죠?”
“아, 그거.” 선생님이 나를 내려다보더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형재는 빼고 생일판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
“네에?” 나는 양팔을 벌리고 선생님의 앞을 막아섰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어제 알려준다고 했잖아요!”
선생님이 당황하며 뒷걸음쳤다. 허둥대며 안경을 고쳐쓰고 변명하듯 말했다.
“그… 형재가 사정이 있어서 생일을 알려줄 수 없대. 미안하지만 반장인 미지가 이해해주면 안 될까?”
선생님이 활짝 웃었다. 입꼬리가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실망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쳐다봤다. 하지만 선생님은 ‘헤헤’ 하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양주먹을 허리를 얹은 채 고개를 왼쪽으로 15도 기울이고 물끄러미 생일판을 쳐다봤다. 초콜릿색 나무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나오고, 커다란 꽃이 12개 피었다. 꽃마다 친구들의 이름이 큼직하게 적혀 있다. 이것은 단순한 학급 게시판이 아니다. 나의 철두철미한 계획과 지시로 만들어진, 우리 반 친구들의 염원을 담은 예술 작품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가슴 속에서 심장을 쿡쿡 찔렀다. 우리 반은 총 23명인데, 저 생일판에 이름은 22개뿐이다. 안형재. 그 녀석이 끝끝내 생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 녀석을 빼고 생일판을 제작했다.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1명이 없다는 사실쯤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빈자리가 아주 또렷하게, 흰 도화지에 물감을 쏟은 것처럼 강렬하게 보였다.
“예쁘게 잘 만들었잖아. 한 명 빠졌다고 티도 안 나고. 괜찮아.”
함께 게시판을 만든 문화부 소정이가 말했다. 바보 같이 착한 소정이는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위로가 전혀 안 됐다. 내가 기획하고 내가 주도한 프로젝트에 오점이 남았다. 그 사실이 내 신경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 녀석을 쌀쌀맞게 대했다. 물론 반장으로서 모든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건 안다. 하지만 불순분자는 예외다. 학급을 위하는 나의 숭고한 대업에 동참하지 않는 놈에게 잘해줄 이유 따위 없다.
내가 그 녀석을 무시하기 시작하자, 다른 여자애들도 그 녀석을 멀리했다. 학기 초에 말을 걸어보던 친구들도 이제 그 녀석 자리 근처에 가지 않는다. 모든 대화에 무표정과 단답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면 굳이 내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됐을 것 같다.
여자애들이 그 녀석을 기피하자 그 분위기가 남자애들 사이에도 점점 퍼져갔다. 얼마 안 가 그 녀석은 우리 반의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미움을 받지는 않지만, 가까이 하기는 부담스러운 존재. 그 녀석은 친구들과 아무 교류 없이 자기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만 읽다가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간다. 친구는 한 명도 없어 보인다.
불쌍하지 않냐고? 흥, 다 자기가 자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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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말. 드디어 첫 번째 생일파티가 열렸다. 나는 최선을 다해 생일파티를 준비했다. 다함께 돈을 모아서 케이크와 꼬깔모자를 샀다. 생일 주인공들이 꼬깔모자를 쓰고 풍선으로 장식한 칠판 앞으로 나가 케이크 앞에 섰다. 우리는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주인공들이 초를 불었다.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모두가 칠판 앞에 섰다. 선생님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숫자를 세자, 찰칵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터졌다.
선생님이 플라스틱칼로 케이크를 여러 조각으로 잘랐다. 친구들은 모두 일회용 접시와 포크를 들고 교단에 모여 케이크를 먹었다.
단 한 명, 안형재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 녀석은 친구들이 케이크를 먹으며 시끄러운 와중에 멀뚱히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교단에서 케이크 배분에 정신이 없던 선생님이 그 녀석을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형재야, 케익 안 먹니?”
“안 먹어요. 케이크 싫어해요.”
그 녀석은 살짝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차가운 목소리에 선생님이 순간 당황했다. 그 녀석은 다시 스마트폰에 눈을 처박았다.
“참나, 쟤는 무슨 케이크도 싫어하냐.”
나는 곁눈질로 그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러게. 컨셉 진짜 확실하다. 미친놈.”
한 여자애가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생일파티는 내가 주도한 만큼 성황리에 끝났다.
방과후에 문화부 친구들과 게시판 앞에 모였다. 나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치켜들어 형광등에 이리저리 비쳐보았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자는 아이디어도 내가 낸 것이었다. 반 친구들과 함께 돈을 모아 가격이 제법 나가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구매했다. 이 카메라는 우리 반 공용 카메라가 되었다. 이 카메라는 우리 반의 추억을 사진으로 기록해나갈 것이다. 생일파티, 체육대회, 현장학습, 수학여행, 축제…. 게시판이 추억으로 덮어져 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아이디어다.
사진을 눈에 가까이 댔다가 멀리 떨어뜨렸다가 하며 구경했다. 흠 잡을 데 없이 잘 나온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구경은 이쯤하고 게시판에 붙이려는 그때,
“뭐야. 얘 표정 왜 이래?”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던 흠이 눈에 들어왔다. 구석에 그림자에 가려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었다.
또 그 녀석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활짝 웃고 있는데, 그 녀석 혼자 침울하다 못해 음침한 표정을 짓고 귀신처럼 서 있었다. 심령사진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멋지기만 했던 사진이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공포영화에 나오는 단체사진처럼 보였다. 내 주위로 몰려든 친구들이 한 마디씩 말했다.
“와 진짜. 불쾌한 티를 팍팍 내내.”
“꼭 이런 애들 있어. 단체사진 찍으면 표정 씹창 나서 분위기 해치는 찐따 같은 애들.”
사진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머릿속에 열이 뻗쳐 올랐다. 왜 이 녀석은 하나부터 열까지 훼방일까. 생일파티를 하기로 해놓고 생일을 안 알려주지 않나, 기껏 생일파티를 열었는데 똥 씹은 표정으로 분위기를 망치지 않나. 이쯤 되면 나를 골려먹으려고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하다.
“일단 게시판에 붙이자. 눈에 별로 띄지도 않잖아.”
소정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사물함 위로 올라갔다. 무릎을 꿇고 게시판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붙였다. 게시판에 첫 번째 사진이 전시되는 순간이었다.
사물함에서 내려와 멀리서 게시판을 바라봤다. 한 친구가 24색 매직펜을 들고 오더니 사진을 꾸미자고 했다. 친구들이 하나 둘 사진에 달라붙어 그림을 그렸다. 동물귀, 꽃 같은 걸 그리니 사진이 훨씬 활기차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 녀석의 음침한 표정이 자꾸만 거슬렸다. 구석 자리이고,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텐데. 내 눈에는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처럼 침울한 그 놈만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은 사진이 예쁘다며 웃고 떠들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화에 나 혼자만 작은 낙서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 녀석 하나 때문에.
그 녀석 하나 때문에 내가 계획한 모든 게 망했다.
자존심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움푹 패였다.
“미지야, 4월 생일파티는 언제 할 거야?”
소정이가 내 양어깨를 감싸 안으며 신난 말투로 내게 물었다.
“글쎄…. 나중에 생각하자.”
나는 입꼬리를 광대 쪽으로 끌어올리며 괜찮은 척 대답했다. 그러자 소정이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무 마음 쓰지마. 넌 정말 잘하고 있어. 괜찮아.”
소정이가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소정이는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중일 것이다. 참 다정하고 착한 아이다.
하지만 그런 소정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다음 생일파티를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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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가 물러가고 벚꽃이 흐드러지는 4월이었다. 오후 4시. 나는 하루랑 산책을 나왔다. 하루는 소형견인데도 힘이 넘쳐났다. 분명 아침에도 산책을 했는데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걸까. 나는 이리저리 하루에게 끌려다녔다. 내가 하루를 산책시키는 게 아니라 하루가 나를 산책시키는 꼴이었다. 말티즈가 은근 힘이 세다는 얘기는 어렴풋이 들었지만, 설마 내가 질 줄은 새끼일 때는 몰랐다.
공원 안쪽 벤치에 주저앉았다. 하루는 계속 걷자는 듯 일 초도 쉬지 않고 폴짝거렸다. 나는 숨을 몰아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4월 치고 햇빛이 쨍쨍했다. 벌써 하복을 꺼내 입어야 하는 걸까, 내가 하복 치마 수선을 맡겼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심코 앞쪽을 쳐다봤다. 저 멀리 내가 왔던 길로 두 남자가 걸어왔다. 아버지와 아들인 것 같았다. 아버지쪽은 크림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직접 짰는지 멀리서 보아도 엉성한 스웨터였다. 중년 남성이 입기에는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부자가 함께 산책을 하다니 사이가 참 좋나보다, 라고 생각한 차였다. 아버지 뒤로 남자애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째선지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니…
“헉!”
나는 황급히 모자를 내려 얼굴을 가렸다.
그 녀석이 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빨리 내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하루가 사람이 다가오는 걸 보자 반가운 듯 이리저리 방방 뛰며 짖어댔다. 제발 조용히 있어 하루야, 속삭였지만 하루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하루를 조용히시키는 건 포기하고 최대한 시선을 내리깔고 양팔을 허벅지 위에 고정했다. 남이 보기에 굉장히 어색한 포즈라는 자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발 빨리 지나가라고 빌었다. 동시에 왜 내가 저 녀석한테 숨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나와 그 녀석의 거리가 열 걸음으로 가까워졌다. 하루가 그 녀석에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써서 목줄이 팽팽해졌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쥐죽은 듯 얼어붙었다. 그 녀석과 그 녀석의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음 주 금요일에 학교 빨리 끝나니?”
“네. 아마 그럴 거예요.”
“그럼 저녁 같이 먹자. 케익도 사 갈게.”
“안 그래도 돼요.”
“안 그래도 된다니. 그래도 네 생일인데. 생일에 케익은 먹어야지.”
내 무릎과 모자챙 사이 좁은 시야로 두 사람의 다리가 차례대로 지나갔다. 다행히 그 녀석은 나를 못 알아보고 지나쳤다.
“형재야…. 엄마도 기뻐할 거야. 알겠지? 같이 케익 먹는 거다?”
아버지가 애원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 녀석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
10초 정도 지나고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이 멀어지고 있었다. 하루는 아쉬운 듯 내 종아리에 매달리며 낑낑 소리를 냈다. 그제서야 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곧 이어서 내가 대체 왜 저딴 녀석 때문에 마음을 졸여야 하는 건지 화가 났다. 나는 멀어져가는 그 녀석의 뒷모습에 정성스럽게 가운데 손가락을 쳐들었다. 이거나 먹어라.
이제 집에 돌아갈까, 하고 벤치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하루는 내가 일어서는 걸 보자 바로 기운을 차리고 헥헥댔다.
그 순간, 방금 들은 대화가 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그래도 네 생일인데.
…네 생일?
쟤 생일이 다음 주 금요일이라고?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담임 선생님한테서도 알아내지 못했던 녀석의 생일을 이렇게 우연히 알게 되다니.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다채로운 폭죽이 터지며 아름다운 화학반응이 빠르게 일어났다.
나는 핸드폰으로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4월 생일파티 다음 주 금요일에 하자!’
친구들이 곧바로 무슨 이유인지 물었다.
이번에야 말로 완벽한 생일파티를 열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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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것 하나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아니다. 오히려 나쁜 쪽에 가까웠다. 아침부터 몸이 무거웠다. 온몸이 고무밴드로 침대에 결박된 것 같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속박에서 벗어났다. 몸을 씻고 교복을 입고 부엌에 나오니 식탁에 아침밥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을 잠시 쳐다보다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현관을 나섰다.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들떠보였다. 휴대폰도 안 걷고, 수업도 답안 채점만 하고 진도는 전혀 나가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으로 게임이나 했다. 이것 말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중간중간 아빠에게 메시지가 왔지만 읽지 않았다. 아빠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가서 읽기 싫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종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방을 싸고 있는데 반장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형재야, 담임샘이 너 찾아. 지금 교무실로 오래.”
“나를?”
“응. 빨리 가봐.”
반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이 나를 부를 일이 뭐가 있지? 나는 수학 교과서를 가방에 넣으려다 말고 책상에 내려뒀다. 반장이 계속 내 자리 옆에 서서 날 쳐다봤다. 나를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할 수 없이 알겠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로 갔다.
교무실은 4층에 있었다. 교실은 2층이다. 대체 교실과 교무실을 멀리 만든 이유는 뭘까,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동선을 짜는 건 일부러 학생을 골탕먹이려는 의도일까. 계단을 오르는데 힘이 부쳤다. 무얼 해도 이유없이 지치는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내게 그런 날이었다.
빗자루를 들고 뛰어다니는 남자애들을 지나쳐 교무실에 도착했다. 선생님은 자리에 앉아 가정통신문을 챙기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샘, 저 왔어요.”
선생님이 놀란 듯 나를 돌아봤다.
“응? 무슨 일이야, 형재야?”
“네? 샘이 저 불렀잖아요.”
“내가? 그런 적 없는데?”
선생님의 오른눈썹이 우스꽝스럽게 들썩였다.
“반장이 샘이 저 불렀다고 해서 왔는데요.”
“어… 난 안 불렀는데…. 미지가 왜 그랬을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선생님이 검지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샘 곧 내려가니깐 교실 가 있어. 금방 갈게.”
나는 그대로 교무실을 나왔다. 교무실 문앞에서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잠시 서 있었다. 반장이 왜 거짓말을 했지? 이런 유치한 장난을 할 성격은 아닌 것 같던데. 곰곰히 생각했지만 별다른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반은 이미 종례를 마치고 청소를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교실로 돌아갔다. 나도 빨리 집에 가야지, 하는 생각 뿐이었다.
교실 문 앞에 섰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교실이 조용했다. 문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담임 선생님을 기다리는 교실이 조용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문을 열고 말았다.
그 순간,
“생일 축하합니다!”
큰 함성과 폭죽 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허공에 종이가루가 나풀거렸다. 귀 아프게 소리치는 인파 사이로 눈부신 형광등 아래 반장이 서 있었다. 두 눈이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다.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두 손 위에 생크림 케이크가 있다. 뾰족한 딸기가 가장자리를 따라 꽂혀 있고, 윗면에 독버섯처럼 알록달록한 초콜릿으로 ‘HAPPY BIRTHDAY’라고 쓰여 있고, 정중앙에 송곳처럼 초가 꽂힌 채 활활 타오른다.
“야, 안형재, 너 오늘 생일이라며? 왜 말 안 했어?”
“형재야, 생일 축하해.”
“우리가 서프라이즈 파티 준비했어. 어때?”
수많은 시선이 나를 에워싼다. 그들이 기괴하게 웃는다. 어지럽다. 속이 메스껍다. 온몸의 피가 역류한다.
어느새 반장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형재야. 촛불 불어. 오늘은 네가 주인공이야.”
불꽃이 내 바로 앞으로 다가온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숨 쉬는 법을 잊은 것만 같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내 머리가 이해하길 거부했다.
“야, 어서 불라니—”
“이거 치워!”
그 녀석이 내 어깨를 밀치는 동시에 케이크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케이크가 친구들이 둥글게 모여 있던 중앙에 떨어지며 폭탄처럼 터졌다. 가까이 있던 친구들의 양말, 교복 바지, 스타킹으로 생크림이 튀었다. 친구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모두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파랗게 질린 소정이 손에 들린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지이잉 소리를 내며 사진을 뱉었다. 사진이 팔랑거리며 생크림 덩어리 위로 떨어졌다.
“야, 너 지금 무슨…”
나는 그 녀석의 얼굴을 보았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 녀석은 불안정하게 숨을 삼키고 토했다.
“이 미친 새끼야. 너 돌았냐?”
“어떡해. 바지에 다 묻었어.”
“이거 우리가 돈 모아서 산 건데….”
친구들이 하나 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채 굳어 있는 그 녀석을 향해 비난이 쏟아졌다. 온갖 욕설이 생크림향과 뒤섞였다.
“왜 우리 반 앞에 사람이 이렇게 많아? 무슨 일 있…”
담임 선생님이 앞문에서 나타났다. 그새 우리반 복도에 학생들이 몰려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녀석이 휙 고개를 돌려 선생님을 바라봤다. 곧바로 선생님을 밀치더니 인파를 뚫고 달려나갔다.
“형재야, 너 어디 가?”
선생님이 그 녀석에게 팔을 뻗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손은 허공을 잡았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미지야, 지금 이게 무슨 일…”
나도 그 녀석을 따라 뛰쳐나갔다. 선생님을 지나쳐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애들을 뚫고 뛰었다.
그 녀석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달리기가 빠르지는 않았다. 나는 죽을 힘으로 달려 그 녀석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야 이 새끼야! 멈춰!”
그 녀석이 나를 떨쳐내려고 저항했다. 나는 옷이 찢어질 정도로 꽉 붙잡았다. 실랑이 끝에 결국 그 녀석이 저항을 멈췄다.
“너 왜 그래? 미쳤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나는 오른손에 힘을 준 채 왼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숨을 골랐다. 그 녀석이 돌아서더니 내 팔을 콱 잡고 밀쳤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놓쳤다. 그대로 그 녀석이 도망치는가 했는데, 그 녀석이 제자리에 서서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뭐 하는 짓이냐고? 너야말로 뭐하는 짓인데? 생일파티 안 한다고 말했잖아.”
그 녀석이 분노가 가득 찬 표정으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뒷걸음질 쳤다. 이런 목소리도 낼 수 있는 놈이었나. 그때 나는 놀란 마음 2할, 이 새끼가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네, 하는 마음 8할이었다.
“그냥 생일파티잖아. 애들이랑 함께 서프라이즈 파티 해준 건데. 너 또라이야?”
그 녀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프라이즈? 그게 무슨 서프라이즈야. 당사자가 싫다는데. 그냥 나 엿먹이려고 한 거 아니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 녀석의 생일을 알고, 그 녀석 생일에 4월 생일파티를 열기로 했다. 생일파티를 싫어하는 놈이니 이 방법이면 제대로 골탕 먹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장으로서의 의무와 개인적인 복수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반 아이들에게 그 녀석의 생일을 힘들게 알아냈다고, 서프라이즈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더니 모두가 좋아했다. 그 녀석만 빼고 반 친구들에게 메신저로 생일파티를 알리고, 비밀리에 생일파티를 준비했다. 케이크를 받은 그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 생각만 하면 실실 웃음이 나왔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내 예상보다 훨씬 미친 놈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케이크를 바닥에 처박다니. 그런데 도리어 내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친구들이 널 위해서 준비했는데 어떻게 그래? 넌 우리 생각은 안 해?”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그게 날 위한 거라고?”
그 녀석은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아니 대체 왜 그러는데?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야? 이유가 뭐야?”
나도 악을 쓰며 말했다. 그러자 그 녀석이 말했다.
“난 내 생일이 싫어.”
“뭐?”
그 녀석이 살짝 사그라든 목소리로 말했다.
“내 생일이 싫다고. 이해가 안 돼?”
나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외쳤다.
“생일이 싫다는 게 대체 뭔 개소리야. 세상에 자기 생일이 싫다는 사람이 어딨어?”
그 녀석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휘저었다. 그 녀석은 경멸의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는 뒤돌아서 교문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져가는 뒤통수를 노려봤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우리를 구경하던 사람들도 신경을 끄고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아, 최악이다.
-
터벅터벅 걸어서 교실로 돌아왔다. 한 남자애가 대걸래로 바닥을 닦고 있었다. 하얀 생크림이 목재 바닥에 문대져 자국을 남겼다. 교실 구석에서 소정이가 울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이 소정이 근처에 모여 있었다. 몇몇 친구들이 교실문에 서 있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신나서 생일파티를 추진했다. 친구들은 반장인 나를 믿고 따라줬다. 내 말을 따라 돈을 모아 케이크를 사고, 누가 어떤 타이밍에 무슨 대사를 할지 정하고, 그 녀석에게 생일파티를 철저히 숨겼다.
결전의 날, 나는 거짓말을 해서 그 녀석을 교무실로 보냈다. 재빠르게 우리는 책상을 뒤로 밀고, 교사 휴게실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오고, 그 녀석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케이크를 건네고 모두가 환호한다. 녀석이 당황해하는 순간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 녀석의 멍청한 표정이 게시판에 장식된다. 이것이 내가 계획한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였다. 반장으로서의 의무와 개인적인 복수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서프라이즈.
나는 앞문에 서서 멍하니 교실을 바라봤다. 내가 계획한 생일파티의 결말이 그곳에 있었다. 칠판에 우리가 그린 그림이 남아 있었다. 색깔 분필로 큼직하게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교탁 위에 놓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꼬깔 모자 4개가 쓰러져 있고, 형체를 잃은 빵덩어리가 찌그러진 받침대 위에 엎어져 있었다. 가까스로 울음이 쏟아지는 것을 참았다.
“미지야. 생일파티 너가 계획했다며?”
담임 선생님이 내게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야단에 정신이 없을 법도 한데. 선생님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형재가 생일파티 하기 싫어한 거 알고 있었지.”
“…네.”
화를 내고 싶었다. 너무 억울하다고, 내 잘못이 아니라 그 새끼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반 친구의 의사를 무시하고 내가 멋대로 생일파티를 강행했다. 명백한 내 잘못이다. 반장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러나 나는 녀석에게 엿을 먹이고 싶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반장 자격 실격이다.
나는 선생님이 혼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사려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지야. 형재가 왜 생일파티를 싫어하는지 알아?”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일을 싫어한다고 그랬어요.”
“응. 맞아.” 선생님이 고민하듯 팔짱을 끼더니 잠시 말을 멈췄다.
“전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바라봤다. “걔는 왜 생일이 싫대요? 어떻게 자기 생일을 싫어할 수가 있어요?”
선생님이 고개를 들고 교실 전체를 천천히 훑었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한 듯 눈을 감았다.
“형재가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이대로 두면 너희들이 형재를 싫어할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네.”
청소가 다 끝나고 선생님이 반 애들을 자리에 앉힌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은 진지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5분 동안 이야기했다.
나는 묵묵히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인지 깨달았다.
-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쯤에 가방을 교실에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돌아갈 순 없었다. 그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어떻게 돌아갈까. 내일이 토요일이어서 다행이었다. 단체 채팅방에 사과라도 해야 하나. 스마트폰을 들고 메신저에 들어갔지만 도저히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현관문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아빠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들 왔어? …가방은?”
“학교에 두고 왔어요.”
아빠를 지나쳐 걸어갔다. 아빠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별 말은 없었다.
식탁에 케이크가 있었다. 아빠가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였다. 짧은 초 4개가 가장자리에 꽂혀 있고, 정중앙에 길다란 초 하나가 활활 타올랐다.
“학교에서 뭔 일 있었어? 힘들어 보이는데.”
아빠가 접시와 포크를 들고 와 식탁에 내려놨다.
“별 일 없었어요.”
나는 아빠의 눈을 피했다. 아빠는 케이크 사진을 찍더니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안…”
나는 후— 불어 촛불을 껐다. 아빠가 멈칫하더니 와— 하고 어색하게 박수치며 환호했다.
아빠가 초를 빼고, 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덜어 내 접시에 두었다. 나는 포크로 생크림을 살짝 찍어 먹었다. 생크림 맛이었다.
“기쁘지 않아?”
아빠가 말했다.
“안 기뻐요.”
내가 대답했다. 아빠는 나를 내려다보며 식탁 앞에 몇 초 간 서 있었다. 그리고 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덜어 접시 위에 올렸다. 접시를 들고 거실로 걸어갔다.
“자. 당신도 먹어야지.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 사왔어. 딸기 케익 아주 환장하지?”
아빠는 하얀 목재 거실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조심스럽게 액자 앞에 접시를 내려놨다. 그리고 액자 속 사진을 바라보며 사진을 쓰다듬었다.
“…형재야. 이리 와라.”
아빠가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포크를 내려두고 아빠 옆으로 다가갔다. 두 손을 배꼽에 모았다.
“절하자.”
아빠와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상체를 바닥에 숙였다. 3초 뒤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한 번 더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허리를 약간 숙였다. 그리고 사진을 바라봤다. 케이크 뒤에 놓인 액자 속에서 젊은 여자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 뒤에 하얀색 유골함이 우두커니 놓여 있었다.
나는 순간 그 유골함이 생크림 케이크처럼 느껴졌다. 정성스럽게 생크림을 펴바르고, 검은색 초콜릿으로 글씨를 써놓은 스펀지 케이크. 저 케이크에 사람의 뼛가루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
한번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엄마가, 하얀 재가 되어 하얀 케이크 안에 들어 있다니.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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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를 낳다가 죽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출산 중 죽는 산모는 나타난다. 엄마는 자신이 죽게 되리란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분만실에 들어갔다. 내가 엄마 몸 밖으로 나오자 엄마에게 심각한 산후출혈이 있었다. 의사들은 최선을 다했으나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생명이 꺼져가는 와중에 나를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보자기에 담긴 나를 떨리는 두 팔로 안았다. 엄마는 눈도 못 뜨고 우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엄마는 죽었다. 띠- 하는 경보음이 이어지고, 죽은 엄마의 품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우렁차게 울어재꼈다.
엄마가 없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부모가 없는 것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굳이 자신의 불행을 먼저 밝히지는 않으니, 지레짐작으로 이 사람도 부모가 살아 있겠거니 넘어가서 주변에 부모 없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 세상에는 부모가 없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또한 나는 엄마를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다. 그러므로 엄마의 사랑을 느껴본 적도 없다. 인간은 원래 가지던 것을 뺏길 때 그것의 부재를 실감하지만, 원래 없던 것에 대해서는 상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에 슬퍼하지 않았다. 아니, 슬퍼할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까.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내 생일이었다.
생일날마다 사람들이 나를 축하해줬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인간도, 내 친한 친구도,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내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그 사람들에게 악의가 없다는 건 안다. 그들은 내 생일이 곧 엄마가 죽은 날인 줄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와 상관 없이 그 축하가 내게는 엄마의 죽음을 축하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 엄마의 기일을 축하해주었다.
생일이 오면 나를 낳고 죽은 엄마가 떠올라 하루 종일 우울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게 축하를 건넨다. 그러면 나는 힘겹게 웃어보이며 고맙다고 대답한다.
이 괴리를, 어린 나는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엄마의 기일에 기쁜 척을 해대는 내 모습이 역겹게 느껴졌다. 말린 미역이 물에 불려지는 듯 자괴감이 커져갔다. 엄마가 죽은 날인데 이렇게 웃어대도 되는 걸까? 기뻐해도 되는 걸까?
한번은 기쁜 척을 그만두어봤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말 한마디 안 섞어본 여자애가 내게 생일을 축하한다고 했다. 나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오늘은 우리 엄마가 죽은 날이야.”
여자애는 손을 휘저으며 크게 당황했다. 내 의도를 헤아리고 어떤 말을 할지 생각하는 듯했다.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여자애가 말했다.
“그래도 축하해.”
나름 고민 끝에 내놓은 최선의 대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답이 내 가슴 깊숙이 박혔다.
그래도 축하한다니.
엄마의 죽음을 털어놓아도 여전히 축하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필요한 건 축하가 아닌데.
축하와 위로는 정반대의 성격을 띤다. 사람들은 축하는 쉽게 하지만 위로는 어려워한다. 축하는 책임이 필요없지만, 위로는 건네는 순간 막중한 책임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위로가 필요할 만큼 슬픈 사연을 알게 되었다는 책임감. 사람들은 그 책임감을 부담스러워 한다. 슬픈 사연을 알고도 아무 위로 없이 넘어가면 스스로가 나쁜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렇다고 억지로 위로를 건네자니 위로하는 척은 너무나 힘겹다.
그 여자애가 축하와 위로 중 축하를 선택한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그쪽이 쉽고 편하니깐. 네 어머니의 죽음에 위로는 건네지 못해도, 네 생일에 축하는 해주지 않았냐. 그러니 책잡지 말아달라. 그만 넘어가달라. 12살짜리 머릿속에서 이 일련의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본능이다.
축하받을 일은 맘껏 떠들어도 된다. 하지만 위로받을 일은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대에게 예의가 아니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행위다. 나는 이 사실을 그 여자애를 통해 깨달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 엄마의 죽음을 숨겼다. 그리고 나로서는 엄마가 죽은 날에 뻔뻔하게 생일 축하를 받을 용기가 없다. 그래서 생일 역시 숨기기로 했다. 생일을 숨기면 축하받을 일도 없을 것이고, 내가 억지로 웃으며 고맙다고 말할 일도 없을 것이고, 엄마의 기일에 기쁜 척을 할 일도 없을 것이고, 심장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느낄 일도 없을 것이다.
-
“형재야,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지.”
아빠와 나는 식탁에 앉아 남은 케이크를 마저 먹었다. 아빠가 케이크를 한 입 입에 집어 넣으며 말했다.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다. 아무 일 없었다고, 별 일 아니라고 얼버무리면 될 일이다. 하지만 나는 심각하게 지친 상태였다. 아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잡아뗄 정신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차라리 확 털어내버리고 편해지고 싶었다.
“…학교에서 생일파티를 했어요.”
“생일파티?”
“누가 제 생일을 알아내서… 서프라이즈 파티라면서 애들이 갑자기 케이크를 줬어요. 노래도 부르면서.”
“그래서 어떻게 했어?”
아빠가 포크를 내려놓고 식탁에 두 팔을 올렸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아빠의 눈을 피했다.
“케이크를 바닥에 집어 던졌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빠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듯했다.
“그리고나서 그대로 집에 온 거야? 그래서 가방도 두고 온 거고?”
“…네.”
아빠가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아마 나를 뭐라고 나무랄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그랬니?”
아빠가 두 팔을 식탁에 받치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생일을 축하받기 싫어요. 오늘은 특히나…. 엄마가 죽은 날이잖아요. 근데 걔네는 그것도 모르면서 나보고 축하하다고….”
입을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가슴 속에 응어리가 뭉치더니 그것이 온몸으로 뻗어나가 위장을 뒤틀었다. 조금만 긴장을 풀어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아무리 꾹 눌러도 깊은 곳에서 감정이 요동쳤다.
“형재야.” 아빠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네가 생일을 싫어하는 이유가 생일이 엄마가 죽은 날이랑 같아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죽어서 나는 너무 슬픈데. 사람들은 저한테 축하하다고 해요. 그게 너무 힘들어요.”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을 때마다 목이 메어 갔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한입도 먹지 않은 생크림 케이크 조각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내가 안 태어났으면… 엄마도 안 죽었을 텐데…. 나 때문에….”
아빠가 나를 와락 안았다. 나는 아빠의 품에 안겨 울었다. 온몸이 들썩거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빠는 내 등을 토닥였다. 아빠의 스웨터에서 쾨쾨한 향기가 났다. 아빠는 이 후줄근한 스웨터를 매일 입고 다녔다. 제발 다른 옷 좀 입으라고 아무리 잔소리해도, 아빠는 이 크림색 스웨터를 고집했다. 스웨터의 쾨쾨한 향기가 내 머릿속을 감싸안자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
그 스웨터는 엄마가 죽기 전에 손수 짠 스웨터였다.
-
“이제 괜찮아?”
“…네.”
아빠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봤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여태껏 아빠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아빠 앞에서 운 게 자꾸 떠올라서 부끄럽고 어색했다. 아빠는 여전히 내 손을 쥐고 있었다.
“형재야. 사실 너에게 거짓말한 게 있는데.” 아빠가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거짓말이요?”
“사실, 네 엄마는 널 낳으면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아빠를 쳐다봤다.
“네? 몰랐다면서요?”
아빠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니. 알고 있었어. 엄마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전혀 아니었어. 그래서 우리는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지.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너를 임신한 거야. 행운인지 불행인지…….”
아빠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아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낳지 말자고 애원했어. 낳지 말아달라고. 나는 당신이 죽는 게 싫다고. 그런데… 엄마는 너를 낳겠다고 했어. 죽을 걸 알면서도, 너를 포기할 수 없던 거야.”
맞잡은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아빠는 최대한 눈물을 참으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빠의 얼굴에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분만실에 들어갈 때 엄마가 말했어. 아이를 부탁한다고. 내가 죽어도 당신이 있으니깐 걱정 없다고. 나는 빌었어. 병원 복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꼭 엄마를 살려달라고. 수연이를… 살려달라고.“
아빠가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빠는 당신의 약한 모습을 허물없이 내보이며 울었다. 어찌할 줄 몰라 가만히 아빠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는 크게 숨을 들이쉬면서 계속 말했다.
“분만실에 들어가니 의사들이 자포자기한 상태로 고개를 저었어. 난 바로 수연이에게 달려갔어. 수연이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어. 수연이가 널 안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갓 탯줄을 자른 널 보자기에 감싸서 줬어. 수연이가 널 안고 네 얼굴을 빤히 쳐다봤어. 그리고 널 보면서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아빠가 내 어깨에 양손을 올리며 내 얼굴을 바라봤다.
“생일 축하해.”
나는 멍하니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는 울음을 삼키며 최선을 다해 미소지었다.
“수연이는… 웃고 있었어. 분명 웃고 있었어. 품속에 너를 안고 네 얼굴을 바라보면서 웃었어. 엄마는 널 낳은 걸 후회하지 않았어. 죽는 순간까지 네 탄생을 축하해줬어.”
아빠가 내 머리를 감싸며 안았다.
“형재야. 생일 축하해. 진심으로… 생일 축하한다. 우리 아들아.”
아빠는 나를 온몸으로 꽉 안았다. 내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났다. 나도 아빠를 안았다. 우리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동안 서로를 안았다. 나는 엄마의 손길을 느꼈다. 죽은 엄마가 서로 껴안고 울고 있는 아빠와 나에게 다가와 품에 안았다. 엄마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도 작은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가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에 내 맘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져갔다.
-
“아, 그래. 너한테 줄 게 있다.”
아빠가 갑자기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더니 나에게 건넸다.
“자, 받아라.”
“이거 엄마가 짠 스웨터잖아요? 왜 나한테 줘요?”
“네 거니깐.”
아빠가 스웨터를 들이대며 어서 받으라고 재촉했다. 나는 엉겁결에 스웨터를 받았다.
“엄마가 너 낳기 직전에 너한테 줄 아기옷을 짜고 싶다고 나보고 뜨게질 세트를 사달라고 하더라고. 근데 너무 크게 만든 거 있지? 손재주가 없었나봐. 다시 짜기에는 시간도 없고 해서 그냥 나 입으라고 하더라.”
아빠가 어색하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제 나보다는 네가 입어야 할 것 같아. 아직 좀 크겠지만… 팔 좀 걷어서 입으면 되지 않을까?”
나는 양손으로 공중에 스웨터를 펼쳐보았다. 스웨터 중앙이 젖어 있었다. 낡은 스웨터였다. 아빠가 14년 동안 입었으니. 그 스웨터가 14년 만에 나에게 왔다. 어린 나를 위해 엄마가 직접 뜨개질한 스웨터. 만삭인 몸으로 스웨터를 짜는 엄마를 허공에 그려보았다. 양손을 모으고 스웨터에 머리를 파묻었다.
“생일 선물이야.”
아빠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냄새나.”
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미안하다.”
아빠가 입을 꾹 닫았다.
-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을 보니 반장이 서 있었다. 반장은 안절부절하며 몸을 가만히 있질 못했다. 쟤가 우리 집을 어떻게 알고 왔지? 내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아빠가 현관문을 열었다.
“안녕. 형재 친구니?”
“아, 네. 안녕하세요. 형재 반 반장이에요.”
반장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반장 손에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생일 축하해주러 왔구나? 어서 들어와. 형재 안에 있어.”
“실례하겠습니다.”
아빠는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반장을 집으로 들여보냈다. 반장이 내 앞에 섰다. 내 얼굴을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아, 아직 눈물 자국 있을 텐데. 나는 시선을 피했다.
“이거 받아.”
반장이 내 손에 케이크를 멋대로 놓았다. 또 생크림 케이크다. 하루에 케이크를 몇 번이나 보는 건지.
“그….” 반장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선생님이 반 애들한테 말해줬어. 그… 네 얘기….”
“아.”
나는 한 달 전 선생님과 한 상담을 떠올렸다. 그때 선생님에게 왜 생일을 싫어하는지 얘기했었다. 분명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그리고 네 생일… 내가 애들한테 알려줬는데….”
반장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자신없어 보이는 모습은 처음이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괜찮아.”
“응? 괜찮다고?”
반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젠 괜찮아.”
케이크를 식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반장은 더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말을 어떻게 꺼낼지 망설이는 듯하더니,
“…미안해.”
그 짧은 말을 내뱉고 고개를 숙였다. 실시간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반장이 고개를 들었다. 반장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다.
“그리고… 생일 축하해.” 반장은 계속해서 손을 꼼지락댔다. “아무리 고민해도 역시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꼭 치과에 끌려온 아이처럼 보였다.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고마워. 나도 미안해. 갑자기 너 밀쳐서….”
내 대답을 듣고 반장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반장의 목소리가 방금 전까지보다 한층 편안해졌다.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생일 축하해준 게 싫었을 거야. 미안해. 네게 그런 사연이 있을 줄 몰랐어. 하지만….”
반장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활짝 웃었다.
“축하한다는 말은 진심이야. 생일 축하해.”
나는 그 축하에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동안 질리게 들어온 텅 빈 축하가 아니었다. 그것은 따뜻하고 포근한 위로에 가까웠다.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집안은 생크림향으로 가득했다.
달콤한 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