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 리뷰
사무라이 소드와의 결투가 끝난 덴지는 평소처럼 공안에 출근했다가 마키마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는다. 마키마와 영화관 데이트를 하게 된 덴지. 첫 데이트에 신났건만 마키마는 하루 종일 영화만 보자고 한다.
영화 6편을 봤지만 덴지와 마키마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마지막 영화 남녀가 포옹하는 장면에서 이유없이 눈물을 흘렸을 뿐이었다. 덴지는 마키마에게 묻는다. 자신에게 ‘인간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냐고. 그러자 마키마는 덴지의 가슴에 안기며 심장 소리를 듣는다. 있는 것 같은데? 마키마는 무심하게 답한다.
다음 날 출근길. 인간의 마음이 있어 신난 덴지는 거리의 모금함에 선뜻 돈을 기부하기도 한다. 길을 걷던 중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진다. 덴지는 황급히 근처 공중전화부스로 뛰어든다. 숨을 고르는 사이, 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비를 피해 들어온다. 좁은 부스 안,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은 2025년 9월에 개봉했다. 2025년 11월 기준으로 한국 관객수 250만 명을 넘겼고, 전 세계 누적 흥행 수입은 1억 3천만 달러를 넘겼다. 최근 개봉한 영화 중에 최고로 흥행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스토리는 체인소 맨 1기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체인소의 악마와 계약한 소년 ‘덴지’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소녀 ‘레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작을 보고 오는 것을 추천한다.
스토리는 세 파트로 나뉜다. 덴지와 레제가 만나고, 싸우고, 이별한다. 파트가 전환될 때마다 장르가 완전히 뒤바뀔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진다. 제작진 입장에서 이 달라지는 분위기를 관객에게 충격적으로 전달하는 게 관건이었을 것이다. 제작진들은 이를 연출로 승부했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영화적 연출’을 적극 활용하는 만화가로 유명하다. 타츠키의 만화를 보면 와이드한 프레임 구성, 같은 구도의 장면 반복, 근경-중경-원경의 화면 구성 등 영화에서 본 듯한 연출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극장판에서 타츠키의 ‘영화적 연출’의 장점이 극대화되었다.
덴지와 레제가 만나는 파트에서는 영화적 연출을 주로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오프닝을 보자. 흑백만화처럼 그려진 골목길을 마치 핸드헬드 카메라로 촬영하며 이동하는 듯한 장면이다. 이는 애니메이션 1기 오프닝 장면을 오마주한 것이다.
분명 애니메이션이지만, 실제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영화적 연출 덕분에 평범한 청춘 로맨스물 분위기를 이어간다.
레제가 정체를 드러낸 후 두 번째 파트로 들어서면서 애니메이션적 연출을 사용한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화면, 빠른 템포의 액션, 여기저기 튀기는 피가 쉴 틈 없이 휘몰아친다.
태풍의 악마를 죽이고 난 뒤 나오는 만화책 표지 연출도 인상 깊었다. 태풍의 악마가 튀긴 피가 페인트처럼 변하며 체인소 맨 만화책 표지 그림체로 화면이 순간 멈춘다.
이처럼 이 영화는 각 장면마다 영화적 연출, 애니메이션 연출, 만화적 연출을 적절하게 전환한다. 이 연출 전환이 장르가 바뀌는 충격을 극대화하고, 관객의 감각을 뒤흔든다.
지난 체인소 맨 리뷰에서 덴지를 소년만화 주인공의 특징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이단아라고 소개했다. 특별한 목표도 없고, 마키마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수동적인 주인공이었다. 특히나 1기에서 아무런 내적 성장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덴지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소리까지 했다.
이 영화에서는 덴지의 내적 갈등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자신에게 ‘인간의 마음’이 있는지 고민하던 덴지가, 레제를 만나고 사랑함으로써 ‘인간성’을 되찾아간다.
영화 초반 내내 덴지의 미성숙한 자아를 계속 강조한다. 마키마와 데이트하는 것에 뛸 듯이 기뻐하고, 영화관 데이트를 지루해하고, 마키마에게 성적 흥분을 느끼는 것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레제를 만나며 이 점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레제가 건넨 커피를 인상을 구겨가며 마시고, 유치한 장난을 주고받으며, 학교 데이트를 즐긴다. 딱 16살다운 미성숙함을 보여준다.
마키마가 가슴에 안기기만 해도 흥분하던 덴지는, 야밤에 학교 수영장에서 알몸으로 레제와 함께 있어도 흥분하지 않는다. 덴지와 레제의 사랑이 본능에 충실한 에로틱한 사랑이 아닌, 순수하고 정신적인 플라토닉 사랑임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덴지의 목표는 ‘인간의 마음’을 찾는 것이다. 레제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인간성을 되찾아간다. 결말에서 덴지는 자신을 죽이려 한 레제를 카페에서 기다린다. 짐과 돈을 모두 싸들고, 꽃다발을 들고서.
레제와 함께 도망치면 공안의 적이 되어 악마로서 토벌당할 것임을 알면서도 덴지는 레제를 선택했다. 아무 목표 없이 마키마가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였던 덴지가, 마키마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이 영화의 진주인공, 레제다. 그렇다. 덴지는 주인공 자리 또 뺏겼다.
레제는 체인소의 심장을 노리고 덴지에게 접근한 폭탄의 악마였다. 덴지와 키스하는 중 덴지의 혀를 물어뜯으면서 정체를 밝힌다. 이 시점부터 장르가 뒤바뀌며 본격적인 액션신이 이어진다.
레제는 소련(체인소 맨 세계관은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아서 소련이 있다)에서 ‘모르모트’라는 이름으로 키워진 실험체다. 평범한 소녀인 척 연기했지만, 사실 본인도 덴지처럼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다.
레제는 덴지를 데리고 밤에 학교에 간다. 학교에 다녀본 적 없다는 덴지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사실 본인도 학교에 다녀본 적 없다. 학교 데이트 씬은 평범한 삶을 박탈당한 두 소년 소녀가 평범한 삶을 꿈꾸는 장면이다.
레제는 덴지에게 시골쥐와 도시쥐 중에 무엇이 좋냐고 질문한다. 시골쥐는 맛있는 것은 먹지 못하지만 시골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 도시쥐는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지만 인간이나 고양이에게 죽을 수 있어 위험하다. 시골쥐는 평범한 삶, 도시쥐는 특별한 삶의 의미한다.
덴지는 고민도 없이 도시쥐를 택한다. 마음껏 먹고 자고 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러나 레제는 시골쥐처럼 살기를 원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오믈렛을 먹고, 공원을 산책하고, 수족관에서 돌고래와 펭귄을 구경하는” 평범한 삶을 원했다.
https://youtu.be/lggJlm4QeEE?si=H6M_ZroURTPOVxM_
방금 앞 문장은 레제가 자신을 습격한 킬러를 죽이면서 러시아어로 부른 ‘제인은 교회에서 잠들었다’의 가사다. 덴지와 함께 자신이 동경하던 시골쥐의 삶을 체험하고 있었는데, 킬러가 찾아오면서 그 환상이 깨진다. 레제는 자신은 도시쥐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다음 날 레제와 덴지는 축제에 놀러간다. 불꽃놀이가 터지기 직전 레제는 덴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며 함께 도망가자고 한다. 하지만 덴지는 거절한다. 데블헌터 일도 적응해가고 있고, 동료랑 친해졌는데, 공안에 있으면서 너랑 만나면 안 되냐고 대답한다.
이에 레제는 덴지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음을 눈치챈다. 또한 덴지가 시골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도 깨닫는다. 덴지와 레제의 마음이 어긋난 것이다. 레제는 덴지에게 입을 맞추며, 혀를 물어뜯는다.
모든 싸움이 끝나고 레제와 덴지는 해변에서 깨어나 대화를 나눈다. 레제는 덴지를 좋아한 것은 다 거짓이었다고 말하지만, 덴지는 그럼 수영은 왜 가르쳐줬냐며 반박한다.
덴지가 레제에게 도망치자고 한다. 도시쥐의 삶에 만족하던 덴지가, 레제를 위해 시골쥐의 삶을 자처한 것이다. 하지만 레제는 자신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며, 키스하는 척하면서 덴지의 목을 부러뜨리고 헤어진다. 덴지는 쓰러진 채 카페에서 기다리겠다며 외친다.
레제는 기차를 타고 도망치려다 포기하고, 덴지에게 간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덴지를 만나기 위해 카페로 향한다. 하지만 마키마가 앞을 가로막는다. 마키마는 자신은 시골쥐를 죽이는 걸 좋아한다며, 레제를 무참하게 죽인다.
레제는 자신을 기다리는 덴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독백한다.
“덴지군, 사실은 말이야, 나도 학교에 가본 적 없어”
이 대사는 레제의 모든 감정이 응축되어 들어가 있다.
덴지를 향한 사랑, 동질감, 그리고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한 자신을 향한 한탄.
그렇게 시골쥐의 삶을 동경했던 도시쥐는 쓸쓸하게 죽는다.
여담으로, 초반에 화면 정중앙에 원형 사물을 배치하는 연출이 계속 나온다. 이 연출이 왜 나오는지 신경 쓰였는데, 엔딩에 이르러서 이 연출의 의도를 깨달았다.
레제가 창에 꿰뚫리고 피를 쏟으며 죽어갈 때, 피웅덩이 위에 누워 있는 레제의 모습이 비춰진다. 원작에서는 피웅덩이가 왼쪽에 치우쳐져 있는데, 영화에서는 정중앙에 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 나는 이것을 보고 제작진들이 변태임을 확신했다.
레제와 마키마는 덴지의 히로인으로서 서로 대비되는 연출을 보여주었다. 덴지는 마키마와 영화관 데이트를 한다. 어른으로서의 데이트다. 반면 레제와는 학교 데이트를 한다. 사춘기 아이들의 데이트다. 복장도 대비된다. 마키마는 긴머리에 카디건, 긴 치마, 스타킹으로 온몸을 가린 정숙한 여성의 복장을 하고 있다. 레제는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노출이 많다. 마키마는 감정을 숨기고 차가운 성격이지만, 레제는 발랄하고 감정을 숨기지 않는 소녀같은 성격이다.
인간 레제와 악마 레제의 대비도 눈에 띈다. 수영장에서 알몸으로 덴지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겠다는 레제와, 폭탄의 악마로 변해 덴지에게 무기인간이 싸우는 방식을 알려주겠다는 레제. 둘 모두 팔을 앞으로 뻗는 자세이지만, 수영장의 레제는 덴지가 수영장 안에 들어가 있는 레제를 내려다보는 구도인 반면, 악마 레제는 덴지가 트럭 위에 서 있는 레제를 올려다보는 구도다. 시골쥐(인간)일 때에는 덴지와 함께하는 낮은 위치에 있고, 도시쥐(악마)일 때에는 덴지를 압도하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구도의 대비가 평범한 삶을 원했으나 결국 악마로 살 수밖에 없는 레제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체인소 맨 레제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뽑는다면 수영장 씬이다.
레제는 폭탄의 악마다. 물속에서는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수영장은 레제가 평범한 소녀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 수영장 씬은 도시쥐의 삶을 살아왔던 소녀가 생애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소년과 함께 시골쥐로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
https://youtu.be/Pzkm1EmgmMI?si=mkEF3SvmaDsVQnXq
레제와 덴지가 알몸으로 있지만 야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답다. 이 장면에서 나오는 OST ‘in the pool’과 영상미가 어우려져 레제와 덴지의 순수한 사랑을 표현한다.
레제가 킬러의 습격을 받고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는지 알 수 있다. 덴지와 평화롭고 평범한 시골쥐의 삶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킬러가 찾아와 그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지각하고 절망하지 않았을까.
마키마와 데이트한 다음날, 자신에게 인간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 덴지는 신이 나서 출근길에 모금함에 기부하고 꽃을 받는다. 여기서 꽃은 덴지의 ‘인간의 마음’을 상징함을 알 수 있다. 덴지는 꽃을 받고 삼켜버린다.
이후 공중전화부스에서 레제와 만나고 덴지는 꽃을 다시 뱉어서 레제에게 준다. 꽃이 덴지의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므로, 덴지는 자신의 마음을 레제에게 주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햇빛이 덴지와 레제의 얼굴을 비춘다. 덴지와 레제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이 장면 이후로 꽃은 ‘덴지의 인간성’에서 ‘덴지와 레제의 사랑’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레제는 꽃을 꽃병에 담아 소중하게 보관한다. 하지만 학교 데이트를 하러 가기 전 꽃잎이 떨어지는 장면을 보여주어 이 둘의 관계가 순탄치 않을 것을 예고한다.
레제는 기차에 오르기 직전, 손에 들린 꽃을 바라본다. 그리고 도망을 포기하고 카페로 되돌아간다. 되돌아가면 마키마에게 죽을 것을 알면서도, 덴지의 사랑을 떠올리고 덴지에게 향한 것이다.
레제의 꽃은 덴지에게 전해지지 못한다. 레제는 마키마와 천사의 악마에 의해 처단된다. 레제는 피를 흘리고 죽어간다. 햇빛이 저물고 그림자가 레제의 얼굴을 가린다. 덴지와 레제의 첫만남 때 햇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던 것과 대비된다.
덴지는 꽃다발을 들고 레제를 기다리지만,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레제는 오지 않는다. 결국 덴지는 꽃다발을 먹어버린다. 몸속에서 꺼내 레제에게 건넸던 마음을 다시 먹어 치움으로써 덴지와 레제의 사랑이 끝났음을 확실시한다.
원작자 후지모토 타츠키는 체인소 맨 레제편을 두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레제라는 존재가 지워지지 않는 저주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작가의 의도는 성공했다. 인간성을 찾아 방황하는 소년 덴지와, 평범한 삶을 갈구했으나 결코 닿을 수 없었던 소녀 레제의 비극적인 이야기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기꺼이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