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인어』 두 소녀의 핏빛 복수, 사랑

또각 『검은 인어』 리뷰

by 천비단


보름달이 떠오른 밤, 시골 학교로 전학온 소녀는 머리도 식힐 겸 마을의 명물 ‘명월호수’로 산책을 간다.


호수 위로 이어진 목재 다리와 아늑한 불빛을 내뿜는 가로등, 고즈넉하게 자리를 지키는 정자. 밤공기와 풀 냄새가 섞여 복잡하던 머리속을 상쾌하게 씻겨낸다.


갑자기 이슬비가 내린다.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는데, 금방 그치겠지 하며 소녀는 계속 호수를 걷는다. 그러나 점점 비는 거세진다. 어쩔 수 없이 소녀는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한다.


물소리가 난다.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물가에서 첨벙첨벙 소리가 난다. 소녀는 가까이 다가갔다. 새끼 사슴이 물 속에 있다. 시골이어서 그런가, 야생동물이 호수에 빠진 모양이었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휴대폰으로 후레쉬를 켜서 비춘다.


새끼 사슴의 눈망울에 생기가 없다.


새끼 사슴은 피를 흘리며 호수를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새끼 사슴과 함께 있던 것은


낮에 학교에서 만났던 반장이었다.




그녀는 입가에 피를 묻힌 채 새끼 사슴을 껴안고 물어뜯고 있었다.



또각의 <검은 인어>는 네이버 웹툰에서 약 1년 동안 연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눈에 띄는 점은 장르에 있다. 이 작품은 GL, 백합 장르다. 네이버 웹툰은 온갖 장르의 만화가 쏟아지지만, 전체 이용가를 추구하는 플랫폼 특성 상 BL이나 GL 장르는 거의 없다. 네이버웹툰 초창기부터 본 나도 기억에 남는 작품은 <블랙수트> 말고는 없다. 그러나 <검은 인어>는 GL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GL을 세일즈 포인트로 삼았다.




유슬비


이야기는 ‘유슬비’가 시골 학교에 전학오면서 시작한다. 유슬비는 이전 학교에서 학교폭력을 당했다. 이 때문에 타인과 거리를 두며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극도로 회피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 반 친구들은 아름다운 외모의 전학생에게 다가가지만, 쌀쌀하게 밀어내기만 하는 슬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날, 슬비는 밤에 호수를 산책하던 중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것을 발견한다. 수상함을 느끼고 가까이 다가가 살펴봤다. 물속에는 같은 반 친구 ‘김해온’이 인어 같은 모습을 한 채 짐승을 물어뜯어 먹고 있었다. 슬비는 해온의 괴물 같은 모습에 놀란다.


해온은 슬비에게 자신이 ‘세이렌’이라고 설명한다. ‘세이렌’은 노래로 사람을 홀려 잡아먹는 식인 인어다. 하지만 해온은 사람은 먹지 않는다고 한다. 설명을 마친 해온은 ‘세이렌의 노래’를 불러 슬비의 기억을 지우려고 한다. 그러나 슬비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슬비에게 세이렌의 노래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해온은 슬비에게 정체를 들킨다. 해온은 세이렌의 노래가 통하지 않는 슬비 때문에 불안해하면서도, 슬비에게 자기도 모르게 끌린다. 해온은 슬비가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슬비는 해온을 통해 점차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여기까지만 보면 백합향이 살짝 나는 하이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슬비가 당한 학교폭력을 주동했던 ‘강태강’이 나타나고 슬비의 과거가 풀리면서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피폐해진다.


몇 화 동안 슬비가 전 학교에서 당한 학교폭력이 묘사된다. 끝에 이르러 수련회 숙소에서 슬비가 의식을 잃은 틈을 타 강간까지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슬비는 무너져 내린다. 이 장면들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남자인 나조차 보면서 속이 울렁거리는데, 만약 학교폭력이나 성폭행을 당한 적 있다면 PTSD가 도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해온은 벼랑에서 삶을 포기하려는 슬비를 붙잡는다. 슬비의 얘기를 듣고 크게 분노한 해온은 슬비의 복수를 같이 하기로 결심한다. 식인인어인 자신이, 강태강을 비롯한 가해자들을 잡아먹기로 한다. 이렇게 슬비와 해온의 복수극이 시작된다.




슬비는 해온의 도움으로 가해자들에게 복수한다. 뼛조각까지 모두 남김없이 먹어치워 완전범죄를 저질렀다.


소위 말하는 ‘학교폭력 복수물’이 많다. 일진에게 괴롭힘당하던 주인공이 우연한 계기로 힘을 얻어 일진을 털어버리는 사이다 전개가 나오는 작품들. 10대, 20대 젊은층이 주된 플랫폼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사이다물이 많은 이유는 뭘까? 현실에서 학교폭력이 자주 일어나고,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 지친 독자들이 사이다 터트리며 일진에게 시원하게 복수하는 장면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슬비의 복수는 사이다하고는 거리가 멀다. 가해자가 죽어가는 장면을 보며 느껴지는 감정은 통쾌함이 아니다. 드디어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그리고 살인이 들키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이다. 식인을 마치고 피투성이가 된 채 수면 밖으로 나온 해온을 바라보는 슬비의 표정에서 복잡한 감정이 전해진다.


복수물은 복수에서 나오는 통쾌함을 강조하거나, 복수가 끝난 후 허무함을 강조한다. 복수가 통쾌하면 통쾌할수록,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그에 따르는 카타르시스와 공허함도 커진다. 그러나 슬비의 복수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둘 다 아니다. 안도감, 해방감, 불안함, 슬픔, 안타까움. 마음이 저릴 정도로 현실적인 감정이 묘사된다.


작가는 슬비의 복수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슬비와 해온은 경찰에 들킬까봐 불안해하기는 하지만, 살인을 한 것은 후회하지도 않고 죄책감을 갖지도 않는다. 조연의 대사를 통해서도 작가의 관점을 알 수 있다. 학교 친구인 조연은 “너희 방식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니 함부로 비난하지 않겠다.”며, 살인을 눈감아준다. 나는 이 대사가 학교폭력 피해자들에게 이 작품이 건네는 나름의 위로처럼 느껴졌다. 분명 슬비의 복수는 범죄다. 하지만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김해온


또 다른 주인공 김해온은 프랑스인과 한국인 혼혈이자, 세이렌 아버지와 인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세이렌이다. 해온은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슬비에게 이유도 알 수 없이 끌린다. 슬비의 과거를 알게 되고, 해온은 복수를 다짐한다.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식인’까지 무릅쓰며.


해온의 아버지는 세이렌이라는 동족을 혐오했다. 자신의 종족을 저주로 여겼고, 해온을 낳은 것을 후회했다. 그래서 해온을 인간으로 키우려고 했다. 절대 인간에게 정체를 들켜서도 안 되고, 특히 식인은 절대 안 된다고 어린 해온에게 가르쳤다.


해온은 어릴 때부터 세이렌이라는 정체성을 억압받으며 살아왔다. 자신의 본모습은 끔찍한 괴물이라 생각했고, 식인을 절대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해온은 슬비의 복수를 돕기 위해 식인을 한다. 이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직면해야할 위기에 처한다.


겉으로 보기에 해온은 언제나 밝고 명랑하고 활기찬 소녀다. 하지만 해온에게서 내재된 자기혐오감이 보인다. 자신의 정체를 꽁꽁 숨기려하고, 세이렌 폼을 괴물 같다고 하는 둥.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버지에게서 세이렌은 저주고 괴물이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으니 당연한 결과다.


해온은 슬비의 복수를 도우며 식인을 할수록 식인 충동에 시달린다. 슬비를 보며 슬비를 먹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고, 하마터면 손을 댈 뻔한다. 슬비를 위해 세이렌의 정체성을 마주했지만, 급작스럽게 마주한 정체성이 소중한 사람을 위협하게 된다.


해온의 고모는 해온에게 식인 본능은 교육을 받으면 다스릴 수 있다며 자신과 떠나자고 한다. 해온은 사랑하는 이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곁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마주한다. 결국 해온은 슬비 곁을 떠난다. 해온의 성장은 사랑하는 사람과 작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장 소설 GOAT (BL 아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새는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투쟁한다.”라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새는 껍질을 깨어야 한다. 껍질은 새의 세계다. 자신을 둘러싼 익숙한 세계를 깨드려야만 새는 날개를 펼치고 세상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 <검은 인어>는 데미안을 통해서 해석할 수 있다.


슬비와 해온은 산 깊은 곳 버려진 건물을 아지트로 꾸민다. 벽에 사진을 걸고, 소중한 물건을 갖다놓으며 아지트는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나는 이 아지트가 슬비와 해온의 성장을 가로막는 껍질처럼 느껴졌다.


슬비는 끔찍한 폭력을 겪었고, 해온은 정체성을 억압받았다. 두 주인공은 그 상처로 스스로를 껍질 안에 가두었다. 타인을 거부하고, 본능을 외면하며 껍질 안에 안주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퍽 편하다. 상처를 한아름 안고 껍질 안에만 웅크리고 있으면 변하지 않아도 되기에. 슬비와 해온에게 ‘아지트’는 편견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상처를 치유하는 안식처인 동시에, 성장을 가로막고 현실을 회피하는 도피처인 것이다.


하지만 슬비와 해온은 세상으로 나와야만 했다. 가해자들에게 행한 복수는 슬비와 해온이 껍질을 깨는 투쟁이다. 상처입은 피해자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복수자가 되면서 슬비와 해온의 힘겨운 날갯짓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투쟁은 슬비와 해온을 가두던 껍질을 깨뜨린다. 결말에 아지트가 불타는 것이 껍질의 파괴를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준다. 껍질의 파괴가 폭력적이고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껍질의 파괴는 새로운 탄생으로 이어진다.


불타버린 아지트를 뒤로 하고 슬비와 해온은 서로를 안으며 바다로 뛰어든다. 힘겹게 마주한 세상은 결코 순탄치 않다. 바다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은 뛰어들었다. 슬비가 죽음을 결심했던 곳으로, 해온의 태생이 속한 고향으로.


바다는 슬비와 해온을 감싸안는다. 이는 이 작품이 상처입은 두 소녀가 서로를 구원하여 세상으로 나아가는 ‘구원’과 ‘탄생’의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모든 사건을 겪은 두 소녀는 자기혐오에 빠진 피해자가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체적인 존재로 재탄생했다. 새는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날아간다.




이 작품은 상처입은 두 소녀의 성장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GL이란 장르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도 잘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니 한번쯤 보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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