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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Nov 28. 2021

싱글벙글 설거지론

설거지론 심층분석

0. 들어가기에 앞서


누군가는 ‘설거지론’을 매우 불쾌하게 여겨서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거부한다. 어느 사회학 교수는 기자가 ‘설거지론’에 대해 의견을 여쭙자 그런 한심한 것 따위에 할 말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논의를 회피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설거지론’이 불쾌하고 악랄한 주장은 맞지만, 대한민국을 강타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설거지론’을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설거지론’을 나름대로 분석한 글이다. 최대한 중립적으로 쓰고자 노력했다. 그럼 시작하겠다.




1. 설거지론이란 무엇인가


구글 트렌드에 '설거지' 검색 빈도를 찾아본 결과. 10월 말에 급격하게 검색율이 증가했다.


‘설거지론’은 약 한 달 전 디씨와 같은 남초 커뮤니티 사이트를 중심으로 퍼진 주장이다. 설거지론을 요약하면 ‘여자는 젊은 시절 잘생긴 남자와 연애와 섹스를 즐기고, 결혼은 외모와 연애경험은 떨어지나 돈과 능력은 있는 남자와 한다. 그리고 그 남자는 돈을 여자에게 가져다 바치며 서로 사랑한다고 믿는다’이다. 여기서 젊은 시절 문란하게 논 여자를 ‘설거지거리’로, 그 여자와 결혼하여 돈을 갖다 바치는 남자를 ‘남이 만든 설거지거리를 설거지한다’라고 비유한 것이다. ‘설거지’에 착안해서 남자를 ‘퐁퐁남’ 혹은 ‘퐁퐁단’이라고 부르고, 여자를 ‘퐁퐁부인’이라고 부른다.


설거지론은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든 걸까? 간단하다. 디씨에서 만들어진 밈 아닌가? 디씨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유행은 조롱을 위해 탄생한다. 마치 탈모 드립이 탈모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드립인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설거지론은 퐁퐁부인과 퐁퐁남을 ‘조롱하고 비꼬기 위해’ 탄생했다. 결혼과 거리가 멀고, 결혼할 능력도 부족한 ‘20대 남성들’이 퐁퐁부인과 그 퐁퐁부인에게 노예처럼 착취당하는 퐁퐁남을 놀리기 위한 드립이 초창기의 설거지론이었다.


"하 X발 퐁퐁이형!"


그런데 이 설거지론이 다른 사이트—유부남이 많은 사이트 등—로 퍼지다 보니 설거지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과몰입하는 사람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모든 결혼은 설거지다!’ 라거나 ‘유부녀는 모두 남자 돈만 보고 결혼한 퐁퐁 부인이다!’라고 하는 주장이 생기면서 지금 이 꼴이 되었다.




2. 설거지론이 유독 파괴적인 이유


사실 설거지론 이전에도 유부남을 깎아내리는 단어는 존재했다. 아내에게 용돈을 받는 남성이 아내를 ‘내무부장관’이라고 부르거나, 돈을 벌어오는 남자를 ‘ATM’이라고 부르거나. 지금의 설거지론과 비슷한 뉘앙스이다. 그런데 왜 유독 설거지론만 이렇게나 불쾌하게 느껴지는 걸까?


‘내무부장관’, ‘ATM’은 자조적인 성격이 강하다. 유부남들이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면서 유쾌하게 내뱉는 단어이다. 그 이면에는 이런 생각이 존재한다. ‘비록 나는 아내에게 돈을 벌어다 주는 ATM일지 몰라도, 아내와 나는 사랑해서 결혼했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거야.’


흔한 유부남들의 중고거래.jpg


설거지론은 이 행복 회로를 박살 낸다. ‘내무부장관’이나 ‘ATM’은 ‘나와 아내는 서로 사랑한다’라는 명제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설거지론은 ‘네 아내는 젊었을 때 잘생긴 남자랑 방탕하게 놀았어. 지금 네 아내는 네 돈을 사랑하지, 너는 사랑하지 않아’라면서 머리를 후려친다. ‘아내의 전남친’을 논리에 끌어들이면서 아내와의 사랑을 부정한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두 번째 이유는 설거지론은 사람들에게 의심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설거지론은 ‘남자의 돈을 노리고 결혼한 여자와 그 여자와 서로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돈을 갖다 바치는 남자’를 타겟으로 삼는다. 이런 케이스는 아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설거지론을 접한 유부남, 유부녀는 자신이 한 결혼도 설거지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정말 사랑해서 한 결혼인지, 조건을 보고 비즈니스로 한 결혼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증명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사랑’을 부정함으로써, 설거지론은 정말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들까지도 자신의 결혼생활을 의심하게 만들고, 내 결혼이 설거지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심는다. 이 점이 설거지론이 불쾌하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다.




3. 설거지론의 의의


설거지론은 ‘사랑’을 부정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결혼을 의심하게 하는 불쾌한 주장이다. 이렇게 불쾌하기 짝이 없는 주장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3가지 의의를 찾아냈다.


3-1. 설거지론은 여성혐오 색채가 강한 남성 중심의 비혼주의 운동이다


설거지론은 남성 중심의 비혼주의 운동—아직 ‘운동’이라고 부르기에는 집단적이지도 않고, 인터넷 세계에 국한되지만 그냥 편하게 운동이라고 하자—이다. 설거지론은 ‘결혼’을 남성이 여성에게 착취당하는 관계로 인식한다. 때문에 결혼을 부정적으로 보고, 남성에게 ‘결혼’을 하지 말라고 설파한다.


결혼하지마 강화판인 듯


설거지론이 여성혐오 색채가 강한 이유는 ‘퐁퐁부인’이라는 악역을 선정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설거지론은 ‘퐁퐁부인’과 ‘퐁퐁남’ 둘 다 까기는 하지만, 포커스는 ‘퐁퐁부인’에 더 맞춰져 있다. 설거지론은 퐁퐁부인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남성은 자신의 아내가 퐁퐁부인이 아닐까 의심하고, 여성은 자신이 퐁퐁부인이 아님을 증명하길 요구받는다. 마치 과거에 여성이 ‘김치녀’가 아니라 ‘개념녀’임을 증명해야 했던 것처럼,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안전한 사람임을 증명해야 했던 것처럼.


'잠재적 가해자'에 관한 얘기는 나중에 레디컬 페미니즘을 다룰 기회가 있다면 하겠다


또한 설거지론은 젊은 여자가 많은 남자와 연애하고 섹스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 이는 ‘젊은 여자는 연애와 섹스를 많이 하면 안 돼’라는, 여자에게 정조를 강요하는 뉘앙스를 내포한다. 따라서 설거지론은 여성혐오이다.


여담으로, 설거지론에서 보이는 남성 중심의 비혼주의 운동의 양상은 수년 전 페미니즘 쪽의 비혼주의 운동과 매우 닮았다. 페미니스트들은 결혼을 ‘남성이 여성을 돈으로 구매하고, 가사노동, 육아노동을 부여하여 착취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비혼주의 운동을 펼쳤다. 페미니즘의 비혼주의와 설거지론의 비혼주의는 모두 ‘결혼은 나쁜 것이고, 그 원인은 남성/여성에게 있다’라는 똑같은 논리를 가지고 있다. 문제의 원인을 서로가 서로라고 말하기에 둘이 친해질 일은 절대 없겠지만 말이다.



3-2. 설거지론은 자유주의적 연애와 가부장적 결혼의 충돌이다


흔히 결혼을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평생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유연애주의적 발상이다. 과거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은 ‘사랑’보다는 ‘비즈니스’에 가까웠다. 사랑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남성은 여성에게 돈과 안정적인 생활을 제공하고, 여성은 남성에게 성(sex)과 자식과 내조를 제공한다. 이러한 계약 관계가 인간이 오랫동안 해온 결혼이다. 가부장적 가정에서는 경제력을 지닌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


가부장적 결혼을 타파하고 지금의 자유연애 시대를 이끌어온 집단이 있었으니, 바로 1900년대 중반의 페미니스트들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구조인 결혼을 문제 삼아 일어났고, 그 결과 오늘날 자유연애주의가 도래하였다.


하지만 조금만 솔직해지자. 결혼이 정말 사랑하기만 하면 하는 것인가? 결혼하려면 따져야 하는 게 얼마나 많나. 돈, 직장, 집, 자녀계획, 집안일 분담 등등등…. 사랑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을까? 천만에, 결혼은 현실이다.


한때 논란이었던 노트


분명 자유연애주의는 연애와 결혼을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결혼은 사랑은 2순위고, 현실적인 조건을 따지는 게 일반적이다. ‘남자는 능력이다’ ‘여자는 외모가 무기다’ ‘성적이 오르면 배우자의 얼굴이/직업이 달라진다’라는 명언이 판치는 나라다. 한국은 현재 자유주의적 연애와 가부장적 결혼이 혼재된 상태다. 우리는 자유연애주의를 표방하여 연애는 자유롭게 하지만, 결혼을 할 때는 자유연애주의를 내팽개치고 가부장제를 찾는다.


하지만 인간은 영악한 동물이다. 가부장적 결혼을 했음에도, 자유주의적 결혼을 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왜? 가부장적 결혼은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착각한다. 나와 내 배우자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거지, 서로의 돈을 보고 결혼한 게 아니라고. 사랑은 측정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착각에 빠지기 더더욱 쉽다.


가부장적 결혼을 자유주의적 결혼으로 둔갑하면 뭐가 좋을까? 남성은 비참해지지 않을 수 있다. ‘내 아내는 내가 능력이 뛰어나서 날 사랑하는 거야’라고 기분 좋게 착각할 수 있다. 사실 아내는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뛰어난 능력을 사랑하는 것에 더 가까울 텐데 말이다. 여성은 계약의무를 피할 수 있다. 가부장적 결혼에서는 여성에게 섹스, 육아, 가사노동의 의무가 주어진다. 자유주의적 결혼은 당연히 이딴 의무 없다. 자신의 결혼을 자유주의적 결혼이라고 속이면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된다. 그렇기에 남성과 여성 모두 ‘우리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다’라고 현실을 회피한다.


결혼이 섹스를 위해 하는 건 아니지만, 섹스가 귀찮아 죽겠는 지경까지 온 사이에 사랑이 존재할까?


설거지론은 이 점을 후벼 판다. 비즈니스 결혼을 했으면서 그렇지 않다고 착각하는 퐁퐁남과 퐁퐁부인을 겨냥한다. 네 아내는 못생긴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너는 네 남편의 돈에 너 자신을 판 속물이라고 조롱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애써 현실 회피하던 그들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좋게 보면 일종의 현실 고발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3-3. 설거지론은 젠더갈등의 민낯을 일반인에게 알렸다


앞서 말했듯 설거지론을 좋게 보자면 자유주의 결혼을 했다고 착각하는 부부가 많은 한국의 현실을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최대한 좋게 포장한 것이다. 설거지론은 남초 커뮤니티 특유의 여성혐오 시각으로 무장하여 그것을 접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젠더 갈등이 매우 심하다. 그러나 젠더 갈등을 실감했던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젠더 갈등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극히 일부의 인간들만이 참여하는 전쟁이었다. 한국은 정치나 사회 문제 같은 민감한 얘기는 현실에서 잘 하지 않는 관습이 있다. 그래서 커뮤니티를 하지 않는 일반인은 한국의 젠더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없다. 젠더 갈등은 인터넷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딴 세상 얘기였다.


'오조오억'이 남혐인 거 아는 사람? 여초에서 자주 쓰는 단어라고 남혐이랜다 ㅋㅋㅋㅋㅋ 지랄


설거지론은 젠더 갈등의 현 위치를 보여주었다. 설거지론의 미친 파급력은 젠더 갈등을 인터넷을 넘어 현실에 퍼뜨렸다. 설거지론에 담겨 있는 여성혐오가 가감 없이 공개되었다. 불편하다고, 불쾌하다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부정해왔던 젠더 갈등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설거지론에 거부감과 불쾌감을 느낀 이유는 혐오에 면역이 없는 일반인이 설거지론의 응축된 혐오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4. 설거지론 이후 한국은 어떻게 변할까


설거지론은 인터넷 세계를 넘어 현실 세계까지 난리 나게 한 주장이었다. 설거지론을 접한 한국은 변할 것이다. 어떻게 변하게 될까?


일단 결혼율이 떨어질 것이다. 설거지론이 퍼뜨린 결혼에 대한 의심과 공포로 인해 사람들은 결혼에 부정적이고, 신중해질 것이다. 여성이 남성의 능력을 보고 결혼하는 승혼이 줄어들 것이다.  안 그래도 출생률이 0명 대로 떨어졌는데, 한국 멸망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떡-락


설거지론이 가부장제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가부장제가 강화될 수 있다. 결혼에 대한 공포가 심해지면 여성들이 연애와 결혼에 있어 더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반대로 가부장제가 약화될 수도 있다. 결혼에 거부감과 허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면 결혼하는 사람은 줄어들고 동거 위주의 자유연애주의 생활이 보편화될 것이다.


젠더 갈등은 어떻게 될까? 아마 젠더 갈등은 앞으로도 그들만의 리그에서 신명 나게 싸울 것이다. 설거지론이 현실 세계에 젠더 갈등을 알렸다 한들, 사람들이 갑자기 카페에서 젠더 갈등에 대해 토론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늘 그래 왔던 사람만 남초, 여초 사이트에 접속해서 똥글이나 싸지르며 이성에 대한 분노를 배설할 것이다. 젠더 갈등이 본격적으로 논의에 오르는 시점은 인터넷이 아닌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계기가 된 이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 사건이 몇 년 안에 일어날 거라고 확신한다. 사람 한둘쯤 죽는 큰 사건이…




5. 마치며


설거지론은 여성혐오적이고, 충격적이고, 파괴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분석해보면 결혼 생활의 모순점을 고발하는 의외의 모습이 있었다. 이 설거지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내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안 그래도 혐오와 갈등이 심한데, 설거지론이 더 큰 갈등으로 커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논의하고, 사회를 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갔으면 한다. 아니면 걍 기억에 묻혀 사라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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