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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Feb 01. 2023

낙방여행 | 오키나와 여행기 (2)

후회와 불안

잠에서 깨어나니 콧속이 심각하게 건조했다. 밤새 에어컨을 제습 모드로 틀어둔 탓이었다. 3시간 정도 잤다. 버스투어를 가려면 일찍 나가야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제 편의점에서 사 온 오므라이스를 들고 1층으로 갔다. 일본 전자레인지는 전력을 선택할 수 있었다. 600W로 맞춘 뒤 3분 정도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오므라이스를 꺼냈다. 편의점 음식 치고는 먹을 만했다.


 호텔에서 나와 길을 걸었다. 도로는 한가했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보였다. 정장 차림으로 느긋하게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하나 같이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가만 보면 일본인은 여유가 넘친다. 걸음걸이도 느리고, 양보도 잘하고. 무엇보다 표정과 행동에서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서 자라온 나로서는 조금 답답한 감이 있지만.


 커다란 육교를 건너고, 나하 시청 앞에서 길을 건너 류보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이미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잠시 기다리니 투어 가이드가 우리에게 다가와 비닐팩을 줬다. 웬 90년대 휴대용 라디오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이어폰을 끼면 한국어로 관광지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기계였다. 설명이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이어폰을 끼는 게 귀찮아서 안 썼다.


 버스 안은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가 혼재했다. 외국인만 오는 투어인 줄 알았는데, 일본인들도 많이 왔다. 아주머니들이 오키나와에 여행을 온 모양이었다. 가이드는 일본어만 할 줄 알았다. 덕분에 처음에는 가이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껏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잠이나 잤다.



 첫 번째 목적지는 추라우미 수족관이다. 날씨가 화창했다. 수족관 입구까지 걸어갔다. 맨 앞에서 가이드가 파란색 깃발을 들고 앞장섰다. 그 뒤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주르륵 따라가는 게 마치 초등학생 때 현장학습이 생각났다. 어릴 때는 현장학습이란 명목으로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요플레를 챙겨갔다가 가방 속에서 터져서 난리가 난 적도 있었고, 놀러 가기 직전에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한 채로 계곡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몇 년이 지나면 기억도 나지 않을 텐데 어린애들을 데리고 대공원이나 박물관 같은 곳을 가는 게 의미가 있나 싶다. 내게도 단편적인 기억만 드문드문 남은 게 전부인데. 아니면 그 단편적인 기억이라도 남기기 위해서 현장학습을 가는 건가. 어쩌면 현재란 과거의 단편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것이니.


 인간은 과거를 비디오로 기억하지 않는다. 몇 장의 하이라이트를 찍은 이미지로 기억한다. 그 몇 장의 사진을 남기기 위해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좋은 곳에 데려가고, 좋은 것만 보여주려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단편적인 기억 몇 장이라도 남는 게 어디냐. 그렇다면 현장학습도 나름 의미 있는 활동이다,라는 결론에 이를 때쯤에 짱구 유치원복을 입은 꼬마들이 옆을 지나갔다. 현장학습을 온 모양이다.


 수족관은 별 거 없었다. 예전에 후쿠오카에서 갔던 수족관보다 작았다. 무엇보다 펭귄이 없다. 수족관은 펭귄을 보러 가는 거 아니었나? 어떻게 펭귄이 없지? 대신 상어보다 큰 가오리만 흐느적댔다. 거대가오리가 오키나와의 명물이라고 하는데, 가오리는 못생겼잖아. 지금 보니 추라우미 수족관 로고도 가오리 모양이다. 실망이 컸다.


가오리가 사람보다 크다


 수족관 출구로 나오니 바다거북관, 매너티관, 돌고래관이 있었다. 바다거북관은 아무것도 없는 풀장에 바다거북 풀어놓은 게 끝이었다. 매너티관에서는 매너티가 똥 싸는 걸 직관했다…. 돌고래관은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매너티관 옆 계단을 내려가면 추라우미 해변이 나온다. 물이 굉장히 깨끗했다. 사람들이 해변가에 모여 있었다. 나는 바다에는 큰 관심 없었다. 대신 바위를 자세하게 관찰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게 화산암 같았지만, 제주도의 현무암과 달리 색깔이 하얬다. 바위틈 아래에는 바위가 떨어져 나온 듯한 자갈과 누군가 버린 쓰레기가 있었다. 대체 저런 깊숙한 곳에 쓰레기를 어떻게 버린 건지 궁금해서 허리를 숙여 보는데, 웬 아저씨가 ‘저 한국인은 뭐 하는 놈이지’라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지나갔다.


추라우미 해변


 점심은 뷔페에서 먹었다. 신기한 게 해산물 음식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길거리에서도 초밥집을 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오키나와는 해산물이 유명하지는 않나 보다. 음식은 맛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자색고구마 아이스크림이었다. 오키나와는 자색고구마가 유명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고구마로 아이스크림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내가 피자는 고구마피자만 먹는 인간이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그래도 먹을 만했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햇빛이 무섭게 내리쬐는 가운데, 조그만한 어른과 더 조그만한 아이들이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이상의 오감도가 생각났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 몇 개월 전에 이상 전집을 읽다가 때려쳤었다. 오감도(烏瞰圖)는 한자 그대로 하늘을 나는 까마귀의 시점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본 것을 풀어쓴 작품이다. 멀리 떨어져 보면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작은 아이들이 도로를 쏘다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나는 무엇을 그렇게 무서워했나.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햇빛이 뜨거워 블라인드를 내렸다.


 집합 시간이 1시 50분이었는데, 식사를 끝내니 10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덕분에 햇빛이 쨍쨍한 가운데 전력으로 달렸다. 1분 남기고 버스에 도착했다. 투어여행은 처음이었는데, 다시는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행까지 와서 시간에 쫓기는 건 질색이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들었다. 일본에 왔으니 일본 노래를 들어야지 하며 요네즈 켄시, 요루시카, 아도 노래를 들었다.


 창밖을 보니 열대 식물이 간간이 보이는 것만 빼면 한국 시골이랑 판박이었다. 멍하니 시간을 보내니 엄청난 길이의 대교로 들어섰다. 야가지 섬과 코우리 섬을 잇는 코우리 대교였다. 어떻게 바다 위에 이렇게 긴 다리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 인간은 어떤 수를 써서든 이 세상 모든 곳에 도달하려고 한다. 남극에 깃발을 꽂는 데 그치지 않고 달까지 가서 깃발을 꽂지 않았는가. 로켓을 만드는 일에 비하면 바다에 다리를 세우는 건 쉬운 일이려나. 아니, 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 겪어보지도 않은 일을 내 멋대로 쉽고 어렵고를 판단하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이런 생각은 그만둬야지.



 다음 목적지는 코우리해변이었다. 구경 시간은 15분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겨우 15분 보려고 이 먼 곳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 게 말이 되나. 해변을 보는 시간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훨씬 길었다. 버스투어가 원래 이런 건가? 다시는 버스투어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한층 더 단단해졌다. 사진 몇 장만 찍고 버스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카시고텐이라는 곳이었다. 자색고구마 상품을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라고 한다. 살 게 있나 둘러봤지만 맘에 드는 건 없었다. 가이드에게 받은 쿠폰이나 써야겠다 싶어 작은 과자만 샀다. 카운터에 쿠폰을 주니 엿 같은 걸 줬다. 겨우 이거 받으려고 돈을 썼나? 왠지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목적지는 만좌모 절벽이었다. 코끼리 모양의 절벽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때 이미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불만이 최고조에 다다랐다. 코끼리처럼 안 생겼으면 두고 봐라 하며 벼르고 있었는데, 역시나. 코끼리를 한 번도 못 본 사람이 이름을 붙인 게 분명했다. 그 우스꽝스러운 절벽을 배경으로 화기애애하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니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대체 여기 난 왜 있는 거지. 진짜 버스투어 다시는 안 한다.


명란젓 자판기. 쌀밥은 안 파는 잔인한 녀석


 드디어 마지막 목적지. 아메리칸 빌리지. 과거에 오키나와에 미국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 사람들이 모여서 산 곳인 것 같았다. 기념품이나 사려고 돌아다녔는데, 죄다 오리온 맥주 로고 티셔츠, 스팸 티셔츠만 팔고 있었다. 이 가게나 저 가게나 비슷, 아니 똑같았다.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결국 아이스크림만 먹기로 했다. 블루실은 오키나와의 베스킨라빈스 같은 가게라고 한다. 여기도 자색고구마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콘아이스크림을 받고 야외 테라스에 자리 잡았다. 해가 저물고 바람이 부니 쌀쌀했다.


 7시가 되어서야 나하에 돌아왔다. 구글맵 타임라인을 확인하니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오키나와의 절반을 돌아다녔다. 굉장히 피곤했다. 저녁은 이자카야에서 먹기로 했다. 나하 버스터미널에 서서 구글맵을 이리저리 뒤지다가 괜찮은 곳을 발견했다. 가게에 들어서니 이미 자리가 꽤 차 있었다. 어두운 오렌지색 조명, 난잡한 장식,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술병, 시끌벅적한 직장인들까지. ‘일본 술집’ 그 자체였다. 분위기가 퍽 맘에 들었다. 메뉴판을 읽어보니 여긴 이자카야가 아니라 로바타야끼였다. 로바타야끼는 요리사가 손님들 앞에서 고기를 숯불에 구워주는 식당이었다. 요리사분이 장인 느낌을 풍겼다. 머리는 대머리에,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숯불 위에 오징어를 덥썩 놓고 굽는다.



 닭꼬치에 빙어구이, 닭날개구이, 샐러드, 서비스로 나온 가자미 구이까지. 가자미구이가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나는 가자미가 이렇게나 부드럽고 기름진 생선이란 사실을 몰랐다. 장어구이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좋은 음식과 적당한 소음, 시원한 콜라까지. 로바타야끼는 오키나와에서 간 식당 중에 최고였다.


 과거에 대한 생각은 후회라 하고, 미래에 대한 생각은 불안이라 한다. 나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후회와 불안에 시달려왔나. 시험에 떨어지고나서 내 머리를 잠식해오는 녀석들을 애써 무시해왔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럴 때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후회하고 불안한 게 뭐 어쩌라고. 지금 내 앞에 개쩌는 닭날개 구이와 콜라가 있는데.


 옆자리 직장인들을 구경했다. 검은 정장을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일본어로 뭐라 떠들면서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부족한 일본어 실력으로는 대화 내용을 유추조차 할 수 없었다.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저 사람들도 저마다의 고민이 있겠지. 세상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고민거리가 있겠지만 맛있는 걸 먹으며, 사람과 소통하며, 술을 들이키며 웃어넘기는 거겠지. 나는 이 사실이 참 소중했다. 계산을 마치고 거리에 나왔다. 여전히 무더움은 가시지 않았다. 오키나와에서의 두 번째 하루가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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