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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Feb 02. 2023

낙방여행 | 오키나와 여행기 (3)

더 깊은 곳으로


 알람 소리에 깼다. 블라인드 너머로 시원찮은 햇빛이 새어 나왔다. 대충 씻은 뒤 야끼소바 컵라면을 먹었다. 첫날에 먹은 유부우동으로 인해 컵라면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내려간 상황이었다. 맛은 그럭저럭이었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기 위해 일찍이 기대를 접는 건 슬픈 일 아닌가. 나는 언제 이렇게나 슬픈 인간이 되어버렸지.


 오전 일정으로 잠수함을 타고 해저를 관찰하는 프로그램을 예약했다. 어제 수족관에서 인공적으로 꾸민 바다를 보았으니, 오늘은 자연 그대로인 바다를 구경하러 가는 것이었다. 10분 정도 걸어 선착장에 도착했다. 직원을 따라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배 한 척이 떠 있었다. 잠수함이 아니라 배를 타는 건가. 배를 마지막으로 타 본 게 언제였지, 하며 배에 올랐다. 배에 오르자마자 자판기가 떡하니 있었다. 일본인들은 자판기에 미친 게 분명하다. 어떻게 이 작은 배에도 자판기를 둘 생각을 했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출발했다. 녹색이 끼어 있던 물이 점점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배 왼편에 나하 공항이 보였다. 장난감 같은 비행기가 돌아다녔다. 바다에 나오니 배가 흔들리고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머리가 휘날리고 선박에 부딪힌 바닷물이 들이닥쳤다. 사진 몇 장 찍고 몸을 피했다.



 몇 분 후 지하실 문이 열렸다. 지하실로 내려가 구석에 쭈그려 앉았다. 유리창을 통해 바닷속을 볼 수 있었다. 멍청하게 생긴 물고기들이 갑판에서 뿌리는 떡밥을 먹으러 유리창에 접근했다. 저 물고기는 대체 이름이 뭐지. 유리창 위쪽에 물고기 설명이 사진과 함께 쓰여 있었지만 죄다 일본어였다. 물고기의 이름은 모른 채로 남겨두기로 했다.


 이름 모를 물고기보다 바다의 바닥에 더 관심 있었다. 바다의 바닥. 운율도 딱 떨어진다. 탁한 바닷빛 너머 바위에 마치 버섯 같은 게 다닥다닥 붙어 있다. 더 깊은 곳은 없을까. 일본은 지진이 흔하니 해구도 있지 않을까.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내 짧은 식견으로는 해구를 찾을 순 없었다.


 무심코 저 깊은 바다에 빠지고 싶었다. 이곳이 지금 나와 어울리는 위치 아닌가. 높게 오르지 못할 바엔 깊은 곳으로, 더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게 차라리 낫다. 내 사인을 선택할 수 있다면 꼭 바다 속에서 익사를 선택하리라. 폐에 물이 차더라도 나를 짓누르는 수압을 헤쳐나가 바다의 바닥에 닿겠노라. 그렇게 죽겠노라.


 옆에서 어린아이가 물고기를 보고 신기한 듯 소리쳤다. 어린애 옆에서 죽음을 생각하다니. 뭔가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를 한 것 같아 생각을 그만두었다.




 1시간 정도 지나서야 배에서 내렸다. 다음 행선지는 슈리성이었다. 유이레일을 타고 슈리역으로 이동했다. 서쪽 출구로 나오자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걸어가고 있었다. 저 사람들을 따라가면 슈리성이겠다, 구글맵도 안 보고 무작정 무리를 따라 걸었다.


 동쪽 입구에 도착했다. 표지판을 보니 외곽 성벽을 빙 둘러가는 코스로 가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열심히 걸었다. 산책과 등산 그 사이 어딘가의 운동이었다. 가디건을 입으면 덥고, 벗으면 다시 입고 싶은 날씨였다. 걷다 보니 땀이 날 정도로 더워져 가디건은 가방 속에 처박았다. 20분쯤 걷자 슈리문이 보였다. 절에 가면 흔히 보이는 문 같았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문을 짓는 방식은 비슷했나 보다. 공사 중인지 모포 같은 게 둘러져 있어 멋은 없었다. 슈리문 아래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재 무리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저렇게 멋없는 상태인데도 사진을 찍고 싶을까. 가만 보면 사람들은 멋진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보다, 이런 곳에 내가 왔었다는 인증과 자랑의 목적 때문에 사진을 찍는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렵다.


 안내소에서 얻은 팜플렛에 그려진 길대로 걷자 매표소가 나타났다. 표를 구매한 뒤 커다란 문을 지났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공사장에 있을 법한 가림막…? 알고 보니 슈리성이 예전에 불타서 재건 중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오다니…. 괜히 돈을 날린 건 아닌가.


 공사 중인 정전을 끼고돌아 동쪽 전망대까지 걸어갔다. 전망대에서 오키나와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멀리 보이는 초등학교, 중학교, 오르막길, 바다, 그리고 하늘. 진한 파랑색 물감을 수평으로 그은 듯한 바다 위로 그보다는 옅은 색의 하늘이 넓게 흐드러졌다. 그래, 슈리성이 불타서 뭐 어쩌랴. 좋은 풍경 봤으면 됐지. 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이러다 멀리 날아가는 건 아닐까. 차라리 그랬으면 했다.



 돌아오는 길에 매표소 옆에 있던 건물에 갔다. 다과 체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500엔을 내면 류큐 왕국 시대의 차와 과자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다다미 상에 앉아 인테리어를 구경하던 차에 직원이 쟁반을 들고 왔다. 다다미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경험은 꽤나 괜찮았다.


 안내소 뒤편으로 돌아왔다. 근처 초등학교에서 온 듯한 아이들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현장학습으로는 알맞지 않은 곳 같은데. 바로 옆 기념품 가게에는 어제 질리게 본 스팸 티셔츠, 오리온 티셔츠가 가득했다. 한 가게 입구에 고양이가 떡하니 식빵을 굽고 있었다. 손님이 왔는데도 아는 척도 안 하다니. 서비스 정신이 꽝이구만.


 서쪽 출구로 나가 내리막길을 따라 걸었다. 오키나와 소바를 먹으러 가는 길. 오키나와 소바는 일반적인 소바와 다르게 메밀로 만들지 않는다. 일반적인 국수를 소바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골목길로 들어가 숨어 있던 가게를 찾았다. 갈비 소바와 오키나와 두부를 시켰다. 오키나와 두부는 두부라는 말을 안 듣고 먹으면 절대 두부라는 걸 모를 것 같았다. 두부보다는 찹쌀떡에 가까웠다.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떠서 입에 넣으면 쫀득한 식감에 놀라고, 두부와 땅콩의 고소함이 입안을 감쌌다. 갈비는 한국의 갈비찜이랑 비슷했다. 고기가 뼈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길을 건너 돌계단을 내려갔다. 긴조정 돌담길. ‘괜찮아 사랑이야’라는 드라마를 촬영했던 장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길이 굉장히 험했다. 정신 팔면 그대로 넘어져 굴러 떨어질 게 확실했다. 방심하다가 발목이 뒤틀려 삘 뻔했다.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이곳에 대체 사람이 어떻게 사는 걸까. 가정집에 주차된 자동차를 보고 놀랐다. 여기까지 차를 몰고 다니면 자연스레 운전 실력이 늘겠다 싶었다.



 돌담길을 모두 내려왔다. 한가한 시골 마을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양쪽으로 자동차가 느릿하게 지나쳤다. 국제거리로 가기 위해 구글맵을 켰다.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이… 돌담길을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가야 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가뜩이나 가야 할 길이 오르막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면. 그래도 가야만 했다. 밑바닥까지 내려왔으니, 다시 올라가야 한다. 아무리 깊은 곳에 떨어졌다 해도 올라갈 길은 있다. 걷기만 하면 된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숨을 몰아 쉬었다. 소바집에서 나와서 지금까지 거의 1시간을 내리 걸었다. 10분 정도 지나자 버스가 왔다. 탑승권을 뽑고, 동전을 준비했다. 동전을 내고 버스를 타는 게 얼마만인지. 한국에서는 초등학생 때가 마지막인 것 같다. 그때는 버스요금이 500원이었다. 아침에 저금통에서 500원짜리 동전 하나 꺼내 손에 꼭 쥐고 학교 가는 버스에 탔다. 나이를 먹으면서 버스 요금은 1450원으로 올랐다. 요금은 올랐지만 나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해가지만 나는 제자리다. 너무 커버린 지금, 나는 동전 한 닢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던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나. 아니면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는 건가.


 국제거리는 명동 같았다. 돈키호테에 갔다. 무려 7층짜리 건물이었다. 쇼핑을 거의 2시간 했다. 라면 코너에 한국 라면이 가득한 게 신기했다. 불닭볶음면을 일본에 와서 보게 될 줄이야. 한국 라면이 일본에서도 먹히나?



 택시를 타고 숙소에 돌아왔다. 숙소에 도착하자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저녁은 근처 가게에서 음식을 사 와 먹기로 했다. 가라아게와 야끼소바, 곱창볶음까지. 서울 카페마냥 좁은 테이블 위에 어거지로 다 올렸다. 맛있었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인간을 안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맘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시험에 떨어진 패배자. 재수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공부를 어디서 하지, 학원에 등록해야 하나, 청주로 돌아가야 할까. 갖가지 고민이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이내 곧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런 걸 고민하는 게 무슨 대수냐. 지금은 오키나와의 마지막 밤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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