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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Jan 31. 2023

낙방여행 | 오키나와 여행기 (1)

실패자로서 떠나다


임용고시가 얼마 남지 않은 11월이었다. 누나한테 연락이 왔다. 일본에 가지 않겠냐고. 아무 생각 없이 수락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여행 날짜가 임용고시 2차 시험일이랑 겹쳤다. 1차 시험에 붙으면 못 가고, 떨어지면 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임용고시 1차에 떨어졌고, 비행기 예매를 취소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비행기를 싫어한다. 어째선지 비행기를 타기만 하면 두통이 심하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야 하는 여행은 싫어한다. 그런 내가 일본 여행을 아무 고민 없이 수락한 건 무슨 바람일까. 어쩌면 시골에 처박혀 시험 준비나 하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건지 모른다. 언젠가부터 꿈은 희미해졌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 시험에 떨어졌다. 택도 없는 점수였다. 이 점수가 내 지난 4년의 결과였다.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본가로 돌아왔다.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는 거실 바닥에 누웠다. 4년 전과 변함없는 집이었다. 그런데 나는 영락없는 실패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실패를 머금은 채 오키나와로 떠났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왔다. 패딩을 입자니 살짝 더웠다. 택시를 타고 공항버스 정류장에 오니 버스정류장에 흔히 보이는 간이대기실이 있었다. 분명 예전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생긴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외국인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힐끗 보더니 이내 관심을 끄고 얘기를 이어갔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구석에 서서 웹툰을 봤다.


9시 30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공항은 그 몹집에 비해 사람은 얼마 없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그 큰 곳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끔찍하게 더웠다. 공항에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예약한 와이파이포켓이 신용카드가 없어서 받지 못하거나, 탑승구가 하루 사이에 바뀌어 탑승동을 잘못 간 것 말고는 말이다. 비행기 좌석에 앉아 창문을 보니 이미 해가 밝은 지 오래였다.



 3시 20분, 나하 공항에 도착했다. 두통은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다. 나하는 비라도 내렸는지 꿉꿉하지만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유이레일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유이레일은 오키나와의 주된 교통수단이다. 오키나와는 여러모로 교통이 불편한 편이라고 한다. 지하철은 아예 없고, 대신 도시를 가로지르는 유이레일을 자주 사용한다. 유이레일은 가끔 애니 캐릭터로 도배된 차가 보인다는 점만 빼면 의정부 경전철이랑 똑같았다. 뭐 의정부 경전철을 타본 적은 없지만, 전철 내부가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



 역에서 내려 숙소까지 걸어갔다. 캐리어 바퀴가 보도블럭에 치일 때마다 손까지 진동이 울려왔다. 걷다 보니 ‘PACHINKO & SLOT’이라고 적힌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벽을 따라 에반게리온 광고판이 늘어서 있고, 스피커에서 애니에서 들어볼 법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브컬처에 거부감이 없는 편이지만, 이런 소리가 길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들리는 게 적잖이 놀라웠다. 일본 사람들은 길을 걷다가 이런 걸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건가?


 숙소에 도착해 체크인을 했다. 프론트 직원은 일본인보다는 동남아 사람처럼 보였다. 영어 발음이 알아듣기 힘들었다. 프론트에 사탕이 있길래 두 개 가져왔다. 하나는 웬 누룩곰팡이가 피어 있는 듯한 비주얼이었다. 구글에 검색해 봐도 무슨 사탕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호기심을 못 참고 입에 넣었다. 내 생애 단맛이 전혀 없는 사탕은 처음이었다. 짰다. 무지하게 짰다. 5분 정도 참고 먹다가 뱉어버렸다. 밥반찬으로도 먹고 싶지 않은 맛이었다.


 저녁은 ‘톤톤재키’라는 돈카츠 집에서 먹기로 했다. 구글맵을 보며 오키나와의 골목길을 걸었다. 1분에 한 번씩 주차장이 나타났다. 골목길을 걸으며 가장 많이 본 게 주차장과 자판기다. 자판기야 일본 전국에 많으니 그렇다 쳐도, 주차장이 왜 이렇게 많은지 궁금할 정도였다. 일본차가 둥글고 귀엽게 생겼다 보니 주차장이 아니라 거대한 장난감을 전시해놓은 듯했다.


고양이는 일본에서도 귀엽다


 톤톤재키는 오키나와에서 꽤 유명한 돈카츠 집이다. 가게에 들어서니 서너 테이블에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바테이블에 앉았다. 오른편에 티비가 있었다. 티비에서는 뉴스를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뉴스에서 일본어 자막이 지나가고, 아나운서가 일본어로 보도하니 그제서야 외국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나는 일본에 왔구나. 시험에 떨어졌으면서 마음 좋게 해외여행이나 가다니. 팔자 좋은 놈이다.



 등심돈카츠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는 데 꽤 오래 걸렸다. 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갈색빛을 띠는 돈카츠와 심플한 양상추 샐러드, 미소 된장국, 피클, 밥. 간단한 구성이었다. 소스 없이 돈카츠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바삭한 튀김옷과 부드럽게 씹히는 분홍빛 살점, 그리고 입 안에 퍼지는 육즙까지! 소금으로만 간을 한 모양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완벽했다. 역시 돈카츠를 먹으려면 일본에서 먹어야 한다. 감점 사항이 있다면 미소 된장국에 당근이 카레에 들어가는 것보다 컸다는 점이다. 국밥집 깍두기마냥 큼직한 당근을 씹는 것은 가히 고문에 가까웠다.


돌아가는 길에 보니 고양이가 몇 마리 늘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패밀리마트에 들렀다. 일본 편의점은 웬만한 한국 동네마트보다 크다. 일본인이 편의점에서 장을 본다는 말이 납득이 갈 정도다. 전용 주차장이 있는 편의점이라니. 패밀리마트에서 예전에 유튜브에서 본 컵라면을 몇 개 샀다. 숙소에 도착해서 하나 먹어봤다. 예전에 유튜브에서 본 커다란 유부가 들어간 유부우동이었다. 유부는 심각하게 달았다. 설탕과 간장을 때려넣은 맛이었다. 내가 아무리 단맛을 좋아해도, 이렇게나 단 것은 꽤나 어려웠다. 유부가 없었다면 더 맛있었을 것 같다.


 그렇게 오키나와에서의 하루가 저물었다. 버스투어가 예정된 내일을 위해 일찍 잠에 들기로 했다. 발밑에 작은 냉장고가 웅웅거렸다. 몇 시간이고 잠을 설치다 겨우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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