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비단 Mar 06. 2024

추리 소설인 척하는 성장 소설 『빙과』

요네자와 호노부 <고전부 시리즈>


줄이면 자보게동


 ‘자작 보드게임 동아리’는 네이버 베스트도전 웹툰과 포스타입에서 연재 중인 만화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알게 되어서 지금까지 보고 있다. 어느 날 이 만화를 보다가 <빙과>가 소설 원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애니메이션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애니메이션 <빙과>. 소설 4권까지의 내용을 담았다.


 인터넷에 ‘추리만화 추천’을 검색하면 꼭 <빙과>가 나온다. 하도 명작이라는 말이 많고, 단 두 글자뿐인 도발적인 제목 덕분에 오래전부터 <빙과>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애니메이션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나무위키를 뒤적거리다가 중요한 스포일러도 봐버려서 <빙과>를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빙과>가 소설 원작이라니. 게다가 동네 도서관이 전권 소장 중이다. 이러면 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루에 한 권씩, 5권과 6권은 하루 만에 다 읽어서 총 6일 만에 7권(본편 6권, 작가 인터뷰집 1권)을 다 읽었다.





1.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는 2001년 발간한 1권 <빙과>를 시작으로 20년 넘게 이어져온 시리즈이다. 2012년에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영하였다. 이게 꽤나 히트를 쳐서 서브컬처 좀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무조건 들어봤을 정도다. 애니 문외한인 나조차도 알고 있었을 정도니.


 <고전부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있다. 일상 미스터리. 전혀 어울리면 안 될 것 같은 단어의 조합이다. 일상 미스터리는 강력한 범죄를 다루는 게 아니라 일상 속 소소한 수수께끼를 소재로 하는 추리 소설의 한 장르다. 일본에서 인기 있는, 생각보다 전통 있는 장르다.


2022년에 방영한 <살인자의 쇼핑목록>도 일상 미스터리 장르에 속한다고 한다.


 지난 애거서 크리스티 리뷰 때는 나를 추리소설 매니아인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추리소설 매니아는 아니다. 끽해야 셜록 홈즈 시리즈, 애거서 크리스티 유명작, 히가시노 게이고 유명작 몇 개 읽어본 게 다다. 그래서 일상 미스터리라는 장르도 <고전부 시리즈>를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자고로 소설이라고 한다면 사람 둘셋쯤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추리 소설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하는 게 예의 아닌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던지라 1권 <빙과>를 읽을 때에는 살짝 실망했다. 추리 소설을 기대하고 봤는데, 이건 추리 요소를 끼얹은 성장 소설에 가까웠다. 내가 예전에 당했던 스포일러도 딱히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다. 속은 기분이다.


 동시에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 내가 그동안 자극적이고 잔인한 소설만 갈구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잔잔하고 차분한 소재로도 추리 소설을 쓸 수 있는데. 왜 나는 살이 피 튀기고 복수에 미친 인간들이 득실대는 소설만 읽었던가.


 <고전부 시리즈>가 일상 미스터리 장르며, 범죄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난 다음 2권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를 읽었다. 바로 살인 사건이 등장했다. 영화 촬영을 핑계로 살인 사건을 등장시키다니. 작가가 나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살인 사건이 등장하자 더욱 흥미진진하게 소설을 읽는 나 자신의 모습에도 자괴감이 들었다. 하루 전만 해도 반성하고 있었으면서.




2. 일상 미스터리


 일상 미스터리에서 나오는 사건이란 소소하다. 커피가 평소보다 달았던 이유는 무엇인지, 방과 후에 울리는 교내방송의 이유는 무엇인지, 발렌타인 초콜릿을 훔쳐간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게 전부다. 살인 같은 강력범죄를 다루는 기존의 추리 소설과 다르다.


 추리 소설의 가장 큰 단점은 그 소재에 있다. 살인, 유괴, 방화, 자살 등등 범상치 않은 사건이 연달아 등장한다. 심지어는 더 깊이 들어가면 하드한 수위의 작품도 많다. 중학생 때 읽은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는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장르가 이렇다 보니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추리 소설 자체를 꺼린다.


중학교 도서관에 이런 잔인한 책 좀 두지 말라고


 일상 미스터리는 이 단점을 해결했다. 추리의 재미를 유지하면서도, 소재에 부담을 느꼈던 사람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갈등이 심각하지 않고 이야기가 잔잔하게 전개되며, 등장인물에게 공감하기도 쉽다. 또한 범죄를 다루는 게 아니니 추리 외의 다른 주제도 다루기 용이하다.


 기존의 자극적인 소재에 익숙하던 사람은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어디선가 본 트릭, 살해동기, 반전에 지쳐 있다가 일상 미스터리를 접하면 뇌가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 것이다. 추리 소설계의 힐링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장


 이 소설의 주제는 ‘성장’이다. 고전부의 4명의 고등학생 오레키 호타로, 지탄다 에루, 후쿠베 사토시, 이바라 마야카는 여러 사건을 겪으며 성장해간다. 자신의 신념을 재정립하고, 사랑을 싹 틔우고, 진로를 찾아나간다. 청춘소설의 정석이다. 아무리 보아도 ‘추리’는 연막이다.


 조금 과장된 면이 있긴 해도, 이들이 겪는 문제는 모두가 공감하기 쉬운 문제다. 능력 부족으로 인한 열등감, 인간관계에서 오는 괴로움, 확실치 않은 미래, 연애에 대한 두려움 등등. 모두가 한 번쯤 겪어보았을 문제로 고민한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공감하기 쉽다. 아무렴 부모님의 복수니 사랑하는 연인의 복수니 하는 것보다는 훨씬 공감할 만하지 않은가.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2학년 여름방학까지 이들의 이야기를 쭉 읽다 보면 등장인물들과 굉장히 친해진다. 이들이 겪는 성장통과 그것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가벼운 문체에서 아린 뒷맛이 느껴진다. 이들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궁금하다.


 작가가 등장인물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전부 시리즈를 쓰겠다고 약속했었다. 빨리 다음 권을 읽고 싶다. 물론 마지막 6권이 2016년에 나오고 8년째 신작이 안 나오고 있는 중이라는 작은 문제가 있다.


한창 다른 소설 쓰고 있어서 고전부 시리즈 신작은 몇 년 더 기다려야 나올 듯하다




 지금까지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였다. 잔잔한 일상 미스터리 추리 소설이니 마음에 들었다면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애니메이션도 명작이라는 평이 많으니 애니에 관심 있는 사람은 애니로 봐도 좋다.


작가의 다른 시리즈 <소시민 시리즈>가 이번에 애니로 나온다고 하니 관심 있는 사람은 이것도 보는 걸 추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년만화계의 이단아 - 『체인소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