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우 에디터 Sep 09. 2022

다큐멘터리로 보는 뱅크시의 작품세계 [2] 돈벌이

익명의 예술가는 어떻게 돈을 벌까?

© DCist


뱅크시는 미술시장의 권력을 정말 싫어했던 작가입니다.


흔히 미술시장을 이루는 가장 큰 주축을 미술관, 갤러리, 컬렉터로 보는데요. 그 이름이 유명할수록,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집니다. 거리예술로 이름을 알리고, 유명 미술관에 도둑 전시를 하며 메시지를 전한 뱅크시는 이 권력자들에게는 애증이었습니다. 세계 유명 미술관이 전시 열어주겠다고 해도 뱅크시는 거절했고, 유명 갤러리가 전속작가를 제안해도 거절했죠. 또 이름난 컬렉터가 본인 작품을 구매했단 소식을 들으면 경멸했고요. 그 어느 작가보다 강력한 파급력과 인기를 누리는 작가이지만, 누구도 그를 가질 순 없었습니다.


만약 영화배우가 영화계를 경멸하고, 모델이 패션계를 혐오했다면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뱅크시는 미술시장의 권력이 아닌, 관객을 대상으로 했기에 예술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강력한 팬덤을 등에 업은 채, 당당하게 행보를 이어나갔죠. 하지만 이런 궁금증도 생깁니다. "뱅크시는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거리예술만 하고, 도둑 전시만 해선 돈이 안되니까요. 이번 편에서는, 뱅크시의 작품세계 중, '돈벌이'에 대해 다룹니다.


첫째로 뱅크시는, 작품 이미지를 포스터로 만들어 판매했습니다.


(좌) POW 사이트(우) 낙인과 수량, 에디션이 적힌 포스터의 일부분 © WideWalls


뱅크시가 막 알려지던 2000년대 초, 장당 5~10파운드(한화 약 1만 원) 정도에 포스터를 판매했어요. 당시에는 길거리에서 포스터를 들고 호객행위를 하며 팔았죠. 이후 뱅크시가 알음알음 알려지던 2002년도부터는, 뱅크시의 서명을 넣어 40파운드(7만 원) 정도에 판매했습니다.


이후 2004년에는 POW(Point of Walls)를 설립해 온라인 판매를 진행했어요. 그런데,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판매를 진행합니다. 온라인으로 판매하되 게릴라 형식으로 아무 때나 포스터를 오픈했죠. 2004년에는 뱅크시 팬덤이 이미 충분히 형성된 후였기에, 이 포스터를 구하려고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었다고 해요. 팬들의 원성이 커지자, 나중에는 선착순 구매가 아닌, 추첨 방식으로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좌) 뱅크시가 그려낸 케이트 모스(우) POW의 판매 종료를 알리던 공지 이미지 © Banksy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한정판 오픈-런, 되팔이처럼, 당시 뱅크시의 프린트 작품을 구한 사람들도 소장하기보단 비싸게 재판매했습니다. 일례로, 케이트 모스 프린트는 2005년 장당 1,500파운드(한화 약 240만 원)에 50장이 나왔는데요. 3년 후 한 경매에서 27만 7천 파운드(4억 4천만 원)에 팔렸죠.


이후 2017년 12월에 프린트 판매는 공식적으로 종료됩니다.


블러의 앨범 'Think Tank'작업 (2003) © Banksy


이 외에도 뱅크시는 '외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티스트들의 앨범 아트 작업을 맡았죠. 2003년에는 블러의 앨범 <싱크탱크> 표지 아트를 제작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뱅크시는 "청구서를 내기 위해 몇 가지 일을 했고 블러 앨범을 만들었어요. 기록이 좋았고, 돈이 꽤 됐죠. 그게 정말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해요. 진짜로 믿는다면 상업적인 일을 한다고 쓰레기로 바뀌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 않다면 자본주의를 아예 거부하는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죠.”라고 언급했습니다. 그간 상업주의를 비판했던 자신의 신념을 변호하는 이야기였죠.


또 뱅크시는 의뢰받은 일을 다 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이키와의 협업은 네 번이나 거절했다고 해요. 뱅크시는 “내가 해온 일 보다 하지 않은 일들의 목록이 훨씬 길어요. 거꾸로 된 이력서라고나 할까요. 괴상한 노릇이죠”라 말했습니다.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굳이 상업적인 작업은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요.


(좌) Turf War가 진행되던 모습(우) 전시장에서 인터뷰 중인 뱅크시 © Banksy Explained


단순 포스터만 팔아서는 큰돈을 벌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포스터를 되팔던 사람들이 뱅크시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죠. 이후 뱅크시는, 2003년 7월에 영국 이스트 런던의 한 창고에서 전시를 선보입니다. 제목은 <Turf War>.


뱅크시가 그간 선보인 거리예술을 비롯해, 자동차나 돼지, 소를 활용한 그라피티 작업까지 다채로운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뱅크시답게도, 전시에 대한 정보는 전날까지 공개되지 않았고, 당일 오픈과 동시에 홍보를 했다고 해요. 그럼에도 어마어마한 관객과 취재진, 경찰까지 몰려들었습니다. 전시는 결국 금요일 오후에 빠르게 막을 내렸어요.



이 전시는 3일간 짧게 열렸는데요. 당시 스포츠 브랜드 푸마 Puma의 후원을 받아서 진행했습니다. 푸마가 전시를 열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했고, 전시 대표 작품인 윈스턴 처칠의 초상, <Turf War> 공식 티셔츠도 판매했죠. 전시회 제목이 자수로 새겨진 푸마 운동화도 팔았고요. 당시 티셔츠의 인기가 선풍적이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 역시도 큰돈은 안 됐습니다. 뱅크시는 더 많은 관객에게 작품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요. 그리고, 책을 쓰기로 하죠.


Wall and Piece (2005) © Banksy


이 책에는 뱅크시 초기 작품이 많이 실려있고, 작품에 대한 뱅크시의 간단한 코멘트도 담겨 있습니다. 책의 서두에 뱅크시는 본인의 정체성을 살짝 포기한 걸 볼 수 있어요. 그동안에는 익명의 예술가로 활동하며 본인 작업을 모든 사람한테 보여주고, 함께 나누는 걸 추구했는데, 저작권을 지키려는 뉘앙스의 코멘트를 남겼죠.

“뱅크시는 자신의 더 나은 판단에 반하여 1988년 저작권, 디자인 및 특허법에 따라 이 저작물의 저자로 인정받을 권리를 주장했다.”


이 책은 영국 내에서 63만 부 판매되었는데요. 뱅크시 기념품 숍이나 해외 판매 수치는 알 수 없습니다. 약 100만 권~200만 권 가량 팔렸을 것이라 예상될 뿐이죠. 국내에도 번역되어 현재 판매되고 있습니다.


디즈멀랜드의 입구 모습, © Banksy


이후 뱅크시는 새로운 도전도 이어갑니다. 놀이공원을 만든 것이죠. 이름은 '디즈멀랜드'. 2015년 여름, 영국에 있는 슈퍼 메어 해변에서 진행됐어요. 이곳은 뱅크시의 고향인 브리스틀과 4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곳인데요. 뱅크시가 어릴 적 수영도 하고, 가족과 휴가를 보냈던 곳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퇴락한 휴양지가 되었죠.


이곳에서는 뱅크시가 만든 조각 작품이 곳곳에 놓여있고, 갤러리도 하나 있었습니다. 여기엔 뱅크시가 개인적으로 선정한 아티스트 50명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요. 박제 상어 작품으로 잘 알려진 데미언 허스트의 작업도 있었다고 해요. 이때 선정된 작가들은 이를 계기로 유명해지진 않았습니다.


(좌) 디즈멀랜드 안의 갤러리(우) Hook a Duck © Banksy


갤러리 밖에는 잡다한 게임들이 많았습니다. 오리 낚시 (Hook a Duck)에는 ‘1분에 2파운드, 그래 이거 바가지야'라는 안내가 붙어있었죠. 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대부 업체도 운영됐습니다. 어린이들에게 5,000%의 이율로 돈을 빌려주었죠.



이런저런 즐길 거리가 많았지만, 디즈멀랜드의 메인 작품은 이것입니다. <이민자들이 가득 찬 원격조종 보트>. 구멍에 1파운드를 넣으면 배터리로 작동하는 보트를 조종해 공해를 건너도록 한 장난감인데요. 그런데, 뒤쪽으로 한 척의 경비정이 그들을 쫓고 있는 모습입니다.


관객은 돈을 넣으면 이민자들이 담긴 구명정, 혹은 그들을 쫓는 경비정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운행할 수 있었습니다. 경비정이 구명정에 가까이 가거나 닿는 등 아슬아슬한 순간이 펼쳐질 때마다, 구명정 안의 이민자들은 강으로 하나 둘 떨어졌고요. 이 역시 뱅크시의 의도였습니다. 이민자들을 배와 단단히 고정시키기 보다, 탈출 과정에서 낙오되는 이민자들을 보여주며 뱅크시가 구명정에 살짝 올려둔 것이기 때문이었죠.


뱅크시는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재앙이 될 가능성이 없다면 예술이 아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그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됩니다.”


놀이공원을 어두운 현실의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으로 만든 뱅크시. 다시 돈 이야기로 돌아오면, 디즈멀랜드엔 5주 동안 15만 명이 방문했고 3파운드의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입장료로만 약 45만 파운드(한화 약 7억 2천만 원)를 벌어들인 건데요. 개별 놀이시설은 별도 금액이었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뱅크시가 엄청난 수익금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죠.


© ArtnetNews


이렇게 뱅크시가 포스터 팔고, 책 내고, 놀이공원 만들어서 돈을 벌어들이는 동안, 미술시장 내에서는 더 큰돈이 오갔습니다. 뱅크시 작품이 경매에서 수십억에 거래되고, 판매했던 포스터는 프리미엄이 붙어 개 거래되었죠. 뱅크시가 공식적으로 번 돈과는 비교도 안될 돈이 시장 내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뱅크시는 이걸 그냥 지켜만 봅니다. 대신, ‘그라피티는 소수의 예술이 아니다'라는 코멘트를 남기면서 불쾌함을 표하기는 했죠. 그간 모두를 위한 예술을 선보이고자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예술을 해왔는데, 작품이 부잣집 집안에 전시되거나 미술관으로 들어가면서 소수의 예술이 되었으니까요.


© Banksy


그러던 중, 뱅크시가 처음으로 파격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Pest Control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구성해, 법적으로 자신의 상표권을 주장하고 나섰죠. 이전에 단순히 코멘트 몇 자 남기면서 불쾌함을 드러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아예 고소까지 진행했죠. 이 이야기는 [3]편에서 이어집니다.



이 글을 재밌게 읽으셨다면, 이어지는 콘텐츠도 만나보세요. 

① 촌스럽지 않은 저항정신, 뱅크시의 작품세계 특징 5가지

② 저작권은 루저들을 위한 것? 뱅크시 철학의 모순

③ 미술시장을 혐오한 예술가를 사랑한 미술시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