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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우 에디터 Oct 10. 2022

이건희 컬렉션과 '미술품 물납제'

한국 미술시장의 흐름을 바꿀 법안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전시 전경 ©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9월 21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는 이건희 컬렉션 중, 모네와 피카소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가 시작되었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이건희 컬렉션 중, 이중섭 작품을 전시하고 있고요. 2021년 3월, 컬렉션이 기증된 이후 거의 매일같이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인데요. 그런데 처음 이건희 컬렉션 이야기가 나왔을 당시에 주목받았던 건, ‘미술품 관련 법안’이었습니다. 바로, 미술품 물납제도였죠.


미술품 물납제도는 낯설어도, ‘물납제' 자체는 들어본 적이 있을 거예요. 물납제도는 현금이 아닌 다른 자산을 정부에 넘기고, 그 자산의 가치만큼 세금을 낸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우리나라는 ‘상속세’에 한해 물납제도를 운용하고 있어요. 피상속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상속세를 납부하기 위한 충분한 금전이 확보되지 않는 경우, 정부에서 세금을 용이하게 징수하도록 만들어졌죠.


현재 국내에서 물납제도로 정부에 넘길 수 있는 재산은 한정적입니다. 국내 부동산, 주식, 국채, 상장 유가 증권, 비상장 주식, 토지 등이죠. 미술품은 없습니다. 아직 국내에는 재산으로서 미술품 가치 평가 체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었죠. 현금화가 까다롭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에서는 꾸준히 미술품 물납제의 필요성을 언급했습니다. 물납제도를 통해 미술품 가치 평가 체계를 다듬어나가면, 추후 미술시장의 확장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전시 전경 © HeraldCorp


이건희 컬렉션이 쏘아 올린 '미술품 물납제'의 필요성

그러던 중 2020년 1월, 이건희 회장이 사망하며 삼성가에서 엄청난 상속세를 납부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삼성은 4개월 안에 상속세 납부를 마쳐야 했기에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는데요. 당시 삼성이 크리스티나 소더비 등 해외 경매 회사를 통해 작품을 판매한 후, 그 금액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방법을 고려한다는 기사가 돌았어요. 이런 상황 속, 미술품 물납제의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이미 해외에는 도입된 법안이고, 우리나라보다 미술시장 규모가 큰 국가에서는 상용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또 훌륭한 미술품이 해외로 유출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좋은 명분도 있었고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삼성가에서는 미술품 물납제도와 상관없이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합니다. 현행법상 물납제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컬렉션을 기증해도 세제 혜택은 전혀 없었지만, 이건희 회장이 생전 강조했던 문화 예술 보급의 가치를 이어가는 취지에서였죠. 이후 이건희 컬렉션은 국가에 귀속되었고, 오늘까지도 전시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뛰어난 안목의 컬렉터가 모은 훌륭한 작품을 대중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건 아주 좋은 일이죠. 하지만 여전히 국내 미술시장에서는 미술품 물납제도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술품 물납제로 만들어진 ‘피카소 미술관’의 전경 © Musée Picasso Paris


해외의 미술품 물납제도는 순항 중

이미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는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물납하고 있습니다. 이중 최초로 미술품 물납제도를 도입한 국가는 프랑스에요. 1968년에 처음 도입해, 법안이 아주 잘 다듬어져 있습니다. 작품 물납 과정도 간단하고, 물납 가능한 작품도 미술품, 책, 서류, 수집품 등으로 다양하죠. 이 덕분에 프랑스는 정부 예산으로 구입하기 힘들었던 미술품들을 국가 소유로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피카소 미술관이에요. 파블로 피카소가 1973년에 세상을 떠난 후, 상속인들은 엄청난 상속세를 물게 되었습니다. 미술품도 과세 대상이었기 때문이죠. 다행히 이때 프랑스에서는 미술품 물납제도가 시행된 지 6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덕분에 미술품으로 세금 물납이 가능했죠. 상속인들은 피카소의 회화 203점, 조각 158점을 물납했는데요. 정부는 1985년, 징수한 피카소 작품을 모아 피카소 미술관을 개관했습니다. 이 덕분에 현재까지도 어마 어마한 관광수익을 벌어들이고 있고요.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와 유사한 물납제도 시행 중입니다. 상속세로 물납할 수 있는 재산인 국채, 공채, 증권, 부동산 등 항목이 비슷한데요. 그러나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미술품을 허용하고 있어요. 주목할 만한 점은 ‘등록 미술품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는 점. 국가에서 등록 미술품으로 선정한 작품의 경우, 물납 충당 순서에 우선순위를 부여해 미등록 미술품보다 상속세 물납이 더 용이하도록 만든 거예요.


2021년, 피카소의 딸이 세금 납부를 위해 물납한 피카소 작품 Child with a Lollipop Sitting Under a Chair (1938)© ARTnews


'한국형' 미술품 물납제가 필요해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미술품 물납제가 도입되지 못한 걸까요? 프랑스와 일본의 사례를 보면, 프랑스는 조세의 목적보다는 예술 자산 보존의 목적이 크고, 일본은 조세 납부 제도의 일환으로서 운영되는 측면이 강한데요. 우리나라는 예술 자산 보존의 목적에서는 미술품 물납제도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조세의 목적으로는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미술품으로 세금을 걷는 것이 되려 조세재정 건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죠.


또 미술품 물납제 도입을 위해 갖춰야 할 것도 많습니다. 미술품 물납제도가 있다고 해서, 모든 미술품이 물납 대상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에요. 나라마다 그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물납이 가능한 작품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이 기준을 세우기가 매우 애매하다고 봐요. 작품의 예술적, 역사적, 경제적 지표를 모두 고려해야 하고, 이를 판단할 주체가 있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주관적 견해가 개입되지 않을 견제 기구도 있어야 하죠. 이런 시스템이 완비되어야 국내에서 미술품 물납제도가 시작될 발판이 마련될 수 있을 걸로 보여요.


갈 길이 멀지만, 그럼에도 국내 미술계에서는 미술품 물납제에 대해 꾸준히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2021년엔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속세의 미술품 물납제도 도입 논의>를 주최하기도 했고, 박양우 등 전 문체부 장관 8명이 모여 미술품 물납제도 도입 건의문을 내기도 했죠. 현재 국회에서도 관련 개정이 논의되는 중이고요. 당장 관련 법안이 등장하진 않겠지만, 곧 미술품 물납제도 역시 국내에서 시행될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미술품 물납제가 시행되고 물납 가능 미술품의 기준이 정해진다면, 추후 미술시장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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