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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우 에디터 Mar 07. 2023

[1화] 앤디 워홀이 굳이 '실크스크린'을 쓴 이유

당시엔 온갖 욕을 먹었다

래리 가고시안과 앤디 워홀의 자화상 (1986) © New York Times
앤디를 만났을 시점엔 이미 상징적인 인물이었어요.
자신을 상품화하는 거죠. 나쁜 말처럼 들리지만, 좋은 의미로 말이에요.
한 사람의 존재가 브랜드화된다는 건 요즘은 흔한 일이잖아요.
그 시초는 앤디 워홀이라고 할 수 있어요.

-래리 가고시안 Larry Gagosian, 가고시안 갤러리 설립자



일반인이 예술가가 되는 방법

앤디 워홀의 학생 시절 사진 © Artspace.com

최근 100년의 미술사에서 딱 한 명의 예술가를 남기라면, 아마 앤디 워홀이 될 것입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를 했고, 그 시도가 곧 트렌드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발전 중이기 때문이죠. 비범한 인물의 시작은 확실히 남들과 달랐습니다.


앤디는 가난한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부터 신경질환을 앓았습니다. 색소 결핍증으로 피부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기도 했죠. 어린 시절 대부분을 침대에서 누워 지냈습니다. 아픈 앤디를 위해 어머니는 색칠공부책을 쥐여줬습니다. 앤디의 그림실력은 확실히 남들보다 뛰어났습니다. 이를 간파한 학교 선생님은 그가 미술을 할 수 있도록 도왔죠. 그리고 1945년, 19살이 되던 해 카네기 공과대학교에 입학해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예술가의 클리셰 같은 유년기를 보낸 앤디 워홀. 적당히 가난하고 적당히 실력 있어 미술을 하게 된 그의 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1949년 대학 졸업 후부터 그는 저돌적인 인물로 변모합니다. 200달러 들고 뉴욕 이주해, 길거리에서 Self PR을 하고 다녔죠.


뉴욕타임스에 실렸던 워홀의 신발 광고 © Minnie Muse

그렇게 첫 광고를 따냅니다. 잡지 광고란에 신발회사 ‘밀러’ 의 광고를 디자인하는 것이었죠. 앤디는 넓은 광고란에 신발을 보여주지 않는 획기적인 콘셉트의 광고를 제작했고, 이를 통해 광고 디자인 상을 수상하며 광고업계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빠르게 성공했습니다. <보그>, <하퍼스 바자>, <더 뉴요커>등 잡지사에서 의뢰를 받아 20대에 두 번의 전시회에도 참여하게 되었죠.


주변인들에 의하면, 앤디는 단 한건의 의뢰도 거절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열심히 일 해 돈을 모은 워홀은, 뉴욕 시내에 자신만의 첫 아파트로 이사했고, 당시 핫한 매체였던 TV도 집에 들이게 됩니다. 이후 1957년, 29살의 나이로 ‘앤디 워홀 앤터프라이즈’라는 회사를 세우게 되죠.


© Commumication Arts

회사를 세운 이유는 간단합니다. 애초에 뉴욕에 왔던 이유 때문이었죠. 앤디는 광고 디자이너가 아니라, ‘예술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내기 위해 작품을 끊임없이 그리고, 다양한 시도를 이어갑니다. 동시에, 갤러리스트들과도 인맥을 쌓기 시작했죠. 조금씩 유명해진 그는, 한 공장을 얻어 작은 작업실 겸 아지트를 만듭니다. 그 유명한 ‘팩토리’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동료들과 살고, 놀고,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1962년, 34살이 되던 해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피러스 화랑에서 첫 번째 순수미술 전시 작품을 출품합니다. 바로, 캠벨 수프 깡통이었죠. 이 작품은 실크스크린 기법을 활용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실크스크린 기법은 디자인, 광고 업계에서 대량생산을 위해 사용하던 기술이었는데요. 앤디는 디자인 업계에 몸담고 있었던 덕에 이 기술에 익숙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작품에 활용했죠.


팩토리에서의 앤디 워홀과 조수들 © Artsy

이는 이전까지 예술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전통적인 회화는 제작 시간이 길었습니다. 한 땀 한 땀 예술가가 직접 그어낸 선과 면이 캔버스를 가득 채웠죠. 조수를 쓸지언정, 기술을 활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실크스크린은 철저히 상업적인 용도의 기술이었습니다. 앤디의 작품은 예술이 상업적으로 변모하는 걸 드러냈죠. 이는 뉴욕 미술계에 충격을 주었고, 동시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술의 상업성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대놓고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죠.


새로운 기술이 미술에 적용될 때는 늘 비난이 따랐습니다. 200년 전에는 사진이 그랬고, 오늘날엔 AI가 그렇습니다. 앤디의 실크스크린 기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디는 이를 밀어붙이기로 합니다. 1963년, 앤디 워홀은 실크스크린 대량 생산을 시작합니다.


About 실크스크린

실크스크린 기법은 얇은 실크 천을 이용해, 짧은 시간에 수십 점의 이미지를 찍어낼 수 있는 일종의 판화 기법입니다. 섬세한 조직의 천에 왁스나 니스를 발라 인쇄하는 방식이죠. 앤디는 여기에 아크릴을 칠함으로써 회화와 판화의 경계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작품은 워홀의 팀원들의 수작업을 거쳐 판화의 경계를 벗어나게 되었죠.



앤디의 전략 1. 실크스크린

01 앤디 워홀은 왜 욕먹으면서도 실크스크린을 고집했을까?

© Andy Warhol Museum

일종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였습니다. 이는 상대의 칼을 빌어 상대를 공격한다는 의미인데요. 당시 미국은 빠르게 상업화되고 있었고, 이런 흐름 속 광고 산업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광고 산업의 중심에서 활동하던 앤디는, 누구보다 이 세상의 변화를 잘 간파하고 있었죠. 그리고 ⓵ 대량 소비사회를 대량생산이 무기인 실크스크린으로 공략합니다.


또 실크스크린은 이점이 많았습니다. ⓶ 기존 예술작품과 달리 노동집약적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고, ⓷ 기계적인 정확함이 보장되었죠. 또, ⓸ 일단 스크린을 만들어두면 복제 행위는 누가 하든 상관없었습니다. 실제로 팩토리의 조수들을 통해 앤디는 작품을 무한정 생산했죠. 또 작품에 활용한 이미지는 모두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사진이었습니다. ⓹ 기존 사진을 활용한 덕에 작품 구상에 들어가는 시간도 적었죠.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은 하루살이 운명이었는데, 앤디의 실크스크린 작업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영원성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앤디는 작업실 이름 ‘팩토리’처럼, 철저히 공장식으로 작품을 제작합니다. 컬러링 팀은 실크스크린의 채색작업을 맡았고, 앤디의 어머니는 작품에 서명을 했습니다. 앤디는 각 팀원들에게 색상과 위치를 정확히 지시했지만, 약간의 즉흥작업을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앤디에게 ‘오리지널’이라는 개념은 크게 중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02 실크스크린에 담긴 도상들

© CNN

그 이유는, 앤디의 그림 속 도상들이 이미 오리지널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습니다. 앤디의 데뷔작 <캠벨 수프캔>은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온 기성 식품이었고, 코카콜라 병이나 브릴로 상자, 돈처럼 ‘똑같이 복제되어 만들어지는 것들’이 앤디 작품에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일상적인 소비품은 예술작품처럼 ‘One and Only’ 하지 못했죠.


앤디 작품 속 등장하는 다른 소재들 역시 예술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마릴린 먼로, 마오쩌둥, 요셉 보이스 같은 유명인을 그리거나, 식물도감 속 꽃을 그리는 등 너무 흔해서 관심 밖인 이미지들을 예술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상으로 접하던 상품과 스타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죠.


1,100억 원에 낙찰된 앤디 워홀의 Silver Car Crash © The New York Times

혹은 가십거리에서 소재를 찾기도 했습니다. 사고 현장이나 자살 현장같은 끔찍한 현장 사진을 작품에 담거나, 해골, 전기의자 등을 실크스크린 작업으로 선보였습니다. 가십거리에서 찾아낸 소재들은 작품이 되며 또 다른 가십을 쏟아냅니다.


앤디의 선구적인 작업 덕분에, 이제 무엇이든 미술작품이 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동안 고고한 예술의 산정에서만 놀던 미술이 일상생활로 하산한 격이죠.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소재들, 수 없이 복제할 수 있는 실크스크린 작업 방식. 이는 예술계 금과옥조인 독창성과 유일성에 균열을 냈습니다. 앤디의 작품은 예술이 특별한 재능을 지닌 한 개인이 창조하는 것이 아닌, 누구에 의해서든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었죠.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실제와 똑같이 만든 브릴로 박스 (1964) © Dazed

하지만 이는 후대의 평가입니다. 당시에는 앤디의 작품은 세상이 받아들이기 조금 난해했습니다. 우선 갤러리스트와 컬렉터들이 앤디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찍어내듯 대량생산한 작품들은 가치를 높게 매기기 어렵기 때문이었죠.


관객들 역시 의문을 표했습니다. 이 작품이 예술인지, 광고인지 헷갈려 한 것인데요. 이들을 이해시킬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앤디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상업화가 빠르게 이뤄지고, 신문을 넘어 잡지와 라디오, TV 방송이 시작되던 시기. 앤디는 예술가 자신이 셀럽이 되는 방식을 택합니다. 유명해질수록 사람들은 갖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까요. 워홀의 성공 전략은 ⓶화에서 이어집니다.





✍� 예술가의 셀프 브랜딩이 궁금하다면, 더 많은 콘텐츠를 만나보세요. 최근 국내에서 개인전을 진행중인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이야기, 앤디 워홀의 팝아트 덕을 톡톡히 본 제프쿤스의 이야기를 추천드립니다.




자료 출처

미술이야기 제 64권 제11호 <전시회를 보는 두 가지 방식>, 정민영, 2016

앤디 워홀 일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2022

앤디 워홀 예술과 상업성과의 연계성 연구, 정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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