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우주다
남아이십미평국 후세수칭대장부.
남아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랴.
'이시애의 난' 등을 진압하며 이십대에 이미 대장군의 칭호와 판서의 지위에 오른 '소년 장수' 남이 장군의 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와 웅지에도, 간신 유지광의 고변으로 역모로 몰려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에 처해진 비운의 장수이기도 하다.
십대 때 저 시를 처음 읽고 든 생각은, 나라를 평안하게 까진 하지 못해도 뭔가 뜻있고 의미있는 일은 하고 나름 당당하게는 살아가야 하지 않겠냐, 그렇게 살 수 있지 않겠냐는 믿음과 희망은 있었다.
홍정욱. 왕년의 인기 영화배우 남궁원의 아들로 지금은 언론사와 사업체를 소유한 사업가이며 18대 총선에서 당시 노회찬 의원 지역구인 노원 병인가에서 노 의원을 꺽고 당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기도 하다. 홍정욱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건 군대에 있던 92년 인가, 93년 인가였다. '7막7장' 이라는 홍정욱이 쓴 책을 통해서였다. 대단했다. 케네디 대통령 전기를 일고 케네디처럼 되고 싶어서 중학교 때 혈혈단신으로 케네디가 다녔던 명문 사립 스쿨로 지금으로 치면 조기유학을 갔다. 백인 엘리트 아이들을 상대로 말그대로 죽을 각오로 공부를 해서 하버드 대에 들어갔다 서울대와 베이징대 등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오며 한중미 삼국의 미래 리더들과 네트워크를 쌓았다. 사실 흔한 그렇고 그런 '미국명문대학입학기'에 불과하지만, 하버드와 서울대, 베이징대라는 상징 자본에 '남궁원 아들'이라는 배경, 잘생긴 외모에 '스토리'까지 더해져 당시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조기유학 붐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암튼 책을 보며 군대에서 삽질이나 하고 '당까'로 흙이나 나르던 당시 내 처지와 비교돼 조금 처량하긴 했지만, 분노가 일거나 자괴감이 들진 않았다. 부모의 재력이 뒷받침됐겠지만, 온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성과였고, 무엇보다 나도 젊었기 때문이다.
그런데...'승마공주' 정유라는? 이는 출발선이 다른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게임의 룰 자체를 완전히 바뀌어 놓았다. 정의나 노력, 공정한 경쟁같은 단어들을 다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을 해주나.최순실이 끼친 가장 큰 패악은 돈 몇백억 처먹은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누렸을 '순실의 시대'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여기를 '상실의 시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부정과 비리가 '실력'인 '불의의 시대'. 조금이라도 돈있고 빽있으면 할수있는거없는거 다해서 제이득 챙겨가고, 그 대열에 끼지 못하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증오하거나, 혹은 그럴 재주도 실력도 없는 자신을 비하하거나 어떡하든 그 대열에 끼기위해 인간적 타락쯤은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감수하는 총체적 '상실의 시대'.
그럼에도 어김없이 '수능의 날'은 왔다. 십대 중후반부의 모든걸 쏟아넣은 아이들이, 저녁에 조용히 촛불을 밝혔다. '고3이 나왔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사진을 보는 순간 울컥 눈물이 고였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상실의 시대에도 별처럼 빛나는 씨앗을 품고 있는, 수줍게, 패기있게 싹을 틔우며 꽃을 피우고 있는 아이들이 정말 고맙고 미안해서.
순실의 시대가 남긴 유산을 다 청산해도, 청산하려면 그들이 남긴 유산을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 자격은 없지만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희들이 우주다. 너희들이 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