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식이법'을 중심으로
사회적 재난, 불합리한 정책으로 인해 피해를 입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피해는 개인적 측면에서 책임을 찾을 수 없는 ‘사회적’ 재난이며, 이에 따라 사건 발생 직후 여론은 ‘국가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사회적인 대책이 마련되기 시작한 지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론은 대부분 반전된다. ‘지겹다’, ‘너희만 힘드냐’, ‘너희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본다’는 식이다. 결국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들은 그들의 피해를 ‘개별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더해 심하게는 사회적 조롱의 대상으로까지 여겨진다.
이 같은 잠깐의 관심이 사회적 외면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이젠 예상이 가능할 정도로 익숙한 일이 됐다. 그리고 이런 비극의 반복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고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여론의 반전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인가? 왜 피해자는 끝까지 피해자로 여겨질 수 없을까? 이런 비극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따라서 이어지는 내용에서 ‘민식이 사건(법)’을 중심으로 여론이 변화하는 원인을 추적하는 방식을 활용해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갈 것이다.
지난해 3월 ‘민식이법’이 제정됐다. 2019년 민식군이 학교 정문 앞 사거리 인근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 차량과 충돌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사건을 계기로 어린이들의 안전을 강화하기 위한 시설 및 장비를 보완하고,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가해 운전자를 가중처벌 규정이 만들어졌다. 민식이 어머님의 안타까운 사연이 어린이 안전구역 보호장치 강화 요구로 이어진 덕분이었다. 그리고 ‘민식이법’이라 불리는 관련 대책을 담은 법률은 그 중에서도 ‘제2의 민식이’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었다.
그러나 ‘민식이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떼법’, ‘감성팔이’가 됐다. 교통사고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호소보다, 아이들을 ‘도로 위 흉기’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민식이법을 고발한다는 유튜브 영상은 77만 조회수를 넘었고 댓글에는 “민식이법은 무분별한 복수극일 뿐”, “민식이 아빠도 조심해야겠네. 자기 자식법에 자기가 걸리면 웃기겠다”는 등 법에 대한 비판을 넘어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더 이상 피해자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동정이 혐오로 변하는 데에는 민식이법으로 생긴 속도제한과 가중처벌 조항이 운전자들에게 직접적인 변화로 느껴진 것이 주된 역할을 했다. 이전까지는 민식이의 사연이 단지 안타까운 사건으로 여겨지며 ‘아동 보행 안전’이라는 도의적인 요구가 있었지만, 실제 법률이 만들어지고 나니 민식이 법이 본인에게 불편함, 불합리를 주는 존재로 느껴지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결국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를 단지 안타까운 이야기로 ‘타자화’하여 받아들이던 사람들은, 본인과 연관되는 변화가 생기는 순간 2차 가해자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민식이법은 그 취지 그대로 어린이 보행자를 우선시하는 교통 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당연히 운전자들과 관련한 제약이 수반된다. 민식이의 일이 안타깝다며 청와대 청원으로, 기사 댓글들로 ‘어린이 보행자 보호’를 외쳐대던 수많은 제2의 민식이를 보호하던 어른들은 사실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준비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과도한 처벌을 부르는 악법으로 통하는 민식이법은 지난 1년간의 사례를 보면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다르다.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에 따라 사고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7세 어린이에 전치10주의 중상을 입힌 한 운전자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자전거를 타고 가던 6살 어린이에 전치2주의 상해를 입힌 운전자는 스쿨존인지 모르는 상태였다는 이유로 불기소됐다. 정말 민식이법이 악법으로 적용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부재한 채, 계속되는 교통사고 피해 아동은 어른들에게 ‘초라니(초등학생과 고라니를 합친 말로 갑자기 튀어나오는 아이들이라는 의미)’, ‘도로 위 시한폭탄’으로 불리게 됐다.
이 같은 사건 발생, 동정, 개선 요구, 무차별 혐오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비단 스쿨존 문제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때도, 세월호 참사 때도 경험했다. 해당 사건은 모두 사회적 재난으로 불렸지만, 사회적 측면에서 해결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개별적인 피해이자 단지 안타까운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들의 피해는 ‘애들이 교통 교육을 제대로 받았으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등의 개인적 수준의 문제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는 시카고 폭염과 관련한 공동체적 해결이 실제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사회적인 원인을 찾고 그에 기반을 두고 대응 전략을 마련했던 행정기관과 그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시민들이 거둔 성과’라고 설명한다. 제2의 민식이, 가습기 살균제 참사, 세월호 희생자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적인 접근과 시민들의 적극적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이상 사회적 재난을 타자화한 채 바라보지 않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건을 타자화하여 바라보는 시선이 문제라는 지적만으로는 ‘결국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 호소하는 것밖에 해답이 없냐’는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동정과 긍정적 관심이 혐오로 반전되는 비극의 원인을 사람들의 태도 문제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사건의 보도 방식’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적 재난을 해결하기 위한 법률들(민식이법, 세월호 특별법 등)은 사회적 재난을 타자화한 이들에 의해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에 따라 법률의 정당성을 다시금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이때 선택되는 방식이 ‘비극적 사건의 재조명’이다. 사건이 알려진 초기의 사람들의 긍정적 반응을 기대하며 다시 한번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은 오히려 사람들의 ‘지겹다’ 등의 부정적 반응만 재생산할 뿐, 여론을 뒤집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같은 악순환의 이유는 언론을 통해 보도하는 방식의 근본적 한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언론을 통한 비극적 사건의 보도를 통해서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전 손택은 그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선택된 전쟁들 속에서 대중매체가 모아놓은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다’라며 ‘카메라에 찍힌 형태인 한,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라고 사진을 통한 비극의 전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사진에 의해 선택되어 전달되는 고통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공감과 지속적인 문제인식을 심어주기 어렵다는 말이다. 언론을 통한 보도 또한 비극의 전달 부분에서 사진과 같은 한계를 지닌다. 전체 사건 중 자극적인 몇 가지 서사들을 선정하고, 피해를 극대화하기 위한 표현을 사용하는 등의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언론 보도 또한 단편적 조명이라는 문제를 갖는다.
더불어 독자에 의해 소비되는 언론의 특수성은 사건의 단편적 전달이라는 문제 이외에도 ‘감정적 호소’에 머무르게 된다는 한계를 갖는다. 실제 앞서 언급한 사회적 재난의 사례들은 특히 아동이 그 피해자가 된 경우가 많았다. 결국 해당 사건들에서는 아동의 피해를 나서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이 느껴졌고, 언론은 이를 십분 활용해 부모의 가슴 아픈 사건으로 사건을 치환해 보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결국 사회적 재난이자 사회적 구조의 결함을 드러내는 사건들이었지만, 이들은 언론의 틀에 담기는 과정에서 단순한 안타까운 감정을 자극하는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보도들은 사건의 실질적인 해결책이 자리하기도 전, 해당 사건들을 ‘지겨운 감성팔이’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같은 감정적 호소의 접근은 동정에서 혐오로 사람들을 쉽게 바뀌게 하는 원인으로도 작용한다. 언론 보도에서 감정적 호소가 효과적인 이유는 독자에게 ‘시혜적’입장에 설 수 있게끔 하기 때문이다. 즉, 독자들은 안타까운 사건을 접하며, 그들의 고통에 ‘동정심’을 갖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형성되는 독자와 피해자의 위계는 곧 독자에게 시혜적 접근을 허용하게 된느 것이다. 물론 이를 통해 관심을 ‘베푼다’고 인식하게 된 독자들은 피해자들을 위한 사회 구조의 개선이 필요하다며 사회에 요구하는 발언자로서 역할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쉽고 효과적인 이 같은 호소는 그만큼 쉽게 변화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애초에 사건에 대한 관심과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느끼는 과정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감이나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동정심에서 비롯된, 시혜적 반응이기에 해당 사건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준다면 긍정적 행위를 곧바로 철회하고 동정심은 약자에 대한 혐오로 바뀌는 것이다. 동정심은 상대가 약자라는 인식을 일부 전제로 하기에, 약자에 대한 혐오가 쉬운 만큼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와 혐오표현을 통한 2차 피해 또한 쉽게 이뤄진다.
더불어 언론에서 주목한 사건의 특징이 감정에의 호소인 한, 해당 사건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 구조 문제의 해결이 필요함을 주장할 수 있는 정당성은 오직 그 사건에 주목하는 독자들, 여론에만 의존하게 된다. 결국 여론의 반전이 사회적 제도 개선 노력의 정당성이 상실된 것 같이 느껴지는 착각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친 여론의 반전은 피해자에 대한 구제책과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만들어진 민식이법은 ‘때법’, ‘민식이법 놀이의 도구’라며 사실과 다른 조롱까지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법안의 정당성을 담당했던 사건의 피해자들은 더 이상 피해자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가 개인적 비극을 경험한 한 사람이 되어 외면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같은 비극이 다양한 사례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비극의 중심에는 사건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앞서 지적한 언론의 보도 방식이 그나마 피해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여 여론의 힘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를 마련하는 효과적인 방안인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소비 시장의 논리를 반복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과 피해를 외면하고자 하는 변명에 불과하다.
앞선 내용에서 민식이 사건을 비롯한 여러 사건들이 사회적 재난으로서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함에도 외면되어져가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원인에 대해 (1)타자화, (2)언론의 보도 방식을 문제삼았다. 그러나 이는 모두 여론의 반전의 원인에 대한 접근일 뿐, 여론이 거의 유일한 실질적 대책 마련의 수단이 된다는 근본적 문제는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피해자를 위해서는 여론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피해 구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개별적 사건의 피해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회가 책임져야 할 하나의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로서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시비에서 자유롭게 피해에 대한 치유가 가능해져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