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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당신은 한국에서 살만하세요?

02.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by 빅아지

예전에 박원순 전 시장이 자신이 여름휴가 때 읽을 책 중 하나로 이 <한국이 싫어서>를 꼽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이 한국의 세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한국에 사는 젊은 세대의 고충을 담은 소설일 거라고 예상했다. 물론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대한 단편적인 비판의 시선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두 번을 연거푸 읽었지만 차마 책에서 내가 주목해야 할 문제점이 어떤 것인지조차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주인공 '계나'의 이야기가 정말 생생하게 남는다.


민음사에서 '오늘의 젊은 작가'시리즈로 나온 책이다.


결국 책을 덮으며 든 생각은 "한국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라는 의문과 "나는 왜 호주로 떠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도저히 나와 계나의 상황적 차이를 찾을 수 없어서 더 답답했다.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한국에 대한 인식을 같이할 수는 없다는 그 당연한 사실에, 많은 사람이 거부감을 갖지 않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소설이다. 글이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인상적이었던 모든 구절들을 전부 적어 보려 한다.


나는 한국에서 살 만한 사람인가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중략)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 11p


한국을 떠나는 계나는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난다고 한다. 이어 한국이 싫은 이유는 곧 본인이 한국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어서라고 말한다.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고' '물려받고' '까다롭지 않은', 한국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한국에서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내 입장에서 나는 그녀가 말한 대로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고', 물려받지는 못하겠지만 까다롭진 않은, 윗사람에게 항상 긍정의 대답만 하려 하는 나도 어쩌면 타고나길 한국에 맞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단지 모두가 그렇게 애쓰는 걸 알기에 타성에 젖어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딱히 비전이 없으니까.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엔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
"그렇구나. 나도 지잡대 나왔어. 같은 처지야."
재인이 웃으며 말했어.
"난 홍대 나왔는데?"


참고로 계나는 '홍대'를 나온 여자다. 그런 사람이 한국에서는 비전이 없다고 하다니. 누가 들으면 기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비전'이라는 건 생각보다 심오한 의미인 듯했다. 대기업에 다니다가 그만둔 그녀에게 비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취업이나 결혼에서의 성취와는 많이 다르다.


"아니, 난 우리나라 행복 지수 순위가 몇 위고 하는 문제는 관심 없어.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난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어."
"하지만 네가 호주에서 살아 본 것도 아니잖아. 여기서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거기 가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어. 동남아 사람들이 한국에 화서 한국인 같은 생활수준을 누리면서 사는 건 아니잖아."
"어차피 난 여기서도 2등 시민이야.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 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
61p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어." 그녀는 단언한다. 행복할 수 없다니. 모두가 행복과 관련된 책을 찾아 읽으면서도 항상 결론은 '마음가짐에 달렸어요'로 끝나는데. 그녀는 아무래도 행복이 마음가짐이 아닌 주변 환경에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언젠가 행복한 일이 생기겠지 도 아니고, 언젠가 행복해질 거라는 다짐도 아닌 애초에 한국에서의 생활이 행복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뭘까.


솔직히 모두가 한국에 만족을 하며 사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그녀의 남자친구 지명처럼 "호주에서 살아 본 것도 아니잖아."라는 식의, 그래도 한국에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계나가 현실을 회피한다고 말하겠지만, 계나에게는 한국에 사는 소위 '경쟁력 없는 사람들'이 수동적이고 회피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벗어난다는 명제는 생각조차 못한 채 오직 한국이 요구하는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나는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 학교 나와서 KBS나 <조선일보> 이런 데 갈 수 있는 거야? 다 서울대 연고대 출신만 뽑는 거 아니야?"
"오히려 공중파 방송사나 조중동은 학벌 안 본다고 하더라고. 경제지나 마이너 신문사들이 대학을 많이 따진대."
하지만 현실에서는, 교내 스터디 모임조차 걔를 끼워 주지 않으려 했어. 스펙을 철폐해야 한다느니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태가 잘못됐다느니 떠들어 대면서 정작 자기들은 스터디 멤버를 뽑을 때조차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더라니까.
55p


이 소설로 누군가 한국의 문제를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들, 진정으로 비판적 행위를 취할 수 있을까. '학벌을 보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명문대만 취급해 준다는 걸 문제라고 떠들면서도. 결국 본인이 속해 있는 스터디에서는 학벌을 따지는 이 모습이 내 미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자신의 이익이 결부된 문제에 대해서는 최대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우선 합리화해 본다) 그렇다고 마냥 내 이익에 솔직하기만 하기에는 사회적 인식 개선의 여지조차 없어지지 않을까. 말로만 비판하는 위선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그 '옳은' 인식을 당당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용기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나는 이민 가서 살 만한 사람인가


영어를 가르치는 백인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어린애 다루듯 해. 외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 한국 사람들도 한국에 있는 동남아 사람들을 어린애 취급하잖아. 그런데 상대가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쉬운 말을 써 주면 그게 배려하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저능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야.
68p


강의에서 같이 수업을 듣는 외국인 분들이 계신다. 대부분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오시는데, 한국인 21학번 학생들이 많은 수업에서 외국인 분들은 대부분 20, 19와 같이 '선배'분들이다. 그런데 과연 한국 학생들이 그분들을 선배라고 생각할까? 조별과제를 하면서 말을 놓은 21학번들끼리 그분들에게까지 말을 놓게 되는 이유는 뭘까.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한국어로 진행되는 조별과제에서 한국어에 서투른 그들을 우리도 계나의 외국인 선생처럼 무의식 중에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함부로 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 가장 근간이 되는 일(해당 국가의 언어 같은)에 서투르다고 했을 때, 그 자체가 내가 그들을 가르치려 들고 어리게 취급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한국 애들은 제일 제일 위에 호주인과 서양인이 있고, 그다음에 일본인과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지. 그 아래는 중국인, 그리고 더 아래 남아시아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데 사실 호주인과 서양인 아래 계급은 그냥 동양인이야. 여기 사람들은 구별도 못해. 걔들 눈에는 그냥 영어 잘하는 아시안과 영어 못하는 아시아인이 있을 뿐이야."
85p


끝없이 발밑을 찾아내 기어코 순위를 매기는 것. 인간들의 공통적인 욕망이자 살아남기 위한 자기 보호 일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우리가 최상위 포식자라 칭하는 그 '서양인'들도 알게 모르게 서로를 구분 짓고 있겠지. 누군가를 비하하기 위해 동시에 다른 누군가를 추앙하는 것, 그 얄팍한 방식은 놀랍게도 안 통하는 때가 없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그런데 지명이 부모님은 예상과 달리 그런 걸 묻지 않더라. 사실 그분들은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난 지명의 가족들이 벌이는 조금 이른 지명의 제대 기념 축하 파티에 불쑥 들어와 자리에 앉은 외판원 같았어. 처음에는 곤혹스러운 취조를 당하느니 차라리 이게 낫다 싶었는데 점점 기분이 나빠지더라고. 지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거든.
80p


지명의 가족들은 계나를 무시한다. 근데 그 무시가 말 그대로 존재 자체의 무시다. 아무래도 그들은 굳이 취조를 해서 면전 앞에서 무안을 주는 과정을 통해서 우월감을 느끼지 않아도, 당연하게 본인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한층 더 두꺼운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그게 너희 가족 수준이야. 서양 부모들이 이런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할까? 안 그럴걸? 서양 사람들은 자식의 이성 친구들에게 최근에 본 영화가 뭔지, 음악은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지, 혹시 재즈는 좋아하는지를 물을 거야. '누구를 좋아한다고? 나도 되게 좋아하는데. 공연 가 봤어?' 그럴 거야."
82p


'서양 부모들은 그러지 않을 거야' 그녀의 서양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한국에 대한 불신에서부터 비롯된 것 같다. 진짜로 서양에서는 그러지 않을지, 아니면 단순한 한국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국이 저런 모습인 건 분명하다. 지명의 여자 친구가 계나가 아니라 지명의 집안보다 소위 '잘난 집안'의 딸이었다면, 전세가 역전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시 많은 사람들은 무시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본인 또한 무시당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상대적 부끄러움을 모른다. (설마 아는데도 저러는 건가?)


"아무래도 한국에서 밴드 하는 게 돈벌이가 되는 일은 아니니까..." 갑자기 지명의 가족들이 생각나서 난 말끝을 흐렸어. 내가 예나의 연애를 막는 게 옳은 일이라면, 지명의 가족들이 지명을 말린 것도 같은 이유로 정당화돼야 하잖아.
123p


그렇다. 계나도 지명의 가족들과 같은 짓을 할 뻔한 거다. 계나의 집안보다 '못난' 집안의 아들과는 결혼하면 안 된다는, 그 익숙한 레퍼토리. 역시 문제의식은 본인이 무시당했을 때 분노에 차서 하는 게 아니라, 무시당하지 않는 상황에서 갖는 게 맞다.



확실한 불행보다는 불확실함이 나아


한국이 선진국이 됐다고, 서울이 옛날이랑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어떤 동네, 어떤 사람들은 옛날 그대로야. 나아지는 게 없어. 내가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어.
103p


'그냥 여기 가만히 있는다고 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은 없어' 계나는 나아질 거라는 보장이 없는 삶을 택하는 대신 '더 망할지도 모르지만 불확실한 삶'을 택한 것이다. 확실하게 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확실한 것. 사실 경제학에서의 합리적 선택이라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지명이랑 같이 있어서 좋은 점, 안 좋은 점들을 생각했어. 좋은 점은 사랑받는다는 느낌, 그리고 경제적인 안정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두 가지. 어떤 애들한테는 그런 게 굉장히 중요하지. 하지만 난 '사랑의 감정'에 흠벅 젖는 스타일은 아니었어. 시를 좋아해 본 적도 없고 사랑의 도주 같은 걸 낭만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그리고 경제적 안정이 제일 중요했다면 아마 리키랑 결혼했을 테지.
159p


역시 각자의 스타일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받는 느낌, 그리고 경제적 안정이 인생에서 큰 효용을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계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각자의 기준이 있을 것이라는 점. 한국의 보편적 기준에 맞으면 편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게 어쩌면 계나가 이민이라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그녀는 절대 한국에 남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도,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아무리 우리가 호주에서 사는 게 급선무이긴 해도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거잖아. 자기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야지. 우리 호주에 온 지 고작 2년이잖아. 그게 아깝다고 진로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인 거 같아.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대학 나딘 거나 고등학교 다닌 거나 지금 이 자리에 서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안 됐고 다 낭비였지, 뭐."
109p


'한국에서 대학 다닌 거나 고등학교 다닌 거나 아무 도움 안 됐고 다 낭비였지 뭐' 탑을 쌓는다고 하지 않나. 그 탑을 무너뜨리는 게 무서워 새로운 전공을 택하지도 못하고, 계속 비슷한 것만 반복하고. 근데 계나에게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의 배움이 탑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차피 쌓여있던 탑도 아니라는 것. 그래서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그저 다른 탑을 하나 새로 쌓기 시작할 뿐이라는 거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은 생각보다 큰일이 아닐 수 있다.


"만약 남극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파블로를 잡아다 헬리콥터에 태워서 하와이에 내려다 줬다면...파블로는 그래도 행복했을까?"
"똑같이 하와이에 왔다고 해도 그 과정이 중요한 거야. 어떤 펭귄이 자기 힘으로 바다를 건넜다면, 자기가 도착한 섬에 겨울이 와도 걱정하지 않아. 또 바다를 건너면 되니까. 하지만 누가 헬리콥터를 태워 줘서 하와이에 왔다면? 언제 또 누가 자기를 헬리콥터에 태워서 다시 남극으로 데려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할 수 있어. 하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행복해질 순 없어. 나는 두려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160p


더 큰 두려움은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에서 온다. 정해진 듯한 미래에, 그저 한국의 '흔한 누군가'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는 예상과, 그것이 현실임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은 그녀에게 탑을 새로 쌓는 것보다 훨씬 두려운 일이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계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거나 단순히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매도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혹여 그녀를 보며 '다 그렇게 살아'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건 한국에서 나름 적합한 사람의 조건을 '타고난' 본인에게 해야 할 소리일 것이다.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지켜 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내 고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를. 그래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 줄 구성원을 아꼈지. 그리고 못난 사람들한테는 주로 '나라 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줬어.
170p


'대한민국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 우리나라처럼 현실적으로 왜곡된 능력주의가 만연한 사회도 없을 것 같다. 대한민국의 영광이 되는 사람들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노력해서'로, 못난 사람들에게는 타고나길 불리했음이 아닌 '노력이 부족했음'을 지적하는 건 타고난 사람들이 본인의 노력보다 더 큰 수혜를 받기 위한 얄팍한 수가 아닐까. 그 얄팍한 수가 꽤 많은 사람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쓰고 보니 스스로가 너무 꼬였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이 싫어서' 라는 제목에서부터 이 같은 불편함의 연속을 노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한국이 싫은 이유, 그리고 당신이 한국이 싫은 이유. 또는 한국이 좋은 이유에 대해 고민하라고 던져 줬으나 안타깝게도 내가 한국이 싫은 이유가 좀 많았던 거다. 한편으론 계나의 모든 행동을 '한국의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행동'으로 매도해 버린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그래도 한국에서 경쟁력 없는 인재라는 걸 깨달았음에도, 경쟁력 있어 보이려 애쓰는 나라는 사람의 해석으로는,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한 줄로 세우지 않고는 못 사는 이 근성 덩어리 가득한 사회 속에서 적어도 나는 남들의 기준에 따라 기가 죽거나, 누군가의 위치를 판단하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애쓰지 않아도, 떠나지 않아도 한국에서 살 만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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