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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모순 그 자체가 맞았다

01. 양귀자 <모순>

by 빅아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사실 살짝 걱정이 됐다. 끈기가 없어서 한 시간 짜리 드라마도 넘기면서 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내가, 저렇게 긴 호흡이 장편소설을 읽을 수 있을까. 그렇게 지난 일주일 간 걱정과 함께 책을 읽었다. 그래도 학교 갈 일이 많은 덕분에 읽는 빈도는 많았다. 눈이 안 좋아 휴대폰을 보는 게 힘든 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매일 1시간 정도 읽게 된 이 소설에는 긴박함이 없음에도 뒷 내용이 계속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2쇄마다 책 표지 색이 달라진다고 한다. 꽤 두껍지만 종이 재질 덕분에 가볍다.




더욱 나쁜 것은, 아직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으면서 두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해서 결혼을 해버릴 수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나'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급히 결혼을 해야 할 이유가 내게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결혼 말고 내 삶의 부피를 늘려줄 만한 어떤 일이 내 앞에 있는 것도 아니다. 빈약한 인생을 걱정한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결혼에 빠져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어리석은 판단에 사로 집히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충분한 검토를 거치겠다는 각오만 열렬하다면 말이다.
<모순>, 17p


이 책은 소설의 주인공, 안진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녀가 스물다섯의 나이에 두 남자를 두고 고민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의 삶을 변명하기 위해서' 그녀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모와 일란성쌍둥이다. 어릴 땐 부모조차 구분하지 못했을 정도로 정말 닮았던 둘이었다. 만우절인 4월 1일 같은 날 결혼을 했지만, 그 결혼은 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다 읽은 뒤에야 느끼는 것이지만, 결국 내가 읽은 모든 이야기는 안진진 그녀가 누구와 결혼을 하게 되는가. 그 결정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에 대한 설명으로 가는 통로였다.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의 이야기. 그녀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가지는 의미, 동생에 대한 감정, 이모와의 각별한 일화들. 그녀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그녀를 설명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녀의 가족들에 대해 지금 떠올려 보면 나름대로 내가 느낀 그들 각각의 특징을 한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 속 인물일지라도 본인의 삶이 한두 문장으로 정의되는 걸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는 책 속 구절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단칼에 아버지를 해석해버리는 것이 나에겐 늘 의문이었다. 아버지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아버지 스스로도 사람들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쉽게 판단하고 생각을 그쳐버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치욕이었다.
<모순>, 83p


모두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가지고자 한다. 아무리 '보편적으로' 옳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에게는 그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두 문장으로 쉬이 설명될 수 없는 어떠한 긴 사연이.


얼마 전까지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커뮤니티 사이트 몇 개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에브리타임에, 그다음에는 교내 전용 커뮤니티, 이어서는 타 익명 사이트까지. 특히나 각 커뮤니티의 '비밀게시판' 역할을 하는 곳은 정말 특이했다. 모두가 분노에 싸여 있었고 모두가 이상한 사람 같기만 했다. 저런 사람이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음에 매일 충격이었다. 가끔은 그들이 하는 것처럼 누군지 모를 그들을 마음속으로 혐오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렇게 지금 보면 그보다 음침할 수 없는 공간에서 벗어나 학교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을 때, 느껴졌다. 한 문장으로 표현된 그 짧은 의견들이 사실은 내가 받아들인 그 의미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고. 이상한 사람들이 밖에서는 정상인 척을 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이 정상인 사람들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그래서 얼굴도 모르는 익명의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다른 맥락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저 책 속 말들을 모두에게 각자의 서사가 있다는 걸로 받아들였다. 사건 하나도 기사에서 헤드라인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독자가 받아들이는 방향이 그렇게 달라지는데, 한 사람의 인생을 타인이 한두 문장으로 정의한다는 것만큼 경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솔직히 내 삶이 누군가에게 그들의 시선으로 해석되고 정리되는 게 너무 불쾌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느껴지기에 저런 행동을 경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모든 생각은 자기중심적이고 내 위주일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모두가 자신만의 생각으로 인생을 살고 있기에 각자의 인생이 더욱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어.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우리들 머릿속을 오고 가는 생각,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무엇으로 살았다는 증거를 삼을 수 있을까. 우리들 삶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것이 아버지가 가르쳐준 중요한 진리였어. 아버지가 잘못한 게 있다면 너무 많이 생각했다는 것이지. 자기 용량을 초과해 버린 거야. 그러면 곤란하다는 것도 우리 아버지가 내게 남긴 교훈이고.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이 한평생 살고도 못 가르쳐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어. 그것으로 이미 우리 아버지는 자식한테 해줘야 할 의무를 다했다고 봐." "아버지는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어. 난 아버지를 사랑해."
<모순>, 177p


난 안진진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버지가 크게 일조한다고 믿었다. 근데 그마저도 너무 경솔한 내 위주의 생각이었던 거다. 그녀는 적어도 아버지 때문에 불행하지는 않았다. 가족을 책임지지 않은 건 잘못된 거라는 이종사촌의 말에 아버지에 대해 변호하는 안진진은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울 것 같은 딸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는 당신의 삶에 대해 저렇게 큰 의미를 더해준 딸을 둔 것만으로도 그 누구보다도 성공한 삶을 산 것은 아닐까.


"그럼, 뭘로 맞춰봐요?"
"여기 있잖아? 언제나 잊어버리지 않고 지니고 다니는 것. 바로 이 손!"
아버지는 자기 손과 내 손을 활짝 펴게 해서 서로의 손바닥을 맞닿게 했다. 여덟 살 어린 계집애의 작은 손과 서른여덟 살 아버지의 큰 손은 잘 맞춰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말했다.
"지금은 안 맞지만, 안 맞아서 슬프지만, 나중에는 자로 잰 듯이 딱 맞는 날이 올 거야. 알겠지? 그때까지 반쪽의 비밀을 잘 간직하는 안진진이 될 거지?"
<모순>, 89p


그녀가 아버지와 꾸준히 긴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준 계기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 보는, 익숙하기보다는 어색하다는 게 맞는 부모를 가진 사람은 그들만의 부모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냥 던진 말 한마디로 그 기억을 만들어나갈지도 모른다. 남들처럼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것에 결핍만이 남지 않는 한, 특별한 아버지를 가졌다는 것이 자부심이 될 것이다. 결국 본인이게 주어진 상황을 해석하는건 자유니까. 안진진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모순>, 296p


경험해 보지 못하면 모른다. 그래서 모든 삶은 의미가 있다. 누군가는 그녀가 자라온 환경을 동정하겠지만, 그랬기에 그녀는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됐다. 누군가는 어떤 삶이 의미가 없다고, 불행하다고 하겠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본인의 상황이 그렇게 만든다면 기꺼이 그런 인생을 받아들일 것이다. 나에게는 다를 수 있으니까, 겪지 못하면 모르는 무언가가 모두에게 하나쯤은 있으니까.





나에게 이 책은 반성으로 남았다. 나의 불행이라는 것도 나만의 불행일 뿐,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평소 모든 사람은 자기중심적이라는 걸 인생 문구로 삼던 내게 그 이상의 가능성과 인생을 알려 준, 그래서 더 나아가 모두는 편협하다는 것으로 수정하게 만든 책이다. 너무 현실감 있어 차마 책 속 인물에게 실례가 될까 뒷 내용을 상상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그 정도의 몰입이 계속됐다.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으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모순>, 작가 노트, 303p


모든 게 모순이다. 내가 지금까지의 인생으로 다른 사람의 말로 그들의 인생을 예단한다는 게, 나만의 기준으로 타인의 행복과 불행을 재단한다는 게. 그럼에도 인생에 대한 해석에 왕도는 없기에 이런 실수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적어도 모순의 존재를 상기한 것으로 큰 경솔함만이라도 피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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