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에 다니던 직장을 퇴사했다. 퇴사한지 3개월이 지났나? 지긋지긋했던 전 직장에서의 시간들이 아득히 먼 과거로 느껴진다. 일주일을 쉬고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다. 국장님이 혼자 운영하시는 일인약국에 근무약사가 됐다. 생각보다 괜찮은 조건이였고 무엇보다 집에서 가까웠다. 출퇴근 시간이 한시간이었던 전직장과는 달리 운전해서 오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의 직장이라니. 무려 한시간이나 더 잘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직장 생활이 시작됐다.
우리 국장님을 소개하자면.. 백발의 인자한 눈웃음을 짓고 계신 가운입은 할아버지 약사님. 약국 벽에 걸린 국장님의 면허 년도를 보고 헉했다. 1960년도.. 올해 일흔이 된 국장님이다. 올해 서른이 된 나와 국장님 사이의 세월은 내가 지금껏 살아온 것보다도 더 긴 세월인 셈이다. 일년을 약사로 일하는 것도 지루한데 무려 오십년 가까이를 이 일을 하고 계신 국장님이 대단해보였다.
출근하면 항상 국장님만의 하루일과가 있다. 나보다 한시간은 먼저 출근하신다. 도매상에서 도착한 약을 정리하고 조제실에서 사용할 도구들을 깨끗하게 청소하신다. 손이 많이 가는 약은 조제대 가까이에, 이제 잘 찾지 않는 약은 본인이 기억할 수 있는 위치에 차곡차곡 정리한다. 조제실에는 국장님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있다. 병원에서는 누구나 약을 찾기 쉽게 보통 가나다 순으로 약을 정리한다. 하지만 이 곳은 국장님만의 방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약 위치를 익히는데 한달이 걸렸다.
나는 아홉시에 출근한다. 출근 후 한시간 정도는 환자가 적다. 퇴사때 선물받은 오설록 차를 매일 다른 맛으로 우려 마신다. 따듯하게 한잔 마시고, 자주나가는 약을 기계에 채운다. 국장님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본다. 종이 신문. 매일 신문이 배달되는데 조제대 위에 신문을 펼치면 조제대가 꽉 찬다. 가끔 점심시간에는 신문 위에 발을 올려두시고 곤히 주무신다.
동기 열여섯명이랑 왁짜지껄하게 병원생활을 하던때와 지금은 너무 다르다. 일분 일초도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던 그때와 다르게 동네약국 생활은 여유롭다. 코로나로 인한 어쩔수 없는 여유일수도. 여유로움이 좋을 때도 있지만 심심할때도 있다. 국장님과 실장님과 나. (실장님은 국장님의 아내이다. 전산을 주로 맡아서 하신다). 약국에 방문하는 어르신들은 가끔 나를 보고 딸이냐며 물어보기도 하지만 실장님은 나를 새로 온 약사님이라고 소개한다. 국장님과 실장님이 편하게 해주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나 편한 존재들은 아니다. 어쨌든 나를 고용한 분들이니까. 약 조제는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되므로 항상 긴장하며 있어야 한다. 여유를 즐기되 언제나 항상 긴장하는 상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오후 세시쯤이다. 해가 조금씩 지면서 햇살이 약국 현관문을 넘어 따스하게 들어온다. 현관문 쪽에 올려둔 다육이 식물들이 햇살을 맞는데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나도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좁은 약국에 수 많은 다육이와 식물이 있는데 이건 실장님의 취미다. 참 다부진 어른이다. 이렇게 바쁜 약국 생활에도 식물 키우기, 뜨개질, 베이킹까지.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국장님, 실장님, 나. 우리 셋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약국을 지킨다. 그렇게 매일 버틴다. 내가 하루에 스치는 환자는 칠십명 즘. 언제부턴가 삶이란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라고 인지한 순간부터 나는 하루에 칠십여개의 이야기를 만나는 중이라는, 생각을 한다. 만나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기억하고, 마음 속 이야기를 이곳에 조용히 읊고 싶다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