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연애할까요

여는 글

by 이성진

내일의 눈꺼풀을 들어 올릴 자신이 없을 때면 곱씹는 어구가 있다. 푸시킨이 그랬던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제안하는 어투를 보면 뒤에는 어째서 슬퍼하지 말아야 하는지, 왜 노하지 않아도 되는지가 이어지겠지만, 시의 첫 구절에서 그대의 가슴이 울렸다면 아마 삶이 속였다는 표현의 당돌함에서가 아닐까.


준비했던 공모전에 또 떨어졌다. 정말이지 삶은, 어떻게든 나를 속이려 든다. 내가 속았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은 온라인 게임 아이템 거래 하나에서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삶이 나를 속인다는 건 당근마켓 판매자가 속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굳이 같은 점을 꼽자면 모든 속임에는 일종의 기대가 전제된다는 것이다. 야바위꾼의 컵 안에 주사위가 있는 곳을 내 눈이 틀림없이 따라갔을 거라는 자신감이나, 테마주나 코인에 편승해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소망 따위의 것. 다시 말해, 삶이 나를 끊임없이 속이고 있다면 그건 내가 지독히도 삶에 기대를 걸고 있음을 반증하는 일이다.


내일이 오늘보다 좀 나았으면 하는 소망을 비난할 수 있는가. 오늘보다 나은 내일, 예년보다 풍족한 올해, 더 높은 자리, 더 의미 있는 삶의 형태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영화 제목의 물음에 내놓아도 나쁘지 않을 답안이다. 닿고 싶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맞게 노력하다보면 기대는 미어캣처럼 눈치 보며 스멀스멀 고개를 내놓는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댔는데, 뭐 나름 열심히 하기도 했잖아?


사소한 일상의 습속은 가치관을 낳고 가치관은 모양이 굳어 세계관이 된다. 인간은 그 세계관,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을 생성하며 동시에 지배당한다. 거푸집 없이는 쇳물이 모양을 잡을 수 없듯 세상살이를 대하는 틀인 관점은 삶을 삶답게 빚어내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삶이란 녀석과는 기대를 천장에 굴비 매단 듯 걸어두고 질리도록 싸웠다. 천장을 한 번씩 쳐다보면서 가끔은 아등바등 이겨먹기도, 이따금 못 이기는 척 져주기도, 때때로 서로를 외면하거나 이용해먹기도 했다. 삶과 다투다 보면 삶은 투쟁의 대상이 된다. 삶과 사글사글하게 지내다 보면 삶은 타협의 대상이 된다. 마냥 수긍하는 인간에게 삶은 그저 주어진 것이라 바꿀 수 없는 무언가일 테지만 마냥 저항하는 인간에게 삶은 주어진 것이기에 그저 바꿔야 하는 무언가인 것처럼.


틀에 사고가 구속되는 한편 그 틀을 짜낼 수 있는 되먹임의 존재라는 걸 수긍하고 나니 문득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졌다. 내 세상살이의 틀이 어딘가, 자기만의 모습으로 이르기를 바라며 종종 들렀던 학교 앞 카페 이름을 빌려 ‘세상과 연애하기’로 지었다. 한때는 터질듯한 기쁨으로, 가끔은 요동치는 분노로, 이따금은 작열하는 갈망으로, 권태와 고통을 사이사이에 끼워놓던 과거를 톺아보면 생은 한 면만 보고 그 전체를 감지하기에는 시리도록 다채로웠다. 죽일 만큼 밉다가도 죽고 못 살 정도로 좋아지는 변덕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상대방이 없는 하루를 상상하기 어려워졌다는 진부한 사랑 고백을, 얼마 살아보지도 못한 제 삶에 한다면 좀 괴상망측해 보이려나.


그렇지만 여섯 가지 맛을 하프갤런으로 꾹꾹 눌러 담은 아이스크림처럼, 한데 섞여있지만 또 따로 노는 삶의 향연을 나는 도무지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잘 다니던 대학원을 휴학하고 에버랜드에서 손님과 함께 춤을 춘 것도, 한 번 다녀온 군대를 제 발로 또 들어가 훈련을 받은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등산로가 안내하는 길을 걷자면 감사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수백 년간 이 땅을 거쳐 간 선인들이 밟아 반반하게 다져진 흙바닥, 파여 들어간 자리 표면에 엉켜 드러나 어깨동무하는 나무뿌리는 산객의 발판이자 지지대가 됐다. 자연을 흉내낸 나무빛 데크는 태는 조악할지언정 깎아내린 절벽의 경사마저도 한 걸음씩 걸어내면 못 오를 곳 하나 없다고 힘을 주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따금 길이 아닌 곳을 부러 찾아 걸었다. 혼자 걷는 듯해도 산구절초가 반기고 못생긴 바위들이 웅장하게 줄지어 나를 지켜보고 있으면 외롭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길을 잃어보는 데서 오는 오묘한 맛, 이를 탐하는 미식가적 태도가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나만의 방식이란 걸 알아차리는 데 오래 걸렸다.


싸우다 정이 들어버렸나. 이제는 얘도 나를 좀 알고 나도 얘를 좀 안다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오래 본 친구는 웬만해선 크게 다툴 일도 없다. 애초부터 영혼의 아귀가 딱 들어맞아 그런 게 아니라 어디가 모가 났고, 어디가 흠이 있는 만큼 한편으론 잘난 녀석인지를 몸으로 부대끼면서 체감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벽을 무너뜨리면서도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는 선을 부단히 싸우면서 터득했기 때문이다.


펜싱이며 클라이밍이며 철새같이 운동을 여럿 스쳐갔지만 연금 같은 허벅지 하나는 남겼다. 무엇인가 꼭 되고 싶어 삶에 기대를 걸고, 오래된 친구에게 또 속고 슬퍼하며 제 반쪽을 원망하기에는 내 튼튼한 다리가 아깝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 나는 해적왕이자, 집시이자, 조르바이자, 디오게네스이다.


『장자』에 나오는 말마따나, 칭찬이나 비난에 무심한 채 용이 되기도 하고, 뱀이 되기도 하면서 흐르는 대로 살아가고 싶다. 무언가 되겠다고 떼쓰지 않고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세상 만물과 더불어 살아가되 세상 만물과 다투지 않아 그것에 부림 당하지 않는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