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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종 Sep 11. 2019

[벌새]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결코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규범과 의무에 균열을 내는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꼭 지켜져야하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어긋나는 동안, 결정적으로 모순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사례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입을 틀어막아 숨 차오르게 하므로.

 누군가는 존재만으로 어떤 사람들의 뒷목을 잡게한다. 퀴어 퍼레이드에 참석한 사촌 동생, 몇 년째 취업하지 못하고 공무원 시험을 보는 사촌 형, 우리 집안의 경우에는 교회를 나가지 않는 그 모든 인간들이 쉽게 미움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길, 동성애는 죄악이며, 대기업에 취업해서 승승장구 해야하며, 불신은 지옥이기 때문에. 그들이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는 동안, 어떤 이들의 존재는 쉽게 부정당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의 말은 매일, 매순간 곳곳에서 사람들을 파괴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 <벌새>의 주인공 '은희'는 옳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규범에서 조금씩 벗어난 존재로 그려진다. 그녀는 학구열이 뜨거운 대치동에 살지만, 공부를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실시한 '날라리 투표'(실시한 선생은 꼭 해고 당하길)에서 1등을 차지하고, 담배를 피우며, 춤을 추러 다닌다. 원색적인 욕을 하고, 친구와 함께 도둑질을 하다가 문방구 주인에게 잡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모습들이, 은유적인 의미에서든 아니든 간에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날은 욕을 마구 뱉을 수 있고, 공부를 (당연히) 안 할 수 있고, 확장하자면 담배까지도 피울 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바꿔말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그 모든 규범들이, 어떤 날의 우울한 기분, 바람, 빛과 온도에 따라 아주 쉽게 부정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식탁 위에서, 카페에서 원론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쉽게 '학생이라면, 딸이라면, 여자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억의 덩어리를 꺼내 조금만 만져본다면, 따라야만 하는 당위는 당신의 주변에 줄곧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당신을 얼마나 괴롭혔는지도. 규범은 그것이 틀리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경우 폭력이 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누군가 은희의 행동들을 '비도덕적'이고, '일탈적인' 것으로 규정하겠다고 한다면, 나는 물론 그것에 동의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은희가 미움을 받고, 누군가에게 혼이 나는 많은 상황들이 특정한 사회적 잣대에서 어긋났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많은 규범이 은희를 아프게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역할은 성별이 차지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상당히 어이없는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은희는 오빠에게 욕을 했다가, 물리적인 폭력을 당한다. 가정 폭력이다. 이 사실을 아빠에게 말하지만, 아버지는 "그만 좀 싸워라."라는 말로 사건을 일축한다. 심지어 뺨을 때려 은희의 고막이 찢어진 상황에서도 "아빠가 보는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라는 말을 뱉는다. 이 지점에서 아들이 혼이나는 이유는 동생을 때려서가 아니라, 아버지 앞에서 예의를 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막이 찢어진 것에 대한 별다른 언급은 없다.

 폭력을 용인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아마 이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아온 그들은 폭력적인 사람이 '일관성있게' 난폭할 것이며, 차별적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아마도, 아버지는 어느정도 딸 바보로 그려진다. 딸이 큰 병원에 가야한다고 하자, (이 장면에서 나는 아버지가 “가만히 있으면 낫는다.”는 둥의 헛소리를 할 줄 알았다.) 예약을 다 해놓을테니 걱정말라고 말한다. 또한 수술 진단을 받았을 때는 병원에서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린다. 그 모습을 보는 은희의 표정은 오히려 물음표 투성이었던 것 같지만. 얼핏보면 아버지가 은희에게 하는 행동에서 어떤 '사랑'이라는 것이 느껴지기도 할 정도다. 물론 그것은 -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는 은희의 고통을 모두 뺄 수 있다면 -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은희에게 뺨을 아무렇지 않게 날리던 오빠가, 밥을 먹다가 성수대교 붕괴 때문에 오열하는 장면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관객들은 스크린을 통해 이 같은  차별주의자들의 입체성과 모순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가 그렇지 않은 척 연기하는 그들에게 필요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따뜻한 면모를 강조함으로써 가담한 폭력들을 은폐한다. 물론 주변에서 발생하는 미시적인 폭력은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간은 딸을 사랑해서 그녀를 위해 울면서도, 그녀가 맞는 행위를 용인하는 모순성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나는 여전히 그 모든 폭력들이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이들은 <벌새>가 94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고, 2019년인 지금 동생을 때리게 두는 집이 어디있겠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집은 당연히 있다. '영화잖아'라고 말하며 그런 집의 존재 여부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비슷한 류의, 공론화되지 못하고 가시화되지 않은 폭력들을 저지르고 있을 것이라고 강하게 믿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보며 가슴이 저민 사람들이야 말로 폭력을 경험했던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어떤 문제도 못 느낀 채 지루했다는 평을 쏟아낼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추가로 은희의 엄마와 영지라는 인물에 대해 말하고 싶다.

 줄곧 영화를 보며 마음에 걸렸던 것은 은희의 엄마다. 그녀는 은희에게 공부를 꼭 열심히 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라고  말한다. 외삼촌의 발언이나, 서당을 바라보는 장면을 연결지어 생각해본다면, 학구열이 있었음에도 시대상 속에서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맥락을 유추할 수 있다. (단서는 충분한 듯 하다.) 좌절된 그녀의 꿈은 가정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한 여성이자 엄마를 남길 뿐이다. 바람난 남편과 싸우며 상처를 내서 응급실로 보내고도 그 다음 날 그와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태평하게 웃는 모습은, 상황에 길들여진 그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꺼림칙하면서도 애잔하다. 그 때 남편이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바보들!"이라고 뱉는 말은 의도치 않게 자조적인 말이 된 것만 같다.

 

 많은 말로 영지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위로 하는 존재다. 담배를 피우며, 서당 원장의 말에 따르면 이상하기도 한 그녀는, 은희에게 누구보다 힘이되는 존재다. 영화 상에서 드러난 일부 설정들을 기준으로 그녀의 특성에 대해 말할 생각은 없다. (물론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녀가 중요한 이유는 그녀가 하는 말들이 곧 이 영화가 가진 힘으로 기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지는 영화 내내 줄곧 은희를 위로한다. 다치고 상처받은 은희라는 존재를 단순히 영화 속 등장인물로 상정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은희는 94년 가정 폭력에 희생당하면서, 김일성의 죽음과 성수대교 붕괴사건을 경험한 사회 속의 존재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개인의 서사로 보이는 은희의 이야기는 분명히 사회의 서사와 맞닿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가 건네는 위로와 격려는 스크린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관객을 위로한다. 상처받은 존재들에게 말을 건다. 어쩌면 서당에서 출석을 부르고 자기 소개를 요청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한 명씩 호명 당했던 게 아닐까.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서사가 사회를 위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벌새>의 서사는 결코 픽션이 아니며, 어떤 시대상에 대한 진단인 동시에 은폐된 사실들의 전시일 것이다. 재현된 모순들이 누군가의 머리를 명징하게 때려주길 바라며, 가장 사적인 이야기에서 지극히 공적인 내러티브를 찾게 해준 감독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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