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당위가 웃음 앞에 무력해지는 일들을 보고 있다.
2달 만에 이 채널의 구독자가 250만 명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놀라운 것은, 매 주 업로드 되는 영상의 조회수가 10시간 만에 100만회를 넘긴다는 점이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장성규의 직업 체험 에피소드를 담은 <워크맨>의 이야기다. 전례 없다고 해도 좋을만한 성장세를 보이는 이 채널의 총 조회수는 8700만 회다. (굳이 나눠보자면 영상 당 평균 조회수는 500만 회다.) 조금만 둘러보면 워크맨의 콘텐츠와 장성규의 성장을 체감할 수 있다. SNS에는 그의 과거 아나운서 오디션 영상이 올라와 인기를 얻고 있고, 크고 작은 유튜브 채널들이 워크맨 고유의 편집 방식을 따라하고 있으며, 종편 방송국들도 이 채널의 자막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다. 또한 새로 런칭하는 JTBC 프로그램에 패널로 섭외되기도 했고, '서브웨이' 광고도 찍었으니, 그가 현재 갖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장세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들이 열심히 웃음을 유발하는 동안, 컨셉으로 포장된 ‘막말’이 소수자에 대한 어떤 폭력들을 용인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도덕적 당위들이 무력해지고 있다고 느끼므로.
인기를 얻는 요인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워크맨의 콘텐츠가 분명히 재미있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고용-피고용의 위계구조에서 자유로운 남성이 상사에게 거침 없이 뱉는 말과 정체모를 드립들이 주는 효용이 분명히 존재한다. 수많은 피고용자들이, 일상적 공간에서 발견할 수 없는 체제전복적인 발언들에서 억압된 욕망을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의 또렷한 발성이 가미된 선명한 진행과 준수한 외모도 모두 인기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중 프로그램을 관통하는 코어를 꼽아본다면 다름 아닌 막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상을 조금이라도 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이에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워크맨 채널의 컨셉이기도 하지만, 여러차례 '선은 넘으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선넘규'라는 별명을 얻은 그의 (연예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원론적으로 막말이란 것이 어떤 현실감을 갖고 우리 앞에 나타났었는지 생각해본다면,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8분 내외로 압축된 5시간의 촬영 분량에 오디오가 빌 틈은 없다. 그 날 체험할 직업 현장에 가서 인사를 하고, 일을 수행하고, 마무리를 한 뒤 시급까지 계산하는 과정을 모두 거쳐야 하며. 그 사이에 장성규가 뱉는 모든 '막말 유머'도 담아내야 한다. 일단 시작하면 정신 없이 쏟아진다고 보면 되는 셈이다. 시청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대게 빠른 속도감과 승차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장성규의 캐릭터에 대한 긍정적 인상이 강화되는 것도 물론이다. 그러나 8분 동안 당신을 스쳐지나간 막말 퍼레이드를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어딘가에 유머로 포장되어 은밀하게 숨어있는 폭력들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신이 (만약 그렇다면) 그 동안 그것을 놓친 이유는, 뭔가 지나친 듯 보이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발언들이 '막말'과 '유머'라는 설정에 의해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컨셉'이 폭력을 용인하는 일들에 대한 경고이자, '유머'라는 이유로 보호받는 개그의 성역에 균열을 내는 시도이며, 대중적인 유머의 기준에 의문을 제시하고자 하는 글이다.
9월 6일 게시된 게임 회사 체험 에피소드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장성규가 게임 캐릭터 계약 건과 관련해서 대화를 나누다가, PD에게 '병신'이라고 외친다. 여기서 '병신'은 그가 구사하는 막말 '유머' 중 하나다. 하지만 목적이 원색적인 비난이든, 사전적 정의든, 대중적 의미에서 개그로 사용되는 용례에 부합하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는 장애인 혐오다.
도덕적 당위에 대해 말하고 싶다. 만약 2019년 현재,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을 사용해도 되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거의 제로에 가까울 거라고 믿는다.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서 장애인 혐오는 민주 시민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에 대한 사상적 토대가 형성된 것도 3세기를 훌쩍 넘었다.) 그렇다면 사전적 의미로 '신체의 기형성'을 의미하는 병신이라는 단어를 유머로, 욕설로 사용하는 것은 가능한가? 200만 구독자를 지닌, '아나운서' 출신의 남성이 병신이라는 말을 뱉고, 그것이 편집을 거치지 않은 채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많은 이들이 이것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히 나는 이보다 더 많은 막말들이 편집의 과정을 거쳐 논란을 피해갈 수 있었다고 본다.)
여전히 대중적 유머가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소수자를 욕설과 유머로 사용하는 공간에는 그들의 존재가 지워져있다. 만약 병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가족이나 친구 혹은 지인 중 장애인이 있다면 그것을 욕설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또는 모르는 이의 경우라도 옆 테이블에 장애인이 앉아있다면 그것을 유머로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익명성과 관련된 문제이며, 당신이 그들(장애인)이 어떤 선천적 조건으로 느끼는 불행함을 유머로 표현하는 순간들을 목격하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경우에는 뱉을 수 없는 말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가족을 비하하는 '패드립'이 많은 경우 분노로 이어지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다. 익명성이 없는, 친밀하고 가까운 존재들이 유머나 비하로 호명되는 일에 인간은 쉽게 분노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대중적 유머 코드로 용인되었다고 볼 수 있는 '워크맨'의 잠재적 시청자에 '장애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출연진인 장성규와 편집자를 비롯한 모든 제작자는 장애인이 느꼈을 어떤 불편감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일 확률이 높다. 여전히 유머나 개그가 어떤 '정상성을 가장한 다수'의 영역 내에서 생산되고 있고, 폭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현실의 반증이다. '병신'과 '장애인'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은 의미상 경중을 지니고 있을 뿐 그 의미의 구분마저도 합리화를 위한 다수의 관점이며, 소수자를 배제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나의 경험으로, 크건 작건 비하 발언을 정당화하는 이들의 논리 속에는 '유머'와 '실제 의미'를 구분하려는 시도와, 자기 모순에 대한 부정이 담겨있었다.
다음은 7월 12일 게시된 영화관 아르바이트 체험 에피소드의 한 장면이다. 두 남학생이 표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장성규가 그들에게 커플 여부를 묻는 상황이다. 이 장면은 장성규가 성소수자에 대한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만한 여지를 준다. 그러나 물음표로 점철된 남학생의 표정과 부정적 반응으로 꾸며진 이 장면은, 그간 예능이 허용한 '개그' 코드를 떠올려 본다면 그리 안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리얼리티라는 점을 고려해 현실 감각을 접목 시켰을 때 장성규는 두 사람을 아웃팅시키는 발언을 한 셈이다. 커밍아웃은 혐오가 압도적 다수를 점유하는 한국적 맥락에서 성소수자들에게 민감한 이슈 중 하나다.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삶의 의미과 직결된 중요한 사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대선 토론에서 (성소수자도 아니고) 동성애를 정치공학적 무기로 사용하려는 수작들을 보고 있지 않은가.
위 장면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만약 두 남학생이 실제 게이 커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인정하는 발언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높은 조회수를 찍어내는 콘텐츠의, 공개적인 채널에 자신들의 존재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고 싶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도 물론이다. 이 말은, 그들이 실제 동성애자 커플이더라도 그들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약 긍정적으로 대답했다고 하더라도 안정성을 추구하는 여타 채널들을 떠올린다면 편집되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도 예측할 수 있다.
반대로 두 사람이 성소수자가 아니라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이성애자들이 성소수자들의 존재와 관련한 이슈를 가벼운 유머로 치환한 셈이 된다. 흔히 남성 커플을 두고, 실제 동성애자가 아닌 '브로맨스'라고 설명하는 일련의 콘텐츠들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 놓여있다. 이성애로 귀결시키며 논란을 피하는 대신, 동성애의 존재는 직접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용례에 해당한다. 이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당사자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코드다. 결론적으로, 커플이냐고 묻는 장성규의 발언은 그 어떤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는 질문이다. 물론 호모포비아들에게 긍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어디까지나 존재를 한번 더 상기했다는 점에 한해서만.
마지막으로 8월 30일 방영된 편의점 에피소드에 대해 말하고 싶다. 윗 장면은 고객과 점심 메뉴에 대해 말하다가 중화요리를 "짱깨"라고 표현한 장면이다. 특정 민족에 대한 비하의 의미를 내포한 단어로 메뉴를 지칭하는 일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유머의 언어작용이다. 짜장면이라는 음식 이름을 말할 때 특정 민족을 지칭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왜 인가. 한국 내에 뿌리 깊게 내린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고려해본다면, 이것이 앞서 서술한 '유머'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사진은 여성 고객에게, 요청하지도 않은 담배를 묻는 장면이다. '농담'이라는 자막도 함께한다. 당연하게도, 이 ‘농담’은 - 재밌는가? -성차별적 사고에서 기인한다. 만약 고객이 남성이었다면, 뜬금없이 무슨 담배를 피우느냐는 말이 농담으로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여성 게스트를 두고 담배 드립을 일삼는 '아는 형님'에 장성규가 출연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여자는 담배 피우면 안 되죠"라고 했다면 어떤 반응을 이끌었을까? 보나마나 시원하게 뭇매를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친절하게 자막에도 적혀있듯이 '농담'이라고 포장되는 순간, 성차별적인 발언도 유머가 된다. 이것이 컨셉으로 허용되는 '유머'가 위험한 이유다. 성차별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유머는, 그 기저에 존재하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전히 유머라도 남성에게 담배 드립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깊게 뿌리내린 사고방식에 반하는 경우를 메타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유머가 기능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천 앞에서는 도덕적 당위가 무색하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숨쉬듯 소수자와 약자를 보호해야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사고를 경유하는 언어관은 여전히 무관심하다.
표현이 차별의 사회적 현실을 구성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대중적 지지 위에 성장하고 있는 워크맨에서 성차별적 발언과 장애인 비하 발언, 국가주의, 성소수자에 대한 배려없는 접근을 발견했다. 물론 인기몰이에 성공하면서도 동의하지 못할 폭력들을 은연 중에 합의시켜버리는 일을 가능케 컨셉이나 타이트한 구성의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콘텐츠를 자발적 선택하는 것 역시 개개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모든 차별들이 내재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면서 - 그간의 사례를 떠올린다면 - 한편으로 전혀 놀랄 일이 아니기도 하다. 아직도 우리 시대의 개그와 유머는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다. 당신의 웃음은 시민의 웃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