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이 소거된 범죄물이 여성에게 저지르는 폭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105억이 투자된 이 영화가 수개월을 거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납득할 수 없을 것 같다. 400만 관객 돌파를 눈 앞에 둔 ‘나쁜 녀석들: 더 무비’의 이야기다. 물론 그 과정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범죄 액션 영화에 어울리는 배우들을 적당히 섭외하고, 시나리오에는 어떤 트릭들 때문에 난항을 겪다가 '멋지게'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플롯을 넣는다. 플롯의 구성과 서사의 참신함도 고려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관련된 장르로 관객몰이에 성공했던 마동석을 배우로 선택하는 것이다. 특정 배우들에게 의존하는 한국 상업 영화의 제작 시스템을 고려한다면, 마동석-범죄물의 공식이 투자를 얻어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영화에서 '마동석이 나오는 범죄물'이라는 설명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를 돕기 위해 관련된 장르에서 떠올릴 수 있는 소재도 총출동한다. 전국을 재패한 폭력 조직, 트라우마를 가진 주인공들, 친구의 죽음, 마약, 그것으로 일구어 낸 지하경제, 은퇴한 경찰, 알고보니 악당 편이었던 상사. 물론 관객들도 영화의 제목과 배우들의 라인업을 보면서 기대했던 내용들이 있었겠지만, 정말 모든 것이 예상했던 그대로일 때 벌어지는 참사도 있다.
비슷한 클리셰를 활용해 설득력 있게 구성된 서사들을 알고 있다. '범죄 도시'가 단순한 선악의 대립을 뛰어넘어 조선족에 대한 기존의 전형을 깨는 시도들을 보여준 바 있기에 장르물에 어떤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때문에 나는 장르물과 클리셰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것들에만 의존해서 영화를 편하게 만드는 과정과, 그 고민 없는 편안함 속에 어떤 폭력이 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특히 범죄라는 장르가 여성에 대해 얼마나 배려없는가에 대해서.
오랜 시간 범죄물은 여성 캐릭터를 성적 대상으로 소비해왔다. 예외적인 여성 히어로물을 배제하면, 권력 집단과 폭력 조직 사이에서 주체적으로 생존력을 보여주었던 캐릭터를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다. 대게는 관습적 재현 방식 위에서 조직을 위해 희생 당하거나, 성 노동에 종사하거나, 일상적 폭력에 노출되며 나타났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나름의 '능동성'이란 것을 갖는 이 경우에는 '섹시하고 똑똑한' - 이른바 '미인계'로 사기를 치는, 성적 특성이 부각되는 - 캐릭터로 등장한다. '나쁜 녀석들'의 김아중 캐릭터는 이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섹시하고 똑똑'하다는 말은 칭찬인 것처럼 - 아니다(할말하않) - 보이는 수식어에 불과하다. 이는 앞서 열거한 경우와 달리, 마치 서사 속 인물이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중요한 선택을 이어나가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모두 착각이다. 김아중의 캐릭터가 영화 전반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그녀는 관객을 위한 '성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줄곧 몸에 달라붙는 옷을 착용하는 김아중은, 등장과 동시에 수 십명의 범죄자들에게 뒷태를 전시한다. 환호를 지르는 그들에게 중지를 세우며 쿨한 미소를 짓는 듯 보이지만, 수십 대 일의 관계에서 진정 여성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남성 제작자의 환상일 뿐이다. 오히려 촘촘한 쇠창살이 김아중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괴성을 지르는 남성들이 특수 강간과 살인을 저질렀던 범죄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는 실재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위험과 불안이 소거되어 있다. 성적 존재로 환기되는 이 모든 과정은 그녀의 이름이 나오기도 전에 모두 발생하는 일이다.
이후 수도 없이 그녀의 몸은 성적 존재로 환기된다. 마동석과 티격태격하는 과정에서도 겉옷을 벗어 그의 입을 다물게 하며, 전략 회의를 할 때에도 옆이 트인 치마를 착용한다. 이 때의 카메라 앵글이 하체에서 상체를 차례로 훑어보는(메일 게이즈*) 남성적 시선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는 여전히 장르물이 고민 없이 남성에 의해 고안된 고전적인 앵글을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몸매의 부각만이 그녀를 성적 존재로 환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녀가 수사과 회의에서 범인을 잡기 위한 전략을 제시할 때 등장한다. (대사와 함께 옷을 어깨까지 내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수컷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으로는 범인을 잡을 수 없어. 감성적이고 인문학적 접근이 필요하지. 여자를 써야 해."
경찰 만 명이 동원되어도 잡지 못했고, 수년 째 경찰의 수사망을 벗어나 도망다니는 지명 수배자를 잡기 위해 그녀가 제시하는 전략이 남녀상열지사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납득 가능한가? 실제로 경찰 회의에서 그런 작전을 제시할 것으로 예상하는가? 이와 달리 다른 남성 주연들이 제시하는 방법론은 경력을 동원한 전략적 접근이다. 오직 그녀의 의견만이 성과 결부된 판타지적 방법론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 대사는 논리와 이성의 영역을 남성에게 할당하고, 감정을 여성에게 할당하는 고리타분한 성별 이분법적 사고를 반영함과 동시에, 그 구분에 맞는 캐릭터를 범주에 따라 표상하게 만든다.
이것이 문제적인 이유는 영화 전반에서 각 캐릭터의 대사를 바탕으로 입체성을 조망했을 때 드러난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그녀의 대사가 가장 많은 부분이다. 이후의 장면에서는 다섯 마디 이상 할당되지 않으며, 그것도 농담을 제외하면 그녀의 대사 자체가 거의 전무하다. 굳이 더 찾아본다면, 범죄자에게 속고 있는 여성과의 대화에서 그녀에게 충고하는 말들이 전부다. 물론 이마저도 남성과 사랑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즉, 김아중의 캐릭터는, 대사를 읊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성과 감정 그리고 남성에 관한 이야기만 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라는 의미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 말하는 이들에게는 경향적으로 판단하기를 권유하고 싶다.) 반면 남성 캐릭터들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고, 사고하며 다채롭게 행동하는 입체적인 모습을 보인다. 만약 당신이 픽션 속 캐릭터를 구상한다고 했을 때, 한 인물이 사랑, 성과 관련되지 않는 대사를 가질 확률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반영론적 관점에서, 자연스레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는 게 - 정치적으로든 아니든 - 합리적일 것이다.
이것이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벡델 테스트'를 소개한다. 이는 영화 산업 내 성 차별을 검증하기 위해, 특히 영화 내에서 여성이 적게 나타나는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테스트다. 요건은 간단하다.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2명 이상 있는지, 여성 캐릭터 간의 대화가 있는지, 있다면 그 대화가 남성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한 것인지만 검증하면 된다. 상식적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구성된다고 상상했을 때, 두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서 '남성'이 아닌 다른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영화가 실제로 넘쳐 흘렀고, 한국의 경우 1000만 관객을 동원한 17개의 영화 중 10편이 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자면, 김아중 캐릭터에 부여된 대사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영화 산업 내에서 여성을 성적 객체로 구성하는 것이 뿌리 깊은 관습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그녀는 남성 외의 주제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는 거의 모든 대화에서도 성과 관련 없는 대사를 하지 않았다. 유일한 여성 주인공에게 부여된 '섹시한' 캐릭터, 그리고 그녀가 읊는 대사들이 하나의 경향성을 띤다는 사실이 뭔가 불행하지 않은가? 감성의 영역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는, 그녀의 평면적 캐릭터가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앞서 언급한 사실들을 모두 없앨 수 있다고 해도, 여전히 김아중의 캐릭터는 문제적이다. 그녀는 범죄자 소탕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 남성 동료와 함께 연쇄 살인마를 쫓던 그녀는 동료가 사라짐과 동시에 무능해진다. 마동석이 올 때 까지 다른 여성이 방안에서 살해당하는 과정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결국 살인마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지만, 마동석이 문을 부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는 자신의 언니를 '갖고 놀았던' 범죄자를 마주할 때도 같은 방식으로 제시된다. 유일하게 김아중 캐릭터에게 강한 동기로 작용할 수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체포의 몫은 남성 동료에게로 돌아간다. 김아중은 의자에 묶인 범죄자를 안전하게 때릴 뿐이다. 여기서 이 영화를 더욱 끔찍하게 만드는 대사가 등장한다.
"나 때릴 생각하니까, 흥분 돼."
가족에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어떤 여성이 저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저 대사를 시나리오에 적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그가 염두에 둔 관객이 누구일지 생각해볼 수 있다. 그야말로 가관이라고 하고 싶다.
장르 특성이 가장 부각되는 이 영화의 엔딩씬도 주목할 만 하다. 주연 4명이 폭력 조직의 소굴에 들어가 일망타진하는 장면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남성 캐릭터는 각각 수십명을 상대로 싸워 수백명을 쓰러뜨리지만 김아중은 두 세명과 투닥거리다가 칼을 맞고 모든 것이 끝날 때 까지 누워 있다. 앞선 장면들만 보더라도, 그녀가 핵심적 역할은 커녕 별다른 기여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김아중 캐릭터는 서사 전개에도 별다른 기여를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김아중에 주목한 이유는, 그녀 외에 영화 내에서 이름을 갖고 의견을 개진하며 행동하는 여성 캐릭터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 이미 성비에 있어서 문제적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 김아중을 통해 영화가 여성을 대하는 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예원도 이름을 갖고 있지만, 이는 드라마의 확장판이라는 설정을 반영했을 뿐 그녀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 때 우리는 이름 없는 여성들이 어떤 직업을 갖고 등장했는지에 주목해야한다. 다방에서 커피를 타는 여성, 노래방 접객원, 꾸며 입고 정치인들에게 마약을 제공하는 성 노동자, 폭력배에게 물수건을 강매 당하는 식당 아주머니가 여성으로서 영화에 등장한다. 마지막 경우를 제외했을 때, 역시나 성적 객체와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는 여성은 없다. 이 영화는 여성, 특히 그 중에서도 사회 내에서 열악한 위치에 놓인 사람들을 스크린에 소환하여 남성 캐릭터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역할로 만든다. 역시나 그것이 문제적인 이유는 비율로 파악할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그 밖에도 짚어내지 않은 다양한 문제가 이 텍스트 안에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더 서술하지 않아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 서사를 구성하는 과정을 감안한다면 어떤 우연의 일치는 때로 용인되어야할지도 모르지만, 어떤 우연이 반복된다면 우린 그것을 '고의'라고 부르며, '무지'라고 부른다. 이 영화를 만들어 낸 긴 시간과 인력, 투자자들의 기대, 감독의 노력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진정 그들을 움직였던 원동력은 상업 영화 제작 시스템의 관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