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엇을 향해 분노하고 있는가
낙인은 논쟁을 엉망으로 만든다. 주장에 프레임을 씌우는 순간 더 큰 담론이 개입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사상 검증이 중요해서, 합리적 논쟁 이전에 상대가 빨갱이인지, 페미인지, 매국노인지를 알아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 어느 새 대립의 중심에 있는 쟁점의 다층성은 소멸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눌 기회는 또 다시 사라진다. 어쩌면, 요즘 겪는 일들이 대게 그런 것 같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곧 개봉한다. 보란듯이 포털과 SNS의 댓글란은 비난으로 가득하다. 영화 자체가 어떤 이유에서 '문제'가 있는 것 같은지 의견을 제시하는 댓글도 있지만, 역시나 '쿵쾅'이라는 단어와 함께 페미니즘을 조롱하는 말들이 압도적 다수다. 나는 전자가 제시하는 의견들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합리적 논쟁은 커녕 의제 자체를 장난감으로 만들어버리는 후자의 경우들을 보면 속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들이 유머와 조롱, 여러가지 밈을 동원해 웃고 떠드는 동안 중요한 이야기들이 다시금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어느 새 나는 페미니즘을 병적인 증상으로 쉽게 치부해버리고 마는 이들에게서 합리적 논쟁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댓글에서 공론장의 희망을 다시금 열어젖히기 위해서는 이 영화를 싫어하는 이들이 어떤 것에 대해 말하는지 면밀이 검토해야 한다. 원색적인 비난들을 제외하면, 반응은 대부분 비슷한 의견으로 수렴된다. 비극적인 사건들을 집어넣어서 그것이 마치 보편적인 여성의 삶인 것처럼 일반화했기 때문에 문제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자못 논리적인 듯 보이는 이 주장은,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우선 독서라는 행위의 메커니즘에 대해 말하고 싶다.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주인공 개인의 개별적인 특수성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읽는 이야기는 특정한 시공간, 구체적인 이름을 갖는 인물들의 관계와 움직임, 그리고 이곳에 개입하는 우연적인 흐름과 교차하는 사건으로 구성된다. 어떤 날의 날씨와 색채, 문득 떠오른 주인공의 기억이 이야기를 생각치도 못한 곳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때문에 현실의 세계는 소설 속 공간과 분리되어 있으며, 독자는 낯선 이야기 앞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이질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아마 많은 경우 독자는 인물들이 겪는 일들 속에서 일반성보다는 특수성을 느낄 것이다. 이 말은, 소설이 그 자체로 일반화된 성질을 가지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장 최근에 읽었던 소설을 떠올렸을 때 그 서사가 '일반성'을 가지는지 생각해보라.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근본적으로 주인공 개인의 경험이며, 특수성에 대한 텍스쳐다. 그렇기에 작가가 의지를 갖더라도, 작품 그 자체로 어떤 서사를 일반적인 사실로 단언할 수는 없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 작가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 제목이다. 80년대에 태어난 여성 인물을 제목으로 언급하여, 작가가 시대상을 진단해서 일반화하려는 생각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나 연도, 지역, 성별로 제목을 지은 책들이 무수하며, 그 간 문학과 일반화라는 단어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없었음에도 갑작스레 이 작품에 '제목 일반화'라는 잣대를 제시하는 것은 꽤 뜬금없는 일일 것이다. 설령 작가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더라도, 앞서 말했듯이 스스로 이야기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역설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서사는 여성의 삶을 어느정도 일반화하는 데 성공했다. 단일 표본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원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논의에 참여하는 이들의 동의와 지지를 기반으로 표본을 확장할 수 있을 때, 그것은 가능한 일이 된다. 주변인들과의 대화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흔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것은 당신의 동의 속에서 옳고 그름이 어느정도 결정된다는 것을. 본래 대화와 논의의 장은 참여자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100만부가 판매되었다.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독자들의 후기와 독서모임, 토론회가 이어졌다. 비슷한 사회상을 공유하는 대만과 일본 독자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소비되고 그치는 많은 베스트 셀러들 가운데, 이 소설만이 그토록 강렬하게 공진하며 반향을 일으켰다.
나는 모든 경험이 당사자의 관점에서 더 분명하게 구성된다고 믿는다. 여전히 '꾸며진 사실에 반응하는 병적 증세'로 폄하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 서사의 일반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아닌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의 목소리다. 작가의 손을 떠난 이 작품은 더 많은 김지영과 만났고, 공명했고, 그 가운데 확장됐다. 3년이 지나는 지금까지도 현상을 부정하는 이들의 발언을 압도하며 보란듯이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더 이상 보편성의 부재를 지적하는 데서 의미를 찾기도 힘들다. 당신은 공감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자신의 피해를 맞불 놓듯 열거하는 목소리 중 무엇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이제 공격하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소설에 등장한 소재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일이라고 부정하는 것 뿐이다. 소설 속 김지영이 겪는 일을 요약하자면 일상적 공간에서 겪는 성희롱, 여성 경력 단절, 재생산 노동의 어려움, '맘충'이라는 낙인을 언급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이 꾸며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일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얻는 것이 무엇인가? 아마도 기본 교육을 받았다면 당위의 차원에서는 적극적으로 그것들이 존재하면 안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취업 기회의 균등과 성범죄의 소멸을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주변에는 일상적 성희롱이 없고, 주변 여자 동기들도 취업을 잘하며, 경력 단절은 옛날 얘기'라고 믿기 때문에 이 소설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지했다시피, 피해는 당사자의 관점에서 구성되어야 한다. 관련 사건을 겪은 여성들이 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며, 상처를 고백하고 있고 있지 않은가. 만약 책이 독자에게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저 고통과 어려움을 이해하고 수용하고자하는 노력일 뿐일 것이다. 그러나 경향적 판단을 결여한 이들이 '피해 망상'을 운운하고 있고, 억울했던 자기 서사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소설을 부정하는 이들의 다수가 '남성'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또한 경험할 수 없는 일을 부정하는 것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김지영'을 허구의 인물로 간주하면서, 여동생이 탄 택시의 번호판을 외우고, 시댁과 마찰을 빚는 어머니의 고난을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논의에 프레임을 씌우며 주장을 증발시키려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다. 치열하고 섬세한 논쟁 가운데 미래를 발견하고 싶다. 현실을 지우는 형이상학적 낙인과 일반론에는 염증이 났다. 곰곰히 생각한 끝에, 이 영화를 향한 자신의 비난이 사실은 허수아비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