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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종 Oct 07. 2019

[조커] 삶이 무너질 때, 당신이 붙드는 것.

존재하기 위해 요동치는 몸짓에 대해

 아서의 웃음이 삶의 궤적 위에서 가장 빛나던 그 순간은 시민들이 전례없는 악인의 탄생에 비명을 지르던 바로 그 때였다. 그는 처음으로 엄지를 입 안에 욱여넣는 대신, 잇몸에 맺힌 피로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무수히 부정당했던 자신의 삶을 뒤로한다. 수많은 광대들의 지지 속에 요동치는 아서의 몸짓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어떤 발버둥이 아니었다.


 삶을 지탱하는 기둥은 단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때로 너무나 유약해서 눈물을 흘리게 한다. 자신의 존재에 불안감을 느끼더라도 기껏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를 부여잡는 일일 것이다. 그 때마다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물질들이 삶을 견디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과 경험, 그  속의 어떤 위로들이 존재를 버티게 한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렇기에 메타 내러티브로 구성된 삶의 거대한 목적들이 붕괴한 이 시대에 개인을 구성하는 관계는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헤겔은 '자기와 타자 간에 발생하는 변증법적 인식 작용이 삶을 구성하며, 그 속에서 생명 인정 투쟁'이 발생한다고 했다. 만약 그의 말처럼 인정을 받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다른 주체들과 대면하는 순간들은 어쩌면 생명의 근원적 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에 관해 영화 <조커>는 인정에 관한 개인의 투쟁과 존재의 약동이 얼마나 강렬할 수 있는지 시사한다.



 정신 질환으로 병동에 수감된 이력을 갖고 있는 아서는 코미디언의 꿈을 꾼다. 누군가를 즐겁게 하겠다는 그 목적은 홀로 그를 길러온 엄마에 의해 정체화된 '웃음의 숙명' 때문이지만, 한편으로 그의 유머는 광대로서 자격을 부정당할만큼 주변적이기도 하다. 혀 끝에서 해고가 결정되는 직업적인 삶을 포함한다면, 그의 생애는 모든 약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불안하고 아프다. 일상적 폭력과 배제에 노출된 그가 유일하게 해내는 일은 묵묵히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조금씩 그의 목을 옥죄어 나간다. 소란스럽게, 때로는 아무렇지 않게. 병과 관련해 유일하게 의존하던 상담소는 복지 예산 삭감으로 문을 닫고, 가난을 범죄와 병치하는 정치인이 득세하는 가운데 제도와 담론의 폭력은 확산되며 그는 점차로 사각지대에 몰린다.


 하지만 아서는 자신을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을 원망하지 않는다. 상황이 극한에 몰릴수록 그가 집착하는 것은 어떤 물질적 제반이 아닌 존재론적 의미다. 오직 마주한 이들의 인정이다. 어릴 적 머레이에게 자신을 인정 받은 경험을 떠올리는 그가 그것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주변인들은 아서의 정체성 범주들을 하나씩 부정하는 말들을 쏟아낸다. 직업, 병, 가족, 꿈, 그를 이루는 모든 영역이 균열하는 가운데, 그가 이 사회에서 설 자리는 점차 사라져간다.


 그의 감정이 요동쳤던 최초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은, 광대라는 이유로 구타받는 장면이 아니라 고용주가 그를 향해 불신의 말을 쏟아낼 때다.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고, 내면의 공백으로 전율하는 그의 눈빛을 그저 신경증적인 발작으로 볼 수는 없다. 우리는 그 눈빛을 동료의 위선과 '아버지'의 폭언, 그리고 우상인 머레이의 조롱을 목격하는 순간들 속에서 다시금 마주한다. 반복되어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비극의 행렬 가운데 그의 광기는 마침내 도래할 어떤 비극의 순간을 향해 나아간다. 그에게 어떤 작은 존재감도 부여하지 않는 사회는 되려 그를 내던질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서는 내던져진 바로 그곳에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는 점멸하는 지하철 속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중산층 3명을 살해한다. 그리고 어떤 우연의 개입이 이 우발적 사건을 사건을 사회로 확장시킨다. 아서가 격렬하게 존재감을 부여받는 순간은, 불 붙은 계급 담론이 그를 호명한 바로 이 순간이다. 광대로서 호명될 때마다 그를 비추는 빛이 더욱 눈부신 이유는 비밀을 감추고 임하는 비존재로서의 삶이 한없이 비극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아서는 점차로 자신이 붙잡으려 했던 삶들을 탈각한다. 그리고 머레이 쇼에 출연하는 그날 밤, 익명의 광대들의 맹렬한 지지 속에서 아서는 마침내 광대 '조커'로서의 자신을 정체화한다. 평생 단 한마디의 공감을 갈망했던 그가 집단의 부름을 받는 순간의 희열을 상상할 수 있는가. 존재의 인정은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숙원이 되어 있었고, 생존과 직결된 바로 그곳에서 윤리와 도덕은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이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억지로 입고리를 우악스럽게 벌리지 않는다. 존재감을 획득한 주체로서 환희의 웃음을 짓는다. '이해할 수 없을 걸'이라고 말하며 다수를 등지는 그는 이제 타자의 관점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다시 태어난다.



 조커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실천한 것은 자신을 존재를 부정했던 이들을 죽이는 일이었다. 직업을 잃게 한 동료를 죽이고, 자신을 망가뜨린 - 어쩌면 정치 권력에게 매도 당한 - 엄마와 오랜 우상 머레이를 살해한다. 죽는 이들은 가족, 직업, 꿈이라는 점에서 각 정체성의 범주를 대표하는데, 우연적으로 보이는 이 구분은 본질적으로 구조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이는 개인을 구성하는 사회 내의 위치성이 그를 둘러싼 주체들의 수행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지극히 개인적 원한으로 보이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계급과 제도, 법에 대한 논의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시스템의 서사다. 사적이라고 말하기엔 역겹도록 제도의 모순을 표상한다. 아서가 거리에 나갔을 때, 그를 기다리던 광대의 집단성이 이를 방증한다.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인정 관계를 둘러싼 무시나 모욕 행위는 도덕적 훼손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이를 막기 위한 사회적 투쟁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한 바 있다. 고담시의 비극은 시스템이 저지른 폭력에 대항해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이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튀어나온 사건이었다. 폭력을 동반한 정치적 운동을 비판할 수 있더라도, 당신이 아서의 삶을 따라왔다면 쉽게 도덕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한 마디의 위로가 조커의 탄생을 저지할 수도 있었을 거라 말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우연은 단 한 번 발생하지 않는다. 나는 어떠한 예외도 없는 그 상황을 두고 막연히 안타까운 마음을 품는 것을 기만이라 부르고 싶다. 조커는 말한다. "요즘 사람들은 배려도 없고, 예의도 없어." 당신은 철저히 개인적인 특성으로 보이는 배려와 도덕이,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아서의 삶에서 어긋나는 과정을 목격했다. 나는 그곳에 우리 사회의 흉악한 범죄자들을 탄생시켰던 비극적 생애,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개인과 사회를 상기시키고 싶다. 폭력에 대한 미화도 정당화도 아니다. 그저 도덕 담론이 당신의 무의식을 잠식해가는 바로 이 시기에 입으로만 선악의 이분법을 외치는 이들에 대한 경고다. 제도를 탓하기 전에 현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예의'와 '배려'를 지키는 일이다. 약자를 악인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당신일지도 모른다.




*인셀(비자발적 순결주의자)의 세계관을 반영해 그들의 서사를 정당화한다는 비평들이 있습니다. (다른 부분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저는 조커에 교차하는 소수자성을 그들과 선형적으로 연결하는 것에 적극 동의하기 힘들어 마이너리티에 대한 서사로 접근했습니다. 다만, 히어로물의 주인공 설정에 정신 질환이 포함되는 지점에 혐오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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