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期

뒤돌아 봤을 때 제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by HERMITAGE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왈칵 쏟아지는 것을 붙잡는 게 꽤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시선을 분산시켜야 했다. 집중이 잘 되는 머리를 이겨낼 힘은 없었다. 여러 해 반복으로 해오던 일을 일단 멈추려다 허전함은 예고라도 하듯 하루 전에 시작됐다. 잠이 오지 않아 들여다본 머릿속은 볼수록 벅찼다. 어쩌면 한 달을 내도록 그랬었는지를 되돌아봤다. 하고 싶은 것 말고 해야 할 것들은 횟수로 몇 번 못 해본 것 같다.


어딘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미쳐야만 겨우 좇을 수 있다고 그게 맞을 거라며 끌고 나가던 적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멈춰 서도 좋은 날이었는지를 묻는다. 뭘 해야 할지 모르면 일단 그리라는 피카소처럼 그릴 그림이 없다면 무작정 그리다 보면 그려야 할 것도, 그리고 싶은 것도 알게 된다는데 왜 몰랐을까. 알고 싶다. 어떤 걸 그렸어야 하는지. 이른 아침 걸어 나오며 집 앞에 새로 생긴 드로잉 카페 유리창에 쓰인 문구에 눈이 간 것이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아서 불필요한 기대 대신 먼저, 억지로라도 힘을 빼야 한다. 힘을 빼지 못하고 뻣뻣해지면 그대로 부러질지도 모르니까. 어느 날 수화기 너머로 온 말이었다.


“좋기만 한 날 들에 무슨 글이 써지겠어? “


불행과 결핍을 강요하는 것 같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을 땐 아무것도 아닌 것들만 남길 수 있는지 겁이 났다. 다른 누구는 결핍을 위한 결핍이라 했다. 불안의 방을 만들고 들락거릴 수 있어야 한다.


‘왜 결핍을 먹고 사는가’


대한 질문과 답변은 융의 말처럼 자신의 그림자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장이 시작된다는 말에 숙연한 답을 준다. 정신의 성숙이 언제쯤 이루어져 넘어져도 털고 일어설 수 있는지를 떠올리다, 땅바닥의 먼지를 털며 어렵게 일어서던 어린 날을 떠올린다.


눈치를 보느라 눈물이 먼저 나오지 않았던 건 아마 아픔보다 혼나는 게 두려웠던 탓이다. 옷이 더러워지고 상처에 흉터가 남을까. 다쳤을까 봐 걱정되어 그랬다는 걸 지금은 알지만 그땐 그랬다. 가장 큰 두려움이 제일 먼저 흔들기를 시작하는 법이다. 쥐어짜듯 토하는 글자를 의식적으로 멈추라고 저항한다. 매 순간 어떤 곳에서 거기에 대항할 어떤 힘이 있어야 한다.


경계를 늦추고 힘을 빼면 어느 순간 튀어나오는 무의식에 경계해야 한다. 건조함을 유지하려는 힘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다. 토하다 보면 경직된 몸이 느껴진다. 멍든 것 같기도 하고 근육이 찢어진 느낌과 비슷하다. 한동안 집중한 후에는 온몸이 녹초가 된다. 허전함에는 채워줄 무언가 필요하고 가득 차 넘치는 곳은 비워내 넘쳐흐르지 않게 해야 한다. 간극을 조정하는 방법이 서툴러 너무 차갑거나 때론 펄펄 끓어 머릿속에서 들리는 말들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어간다.


‘또 어떤 결핍을 먹어야만 하는 걸까’


좋은 날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비 오는 날 꽃이 떨어지고, 새순이 돋아나듯 나오기 위해 떨어져야 하는 숙명을 누군가에는 찰나였을지 모를 순간들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나왔냐고 받아들여지는 걸 보면 한차례의 계절 지나듯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복되던 일을 그만둬야 할 때 이제는 그만하라는 머릿속에 목소리가 정말 사실인지 귀 기울인다. 이성과 감성이 충돌할 때 누구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걸까.


아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해 그대로 두고 시끄러운 머릿속을 다른 소리로 채워 넣을 것이다. 여전히 꽤 차가운 기온차와 한차례 오르락하는 기온에 땀이 흘렀다 깬 새벽은 소스라치게 춥다. 낮은 체온에도 한편 덥다가 한기를 반복해 맞으면 순환은 더 빨라진다. 또 한 번 머리칼과 손톱이 전보다 더 빠르게 자라나 언제 생겼는지 모를 벌어진 상처가 뜨겁다.



Hermitage

@big_beom

이전 0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