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혹서기를 나는 방법

Matua Winemaker's Release

by HERMITAGE

Matua Winemaker's Release Sauvignon Blanc 2020

자동차 엔진이 이렇게 뜨거웠던가. 스치듯 지나가다 잠시, 장애물을 만나 멈춰 섰을 때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도 반응하는 걸 보니 한껏 예민하다. 거리의 사람들은 작은 플라스틱 선풍기에 의존하다 못해 꽃받침처럼 얼굴에 가져다 댔다. 한 여름 폭염의 인상이 점차 낯설지 않다는 게 어색하면서 씁쓸하다. 더워질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잠시, 아찔해진다. 四季(사계)酷暑期(혹서기)인 여름을 어떻게 나야 하는지 아직까지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과연 ‘염소의 뿔이 녹아내릴만한 날씨’다.


大暑(대서)의 온도가 이렇게 강력한 줄은 진정, 몰랐다. 살기 위해 실내에선 플라스틱 사이로 세어 나온 냉매가, 터보로 만들어 낸 가상의 온도를 유지하려 애쓸 땐 냉방병에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아이스크림처럼 익은 몸이 더위에 녹을 땐 현기증이 나기 시작하다 저혈압이 있는 사람처럼 눈앞이 시커멓게 칠해졌다.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사람들은‘더위를 먹었다’ 하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그건 그다지 유쾌한 맛은 아니었다.



에어컨에 익숙해진 체온은 바깥 기온에 녹아내렸다. 더위에 취약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계절이 어제보다, 작년보다 더 뜨거워진 것 같다. 한 해 가 지날 때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처럼 더위도 진화했다. 추위는 아픈 그대로 견디면 그만이었지만 더위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더 이상 쾌적하지 않은 몸이 집중할 수 없는 정신 상태로 이어져 건조해진 피부를 등지고 수도꼭지를 개방해, 연신 물이라도 뿌려대게 만들었다. 오늘 같이 체감 사십 도를 넘어가는 정도의 폭염은 극한의 추위와 비교해야 그 수위가 맞을 텐데 그렇다면 선택에 우열을 가리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꼭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우리 고유의 민속놀이처럼, 날씨가 신체의 항상성 넘어 괴롭게 만드는 날에는 하나를 골라야 했다. 극한의 더위와 매서운 추위, 밸런스가 파괴된 극한의 선택지는 어떤 보상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지만 심각하고 심도 있게 고민한다. 극한의 추위, 매서운 더위 모두 나름대로 견디고 피해 가고 싶다. 추위에 강한 건 아니지만 한겨울의 얼어붙은 날씨에 돋은 닭살을 더 꼿꼿하게 세운다 해도 폭염의 더위가 낫겠다고는 못하겠다. 여름엔 실내라고 공기가 늘 쾌적한 건 아니지만 실외에 있는 驛舍(역사), 예컨대 에스컬레이터가 긴 <당산역>에서 강력해진 계절을 다시금 실감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한증막과 비슷하다. 어떤 이유로 스스로를 매몰시키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몸 둘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모래시계를 만지작대다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해방이라도 된 듯 문을 박차고 나갔다. 더위를 견딘다는 건 한참 전에 뜨거워진 다 떨어진 모래시계를 붙잡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오늘, 가장 뜨거워진 모래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어떻게 해도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동반한 더위를 숨 막히는 계절을 보내야 한다. 허기는 지는데 식욕은 떨어져, 간단히 먹자 주문한 배달 음식에 재활용품만 늘어난다. 분명 메뉴 탭에 1인분을 클릭했는데 치우고 보니 지금 막 집들이를 끝낸 것 같다. 사그라들지 않는 더위에 묻은 熱感(열감)이 찝찝함을 만들고 바스락하고 건조하지만 저항 없이 걸을 수 있던 계절을 떠올린다.


이 계절을 나는 방법, 확실히 가벼움에 손이 간다. 묵직함이나 풍미 같은 건 잠시, 내려두고 차가운 걸 마시고 싶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청량감, 미적지근하지만 않다면 평소보다 과실의 당도가 느껴져도 괜찮다. 매일 조금씩은 외출 후 돌아올 때마다 삼킨 더위를 해결해야 했다. 떨어진 당을 채우고 시야를 또렷하게 만들려면 레몬보다 라임이, 현기증을 만들어 내는 피로를 회복하는 데는 자몽이 좋겠다. 끝이 좀 쿰쿰한 것 같기는 하지만 차갑게 만들면 그런대로 넘길만하다.


오픈 직후보다는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적당히 익은 과일처럼 자연스럽다. 레몬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기도 하지만 분명, 자몽이다. 쌉싸름한 맛이 좋다면 때론 낯선 청량함이 기운을 내야만 정신이 차려지는 酷暑期(혹서기), 大暑(대서)에 더 잘 어울린다.


VIVINO : 3.6


Hermitage

@big_be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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