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의 역사

by 마리뮤

*블로그에서 글쓰기 스터디를 시작했습니다. 첫 과제는 김애란 작가의 '칼자국'을 읽고 감상평을 쓰는 일이었고, 두 번째 과제는 '나와 가까운 타인'에 대하여 수필이나 소설 형식으로 자유롭게 글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초고를 쓰는데만 꼬박 5~6시간을 앉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나서 그렇게 기진맥진하기는 처음이었고,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는 생각이 드는 글도 처음이었습니다.

<오진의 역사>는 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자전적 소설이라 상당 부분은 실제 일어난 일과 다릅니다. 글의 소재들은 모두 경험에서 길어 올렸지만 다 쓰고보니 어쩐지 소설 속에는 제가 아닌 또 다른 '초이'가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량이 꽤나 길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할머니를 추억하며, 혹은 가족 중 누군가를 추억하며 즐겁게 읽어주시리라 믿고 올려봅니다.






오진의 역사






"사람 팔자 다 이름 따라간다."


네 이름엔 뛸 초(超) 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망아지마냥 뛰어다니는 거야, 네 언니 이름엔 아름다울 미(美) 자가 들어가서 그렇게 코가 오뚝하고 예쁜 거 아니니. 그래서 네 할미가 아빠 이름에 밥 찬(餐)에 먹을 식(食) 자를 넣은 거다. 봐라, 네 아빠 별다른 재주는 없어도 여태 밥 한번 굶지를 않았잖니, 할머니는 말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고, 언니 코가 오뚝하고 예쁜 것은 둘째 치고, 아빠는 확실히 먹을 복 하나는 타고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속된 말로 셔터맨이었다. 악착같고, 생활력 강한 엄마를 만나 개인택시 운전을 슬슬 하다가 저녁때 엄마가 운영하는 수입코너 가게 문 셔터를 닫아주는 게 아빠의 일이었다. 그러면 매일 밥상에 생선, 돼지고기, 갖은 반찬들이 끊이지 않고 올라왔다.


아빠는 일하기 귀찮은 날 오후엔 집 근처 비디오 가게에 들렸다. 엄마가 장사를 하며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마련한 개인택시는 낡을 일이 없었다. 아빠가 신줏단지 모시듯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두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아빠는 기름값을 제외하고 딱 자기가 보고 싶은 비디오 빌릴 수 있는 만큼만 일했다. 나는 뜨듯한 안방 온돌 바닥에 모로 누워 한 팔을 괴고 늘어져라 텔레비전만 쳐다보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몸 어딘가에는 혹부리 영감마냥 이야기 주머니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할머니의 축 늘어진 팔뚝살을 조물거리거나, 연필 한 두 자루는 너끈하게 숨길만큼 쳐진 뱃살을 만질 때면 이게 다 할머니의 이야기 주머니구나 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매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할머니의 재주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할머니의 입을 거치면 점심으로 맨밥에 물만 달랑 부어 먹은 이야기도 재미있게 들렸다. 다른 집 아이들이 우아하게 안데르센 동화전집 카세트테이프를 들을 동안, 나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어느 날은 포탄이 뻥뻥 터지는 6·25 전쟁통에 집에 쳐들어온 북한 괴뢰군에게 죽지 않으려 밥을 지어 대접한 젊은 시절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고, 어느 날은 엄마를 기다리던 두 남매를 쫓아 낭구에 올라간 호랭이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 무릎에 앉아 재롱부리던 그 꼬마는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다. 얼굴은 온통 여드름으로 뒤덮였고, 겨드랑이엔 돼지꼬리 같은 털이 한 두 가닥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내가 온갖 2차 성징을 겪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에도 할머니의 레퍼토리는 단 한 뼘도 자라지 않았다. 괴뢰군에게 줄 밥상을 들고 가던 젊은 시절 할머니는 여전히 와들와들 떨었고, 낭구에 올라가려는 호랭이는 여전히 먼저 낭구에 올라간 남매의 조언에 따라 참기름을 손에 발랐다.


중학생이 된 후로 할머니의 이야기는 더 이상 예전만큼 재밌지 않았다.


"옛날에 낭구에..."


이 한 마디만 들어도 이마에 주름이 지어졌다. 할머니가 생전 처음 이야기한다는 듯 능청스럽게 입을 떼면 나는 내 운명을 저주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벌을 받는 걸까. 평생 '똑같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지옥'에 떨어진 죄인과 같은 기분이었다.






할머니의 경탄할만한 말재주는 양날의 검이었다. 듣는 이를 사로잡는 그 찰진 말재주는 누군가를 비판하는데 쓰일 적에는 '그 사람'을 잡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열에 아홉 우리 엄마였다.


"아이고 내가 나가 죽어야지. 내가 이런 푸대접을 받고 사느니 콱 혀 깨물고 죽어야지. 애미야, 너는 이 늙은이 이제 나가 죽으라고 접시를 사도 딱 네 개만 산 거니?"


엄마가 평생 가장 억울했다는 사건이다. 아는 분이 엄마가 운영하는 수입코너 가게에 놀러 왔다가 접시 세트 선물을 했다. 접시 네 개가 들어있는 세트였다. 엄마는 아무 생각 없이 집에 가져와 선물을 풀었고 이 사달이 난 거였다.


할머니는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네 식구만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 엄마가 일부러 접시를 딱 네 개만 사 온 거 아니냐며 엄마를 잡았다. 엄마가 그런 게 아니고 선물 받은 거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할머니의 오해는 풀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본인 말은 잘했지만, 남의 말은 도통 듣지를 않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생각했다. 할머니가 듣는 귀가 어두운 것은 하도 남의 말을 안 들어 귀 기능이 퇴화한 탓이고, 할머니 이름 오진의 '오'자는 '오해' 할 때의 그 오(誤) 자가 분명하다고.






어릴 때 나는 우리 집이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오는 화목한 가정 같다고 생각했다. 가끔 내가 학습지를 밀려 엄마에게 비 오는 날 먼지가 날릴 정도로 얻어터지던 때만 제외하곤 내 기억 속 우리 가족 모두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사람은 발화된 언어 이면에 진실을 숨기고 산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 후로 나는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 짐 캐리가 된 기분이었다. 항상 웃고, 배려하고, 더없이 화목하다고 생각했던 우리 가족은 알고 보니 터지기 일보직전의 시한폭탄이었다. 나 빼고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할머니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못 낳은 엄마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했다. 그런가 하면 엄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아직도 만석꾼 아내 시절 씀씀이를 버리지 못하고 매일 오후만 되면 약장수한테 주머니 쌈짓돈을 다 털어주고 오는 할머니가 미웠다. 성분도 알 수 없는 만병통치약, 먼지만 풀풀 날리는 휴지, 작동도 되지 않는 밥솥 같은 하여간 득 보다 실이 더 많아 보이는 물건들을 잔뜩 이고 지고 오는 할머니를 볼 때마다 엄마는 복화술사처럼 나직하게 욕을 내뱉었다. 그뿐이랴 아빠는 돈도 못 벌어온다며 매일같이 닦달하는 엄마가 성가셨고, 엄마는 돈도 못 벌어오면서 밤마다 집 앞 멕시칸 치킨 아저씨와 곤드레가 되도록 술을 퍼마시는 남편이 한심했다. 생각해보면 언니와 나도 하루가 멀다 하고 "내 거 쓰지 말랬지?", "내가 언니 종이냐?"라며 빽빽거리고 싸웠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내 기억 속에는 온통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족의 얼굴만 남아있었다.


우리 가족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가족이라는 철석같이 믿음이 무너지고 이보다 더 혼란스러운 일은 내 인생에 다신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내 나이 겨우 열다섯. 인생은 내 뒤통수를 한 번 더 시원하게 갈겼다.



'정신 차려! 네가 인생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니.'






삶의 거센 파도가 몰아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 가족은 모두 미국에 와 있었다.


"미국은 일주일치 장을 가득 봐도 얼마 안 해, 여기 영어 못해도 일할 곳이 천지 빽빽이야 오빠."


미국에서 자리 잡은 지 10년이 넘은 막내 고모의 호언장담을 믿고 부모님은 일생일대의 모험을 감행했다. 하던 장사마다 망해서 우리를 힘들게 하던 막내 고모는 새로 사귄 시민권자 애인을 따라 가족들에겐 말도 없이 미국으로 떠났다. 부모님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한국에 계속 있어봤자 우리 등골 빼먹기밖에 더했겠냐 했다. 일 년에 한두 번 연락하던 막내 고모는 어느 날부터 연락이 잦아졌다. 아마도 시민권자 애인과 헤어진 것도 그쯤일 것이다. 막내 고모는 '그동안 오빠한테 신세 진 거 내가 다 갚을게, ' 하며 미국으로 건너오라고 부모님을 꾀였다. 미국 생활은 내가 꽉 잡고 있으니 자기만 믿으라고...


엄마가 운영하던 수입코너 가게, 아빠의 모범택시, 다섯 식구가 복작거리며 살던 작은 아파트까지 처분하고 나서 우리는 겨우 아메리칸드림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 미국에 집을 구하고, 이케아에서 산 조립가구로 집을 채워 넣고 나자 부모님 수중에 남은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부모님은 미국에 도착한 날부터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고모의 호언장담처럼 미국에선 마트에서 실컷 장을 봐도 버는 소득에 비해 비싸지 않았다. 하지만 매월 집 렌트비로 아무리 적게 잡아도 150만 원이 깨진다는 사실은 미국에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또한, 영어를 못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차고 넘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그 일이라는 것이 새벽까지 일하는 한국 술집 주방일이라든가, 팁을 벌기 위해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녀야 하는 한국 음식점 웨이트리스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한국에서 일명 셔터맨이라 불리던 우리 아빠조차 하루에 12시간씩 뼈 빠지게 일하지 않으면 지탱할 수 없는 것이 고모가 말한 미국의 삶이었다.


자연스레 우리 자매는 할머니와 셋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미국에서 고등학생이 된 우리는 매일 오후 3시에 번갈아가며 서로의 락커룸 앞에서 만나 집에 걸어갔다. 한국에선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 거리거나, 걸리기만 하면 확 잡아 족칠 거라며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사는 사이였지만 미국에선 서로가 서로의 구원자였다. 하루 종일 미국인, 러시아인, 멕시코인, 터키인, 프랑스인, 콜로비아인이 한데 섞인 잡탕밥 같은 학교에서 내내 수업을 듣다가 내가 아는 검은 눈동자, 검은 머리칼,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 나와 닮은 얼굴을 마주치면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같은 핏줄만이 줄 수 있는 위로와 뜨거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까지도 언니와 나를 끈끈하게 이어주었다.


반면, 할머니에 대한 소홀은 나이가 들수록 심해졌다. 미국 고등학교는 오후 3시면 끝났다. 하교 후 집에 돌아와도 할머니가 저녁밥을 먹으라고 고래고래 소리칠 때까지 우리는 2층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저녁 10시, 아빠는 새벽 3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오셨다. 부모님께서 늦게까지 일하시기 때문에 매일 저녁밥은 셋이서 먹었야 했다. 할머니는 오후 4시부터 우리를 들들 볶았다. 멸치를 들들 볶다가도 "저녁 먹을 시간 다 됐는데 왜 안 내려오냐?", 불고기를 들들 볶다가도 "이 할미 말 안 들려? 뭘 하길래 밥때 다돼서도 코빼기를 안 비치냐!" 했다. 그럼 우리는 부러 늦장을 부리거나, 아예 과자나 젤리 같은 주전부리를 잔뜩 먹고 식사를 걸렀다. 저녁 식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부엌이 있는 아래층에 내려가면 할머니는 식탁 의자에 엉덩이를 반쯤만 걸치고 동치미만 달랑 꺼내 맨밥과 함께 드시고 계셨다. 그럴 때면 나는 괜히 마음이 안 좋아 "할머니는 뭘 동치 미에다가 만 드세요. 냉장고에 반찬도 많고만." 했다. 할머니는 혼자 먹는 데 다른 반찬이 뭐 더 필요하냐며 기어코 동치미만을 꺼내 드셨다.


나는 그게 사춘기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나도 몰래 사춘기를 앓는 동안 할머니와 내내 사이가 안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내가 어릴 때는 이야기 재주로 나를 깔깔 웃기던 할머니는 내가 커서는 '가는 귀가 먹어' 나를 깔깔 웃게 했다. 할머니의 전매특허 '넘에 말은 안 듣고, 나는 내 할 말만 한다'는 미국에서도 먹혔다. 할머니는 귀도 잘 안 들리고, 영어도 못했지만 기어코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먼저 받았다. 대충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만 들어봐도 쏼라 쏼라거리는 영어인데 할머니는 태연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이를테면 "여보세요? 네? 여기 박찬식이 집인데요. 댁은 누구슈? 아들 없어요. 일 나갔어 일. 이따 다시 걸어요." 하고 뚝 끊는 식이었다. 언니랑 나랑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깔깔 웃었다. 짐짓 모른척하고 "할머니 누구 전화예요?"라고 물으면 "응, 네 아빠 친군데 아빠 언제 오냐고 하더라." 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의도하지 않고도 사람을 웃기는 재주까지 타고나셨다.





미국에 간지 3년이 지났을 때쯤, 할머니는 음식도 잘 삼키지 못하고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다. 아무래도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부모님과 고모는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찾았다. 미국의 살인적인 병원비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구급차만 불러도 몇 백만 원은 바로 깨진다고 했다. 겁에 질린 부모님을 안심시킨 것은 고모였다.


"오빠, 걱정 마.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은 나라에서 병원비 면제해주는 게 있어!"


부모님은 미국에 와서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사실에 기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할머니의 병명은 간암이었다. 살인적인 병원비를 어떻게 면제받는다고 해도 이제는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씀씀이도 헤프고, 남의 말도 안 듣고, 때로 신랄한 말로 사람 피를 말려도... 어디를 가나 손녀 손에 쥐어 줄 사탕이니 캐러멜 같은 것들을 잔뜩 주머니에 쟁여오던 나의 할머니였다. 나의 이 완전한 세계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태초에 빛과 어둠이 있었던 것처럼 태초부터 우리 가족은 다섯이었고, 이것은 나에게 진리였다. 나에게 있어 다섯은 절대 깨질 수 없는 완벽한 숫자였다.


할머니가 입원을 한 후 나에게 처음 건넨 말은 질문이었다.


"의사가 영어로 뭐니?"


나는 그제야 우리가 병원에 없는 동안 할머니가 겪을 일들을 생각했다. 그 누구도 할머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간. 할머니가 그 좋은 언변을 가지고도 그 누구도 웃기지 못하는 공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할머니 의사는 영어로 닥떨(doctor)이에요."


"뭐? 당떠?"


"아뇨. 다아아아악- 떠어어어어얼! 닥떨! 해봐요, 닥떨!"


할머니는 갑자기 모든 것이 한 번에 이해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여기선 닭털이 의사야?! 꼬꼬댁 닭, 맞지? 닭털?"


나는 할머니가 입원하시고 난 후 처음으로 박장대소했다. 양손의 엄지를 치켜들고는 "네, 맞아요. 그거예요 닭털!" 했다. 그 날 이후 내가 병원에 갈 때마다 할머니는 영어를 물어보셨다. 간호사는 그럼 영어로 뭐니? 널쓰요. 넌스? 아니요 너어어얼쓰. 널빤지? 아뇨, 널-쓰! 아아, 널뛰기!!!! 네 널뛰기할 때 그 널쓰예요. 할머니에게 우리가 살고 있던 뉴저지는 주전자였고, 병원이 있던 뉴욕은 유혹이었다.


"유혹? 거참 매력적인 도시로구나!"





다행히 병원에 입원한 후로 할머니의 상태는 점점 좋아졌다. 수술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지만 몇 주가 지나도록 의사 선생님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어느 순간에는 우리 할머니가 정말 아픈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정정하셨다.


입원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간암이 아니었다는 말을 들었다. 가족들은 모두 혼란스러웠다. 부모님은 미국 의사가 그런 것도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하냐며 불평했지만 모두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가 애틋한 것은 딱 일주일이었다. 또다시 밥 먹어라, 방 좀 치워라, 일찍 자라, 하루 종일 이어지는 잔소리에 우리는 예전과 같은 사이로 금방 돌아갔다. 언니와 내가 일부러 저녁밥을 안 먹는 날이 늘어났고, 그때마다 할머니는 동치미 국물에 밥만 적셔 드셨다. 그렇게 우리가 할머니에게 소홀해질 때마다 누군가 우주 밖에서 지켜보다가 한 번씩 혼내듯 할머니가 아팠다. 입원과 퇴원의 반복이었다. 처음엔 간암인 것 같다고 했다가, 심장이 문제라고 했다가, 나중엔 신장이 문제라고 했다. 할머니는 할머니가 누누이 이야기하듯 이름대로 병원에 갈 때마다 '오진'을 받았다. 환자 김오진의 정확한 병명은 어느 의사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할머니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사이 우리 자매는 무사히 미국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미국에 온 지 4년이 되도록 우리 집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우리 자매 대학 등록금을 위해 엄마는 무리하게 계를 했다. 생활이 빠듯할 정도로 아끼고 아껴 남은 돈은 다 계를 부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원하던 뉴욕에 있는 대학 합격통보를 받기 일주일 전 엄마가 친언니처럼 따르던 계주 아줌마가 잠적했다.


아빠는 "당신 욕심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다"라고 엄마를 비난했고, 엄마는 무너져 내렸다. 나는 엄마에게 끝내 대학 합격 통지서를 건네지 못했다. 차라리 합격하지 못했다는 거짓말이 엄마를 덜 불행하게 만들 것 같았다. 고등학교 내내 꿈꾸던 뉴욕에서의 대학생활은 정말 한 여름밤의 꿈이 되어버렸다. 미국은 겉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처럼 보이지만 개인이 욕망할 수 있는 꿈이 정해져 있는 철저한 계급사회와 다름없었다. 파란 눈에 금발머리가 아닌 어눌한 억양의 동양인. 그중에서도 동포에게 사기를 당해 개털이 된 우리 가족이 욕망할 수 있는 미래라고는 고작 지금처럼 남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12시간씩 죽어라 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오히려 일찍 일장춘몽에서 깨게 해 준 그 계주 아주머니에게 절을 하고픈 심정이었다. 내가 부모님의 젊음을 갈아 넣은 그 돈으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변변찮은 직업을 갖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나는 평생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갈 터였다.


나는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2년제 커뮤니티 컬리지에 입학했다. 대학을 다니는 2년 동안 낮에는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이를 악물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네일가게에서 미국 할머니의 발뒤꿈치에 각질을 벗기며, 내 허벅지만 한 손님의 발목을 마사지하며, 엄마를 따라온 새침한 아이 손톱에 작은 하트를 그려 넣어주며 탈출을 결심했다. 미국에 온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미국을 떠나는 것은 내 의지였다.





우리 자매가 한국에 돌아갈 거라고 하자 정작 동요한 사람은 고모였다. 입만 열면 미국 예찬이 끊이지 않던 고모는 우리보다도 먼저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고모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가려면 나도 데려가라."


할머니는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며 죽더라도 내 나라, 내 땅에서 눈감고 싶다는 말로 고모의 마음을 움직였다. 할머니와 고모는 우리 자매보다 한 달 먼저 한국에 가게 되었다. 부모님은 지금 우리 나이에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며 한사코 한국행을 거절하셨다.


"할미 간다. 한 달 뒤에 만나자."


뉴욕 J.F 케네디 공항에 고모와 할머니를 배웅하면서도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울지 않았다. 한 달 뒤면 볼 테니까. 명랑하게 헤어졌다. 그날 거기에 있던 그 누구도 한 사람의 역사가 다 타고 재가 되어 인천 가족 공원에 안치되기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을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향년 92세.


짧지 않은 생을 누리다 가셨지만 딱 한 달만. 딱 몇 주만 더 기다려줬더라면...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무얼 그리 급히 가셨느냐고. 마침내 고국에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할머니는 한국에 도착한 날부터 쇠약해지시더니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셨다. 사인은 간암이었다. 결국 미국 의사가 처음 내린 ‘오진’은 ‘오진’이 아니었다.


생전에 단 한 번도 할머니를 모시고 살지 않았던 큰 고모와 막내 고모가 할머니의 임종을 지켰다. 인천의 스무 평 남짓 되는 작은 아파트에서부터 미국으로 이민 가기까지 평생을 함께 살았던 우리 네 식구는 보지 못한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말이다. 슬픔보다 분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는 것. 온전히 우리 가족의 것이어야 했던 무언가를 빼앗긴 원통함에 슬픈 줄도 몰랐다. 그래서 제 때 울지 못했다. 내가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은 몇 년이 지나서야 둑이 터지듯 흘러내렸다. 몇 년 사이 그 눈물은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며칠을 내리 울어도 원금은커녕 이자조차 다 내지 못할 정도였다.


동치미 국물.


그게 뭐라고 나는 반찬통을 꺼내다 말고 허무러 지듯 주저앉았다. 반찬통에 담긴 그 허연 동치미 국물을 보자 귓가에 할머니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저녁 7시 40분. 나는 아무도 없는 신림동 자취방에서 2년 간 미루어왔던 애도를 시작했다. 울음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툭 터져 나왔듯 멈추는 것도 내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언니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것이다. 불도 켜지 않은 부엌에서 꺼이꺼이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한 언니는 가방도 신발도 내팽개치고 나에게 달려왔다.


“초이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는 퉁퉁 부어 뜨기도 힘든 눈으로 언니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 어.. 언.. 언니.... 내.. 내가 밥... 먹어... 그.. 근데... 치미... 엉엉.. 도.. 동치.. 미.. 머니.. 하... 할.... 머니.....”


언니는 늘어난 테이프 같은 내 곡소리를 용케 알아듣고 같이 허무러 졌다. 우리 자매는 서로 부둥켜안으며 그렇게 몇 시간을 더 울었다. 뚜껑도 열지 않은 채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동치미는 우리 자매가 서럽게 우는 동안 천천히 미지근해졌다.


동치미.


할머니가 제때 저녁식사를 하러 내려오지 않는 우리 자매를 한참을 기다리다 겨우 냉장고에서 꺼내던 그 동치미였다. 뽀얀 국물을 볼 때마다 누가 맑고 차가운 개울물에 우유 한 두 방울을 떨어뜨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살얼음이 살짝 낀 국물을 한 숟갈 떠 입안에 넣으면 생긴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 났다. 찝찌름한데 동시에 맹맹한 요상한 음식이었다. 할머니는 하필 냉장고에서 꺼내도 왜 그것만 꺼내서 먹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혼자 먹으면 원 밥맛이 있어야지."

"할미는 동치미 국물을 한 숟갈 떠야 밥이 넘어가."


내가 혼자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다 식은 밥을 한 그릇 퍼서 저녁상을 차려 먹어보니 그제야 할머니가 말할 것들이 이해됐다. 혼자 숟가락을 들어 올려 밥을 입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는 마음을. 아무도 없는 휑한 식탁에 앉아 벽을 마주 보며 끼니를 때우는 기분을. 딱 한 번만. 단 한 끼만. 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절대 할머니 혼자 식탁의자에 엉덩이를 반쯤만 걸치고 앉아 맨밥에 동치미 국물만 드시게 하지 않을 텐데… 한 사람이 누군가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후회되는 것들은 이처럼 아주 사소한 일상의 한 순간이다. 오후 4시부터 저녁밥을 먹으라고 소리치더라도 순순히 식탁에 앉아주는 일, 백번도 넘게 들은 이야기도 처음 듣는 것처럼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경청하는 일, 찝찌름한 동치미 국물도 시원하게 떠먹어 주는 일. 그 사소한 모든 순간들이 동치미 하나에 모두 떠올라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았음에도 목이 자꾸만 메었다.


언니와 함께 흐느껴 울던 그날 할머니는 비로소 우리 가족의 역사가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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