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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Mar 28. 2020

"문득 거울 앞에 서면 엄마가 보여."

우리는 하나의 심장을 공유한 데칼코마니...

데칼코마니, by 르네 마그리트







중학교 때였다. 그 사진을 처음 발견했던 때가. 손바닥만 한 작은 사진이었는데 귀퉁이가 노랗게 바래고 낡아있었다. 부드러운 흑백 사진 속에는 내가 미소 짓고 있었다. 촌스러운 똑 단발에 쌍꺼풀 없이 쭉 찢어진 눈이 영락없는 나였다. 다만, 그 사진을 내가 언제 찍었는지 기억이 안 났을 뿐. 그 사진 밑으로 서너 장의 사진이 더 있었다. 그 사진들에는 진달래 꽃밭에서 순박하게 웃고 있는 나, 친구 두어 명과 손을 꼭 마주 잡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내가 있었다. 도플갱어가 있거나 내게 기억상실증이 있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알았다. 그 사진 속에 나는 사실 엄마였다는 것을.


그 사진을 발견한 후부터 문득 거울 앞에 서면 내 모습에서 엄마가 보였다. 엄마의 모습은 잠시 스쳤다 지나갔지만 나는 엄마의 한 조각이란 생각이 들었다. 크면서 점점 더 엄마를 닮은 모습을 갖추고, 엄마의 말투를 익히고, 엄마의 감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나는 그녀가 떼어준 한 조각의 삶을 내 방식대로 충실하게 살아갔다. 





엄마가 삼일째 전화를 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엄마의 특성을 잘 알기에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저 귀찮다는 이유로 혹은 며칠 정도는 연락을 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에 굳이 이유를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엄마가 전화하지 않은지 삼일째 되는 날, 나는 슬슬 엄마의 안부가 궁금해져서 핸드폰을 들었다. 엄마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일상을 이야기하고, 몸 건강에 대한 염려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쭉 늘어놓았다. 엄마가 궁금했지만 무한히 반복되는 걱정과 신앙생활에 대한 강요는 나를 바로 지치게 했다. 


나의 뜨뜻미지근한 대꾸에 엄마는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사실 내가 얼마 동안 딸들한테 전화를 안 걸고 버틸 수 있는지 시험해봤어"라고 말했다. 뜬금없는 엄마의 말에 나는 잠시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지 할 말을 잃었다. "왜? 전화하고 싶으면 그냥 하는 거지 왜 참아?"라고 나는 물었다. 엄마는 실은 말이야, 하면서 며칠 전에 나와 언니에게 서운했던 일을 털어놓았다. 


며칠 전에 엄마가 사는 지역에 처음으로 코로나 19 감염자가 나왔다. 그 날 모든 동네 사람들은 자식들의 걱정 어린 안부전화에 아주 눈코 뜰 새가 없었다고 한다. 뭐 눈코 뜰 새 없을 정도까지야 싶었지만 어쨌든 자식들이 걱정되어 연락을 한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 오후 늦게 남편이 해당 신문기사 링크를 가족 카톡방에 올리기 전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기사를 읽어보니 확진자는 확진 전 주일예배를 드렸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엄마가 다니는 교회는 아니었다. 워낙 인구가 적은 시골이고 사람들과 큰 접촉도 없는 부모님의 일상을 잘 알기에 그 기사를 읽고 나서도 '아, 거기도 확진자가 생겼네?' 정도가 나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올린 링크에 '아이코' 한 마디만 썼다. 카톡방에 있던 언니와 형부는 한 마디도 올리지 않았다. 우리 가족 카톡방은 항상 그랬다. 누군가 사진을 올리면 단답형의 대꾸가 달리고 보통은 그것으로 끝이다. 조카의 아주 귀여운 사진이 아니고서는 한 명 한 명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딸들이 전화 한 통이 없기에 동네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짙게 배어있었다. 그 기사가 뜬 날 오전에도 통화를 했고, 그 전에도 매일같이 전화 통화를 했었는데 엄마가 그것 때문에 서운했을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안심(?)이었지만 확실히 서운함을 느낄 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는 곧바로 서운함을 말하는 대신 딸들에게 연락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추슬렀다. 그냥 대놓고 딸들에게 서운하다 토로했다면 간편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건 엄마의 방식이 아니다. 엄마가 사고하는 방식이 아니고, 엄마가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이 아니고, 엄마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다. 


예의상으로라도 안부전화 한 통 없는 무심한 딸들을 탓해도 좋았을 텐데... 엄마는 '딸들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자신의 사랑'이 잘못이라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내가 집착하지 않으면 서운할 일도 없어.' 엄마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스스로에게 '딸들에게 연락하지 않고 견디기'라는 가혹한 페널티를 주었을 것이다. 


나는 속이 상했다. 이젠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숨소리에서 마저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우리는 하나의 데칼코마니처럼 한 손으론 핸드폰을 붙들고 수화기 반대편의 나와 통화를 하고 있다. 내가 엄마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체계와 감정 체계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무서울 정도의 관심과 걱정, 애정을 받는 것보다 쏟는 것이 익숙한 모습,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정죄하고 몰아세우는 습성. 다 너무 똑같았다. 엄마의 한 마디 말로도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얼마나 서운했을지, 서운함을 느끼는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만 동시에 얼마나 꽁꽁 싸매고 싶었을지, 자기 연민의 늪이 얼마나 깊었을지... 듣지 않아도 내 몸에 흐르는 그녀의 피가 그것을 그대로 느끼게 했다. 


상황은 다르지만 나도 매번 엄마와 같은 선택을 한다. 남편에게 굳이 꺼내어놓기도 좀스러운 이유로 상처를 받으면 바로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결국 그에게 나의 이 좀스러운 상처를 들키고 그 감정을 이해받는 것이지만 입을 굳게 닫는다. 상대가 평소와 다른 나의 분위기를 감지할 때까지 기다린다. 마치 멀리서부터 먹이를 예의 주시하며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한 마리의 표범처럼 숨죽여 덮칠 때를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려도 포식자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순진하게 뛰어노는 어리석은 사슴의 모습을 바라볼 때면 속에서 천불이 난다. 너는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있어서는 안 돼! 외치고 싶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사슴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한다. 나의 존재를 알아채 주지 않는 그 무신경함을 탓하기보다 더 빠른 해결책을 찾는다. 가장 마음 편히 손가락질할 수 있고, 가장 확실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대상. 즉, '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운다. 그것만큼 쉽고 빠른 해결책이 있으랴. 


상대를 지나치고 좋아하고, 상대에게 지나치게 기대하고, 상대와 지나치게 친밀해지고자 하는 나의 욕심이 나를 이 감정의 불구덩이 속에 처넣은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면 나는 비로소 스스로를 갉아먹는 자기비판을 시작한다. 그간의 내 모든 행동들을 다시 면밀하게 검토하며 어떤 행동이 '독'이 되었는지 판별한 뒤, 그와 관련된 일련의 행동을 일절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상황은 매번 달라도 결론은 매번 비슷하다.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유일하고도 확실한 해결책이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티를 내지 않는 것으로 내게 남은 일말의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덤덤한 표정, 덤덤한 말투, 덤덤한 몸짓으로 며칠을 살아간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킨 대가로 나는 색채 없이 단조로운 일상을 선물 받는다. 그러다 불쑥 상대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더 이상 억누를 길이 없으면 조용히 백기를 든다. 마음속으로 천천히 새하얀 깃발을 들어 올리며 '더 이상은 못해!'를 외치고 마는 것이다. 혼자서 이어온 고독한 싸움을 그때 끝낸다. 


원점. 결국 상대를 사랑하지 않을 방도가 없다. 그가 아무리 무신경하고 내 속을 긁을지라도.




엄마의 지난 삼일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냥 얼마나 버티나 시험해본 거야. 근데 엄마는 삼일이 최대인 거 같아. 전화통화 못하고는 못 살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보고 싶은데 목소리라도 들어야 살지. 엄마가 늙으니까... 작은 거에도 서운하고 그런다."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는데 자꾸만 눈물이 그렁거리고 목이 잠겨 입을 떼지 못했다. 뭘 그렇게까지 미련하게 참아요, 딸한테 싫은 소리도 좀 하고 서운하다며 투정도 좀 부리지...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다시 꾹 삼켰다. 아니까. 엄마가 왜 그랬는지 너무 잘 아니까. 내가 하려던 말이 얼마나 쓸 때 없고 의미 없는지 아니까 다시 집어삼켰다. 


가까스로 울컥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전화하고 싶으면 참지 말고 엄마 전화하고 싶을 때 마음껏 해요."라고 말했다. 엄마는 "그래, 그래야지." 하면서도 "그래도 엄마가 좀 딸들한테 집착이 심하긴 하지? 엄마도 좀 줄이긴 해야겠지?" 하며 내 속마음을 궁금해했다. 


내가 아무리 엄마를 사랑한다 한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그 감정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엄마와 내가 다른 점이 그것일까 싶었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내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나는 다시 우리 엄마의 데칼코마니로서 그 무엇도 멈출 수 없는 사랑을 자식에게 쏟아내겠지. 


내 딸도 언젠가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발견하게 될까? 


나와 하나의 심장을 공유한 데칼코마니...


문득 마주 선 거울 앞에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잔뜩 찡그린 괴로운 얼굴이 한순간엔 엄마가 되었다가, 내가 되었다가, 나를 닮은 또 다른 앳된 얼굴이 되었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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