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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Mar 23. 2020

친구가 내 마음같지 않을 때

상처 받은 마음엔 글샤워.





저에겐 모래 같은 친구가 하나 있어요. 


햇빛이 비치면 반짝이고요, 바람이 불면 제 발목을 간질이고요, 손을 푹 집어넣으면 시원하고요, 파도가 밀려오면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요. 친구와 즐겁게 놀다 집에 들어오면 바닥에 온통 그 친구의 흔적이 가득해요. 버적, 버적. 현관 앞은 말할 것도 없고요, 창문 틈, 옷장 서랍 안, 심지어 세탁기 안에서도 종종 친구를 발견해요. 아주아주 작은 알갱이가 친구와의 시간을 잊지 말라고 저에게 속삭인답니다.


저에겐 모래 같은 친구가 하나 있어요.


햇빛이 비치면 눈을 찌르고요, 바람이 불면 저만치 멀어지고요, 손을 푹 집어넣으면 시리고요, 파도가 밀려오면 다가왔다가도 금세 저를 버리고 바다로 달아나요. 친구와 즐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도 바닥엔 온통 그 친구의 흔적이 가득해요. 버적, 버적. 일기장은 말할 것도 없고요, 컴퓨터 키보드 속, 책장 틈, 심지어 TV 리모컨 틈새에도 친구를 발견해요. 아주아주 작은 알갱이 주제에 친구와의 시간을 잊지 못하게 심술을 부린답니다.


처음엔 제가 누르는 손 모양 그대로, 제가 밟는 발 모양 그대로 저를 안아주어 좋았는데요. 알고 보니 모래는 한 번도 저를 안아준 적이 없더라고요. 제가 움켜잡으면 한 움큼 들어 올려졌다가도 제가 손바닥을 펼치면 벌어진 손가락 틈 사이로 스스스- 빠져나가 사라져 버려요. 


온 집안에 가득했던 친구의 흔적들도 생각해보니 다 제가 붙이고 들어온 거더라고요. 양말 안에 조금, 주머니 속에 조금, 손바닥 지문 사이에 조금, 엉킨 머리카락 사이에 조금...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제가 해변에 갔다가 모아 온 거더라고요. 


저는 바람이 불어서 멀어지고, 파도가 쳐서 멀어지는 친구를 참을 수 없어요. 저는 제가 다가가도, 제가 멀어져도 하염없이 하늘만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친구의 온도를 견딜 수 없어요. 


처음으로 대청소를 합니다. 우선 두 손을 쫙 펴서 힘차게 박수를 치고요, 양말을 뒤집어서 탈탈 털어내고요, 발가락 사이사이로 물줄기를 쏘고요, 진공청소기로 구석구석 다 빨아드릴 거예요. 그러면 더 이상 고깟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에 밟혀 찔끔 눈물을 흘릴 일은 없겠죠?




저에겐 모래 같은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친구가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속상한 마음에 글을 썼다, 지웠다 무던히도 반복했다. 자기의 불행을 끊임없이 털어놓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힘이 되어주고 싶었고 언제나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나의 평범한 일상이 행여 상처가 되진 않을까 말을 아꼈다. 표정의 미묘한 감정선을 따라 나는 내가 해야 하는 말을 고르고 골랐다. 그래도 나에게도 벌어진 일상의 조각들을  드문드문 전했는데, 그럴 때마다 관심 없는 그 공허한 눈빛에 적잖이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내가 불행할 때에만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나의 불행을 들어줄 여유조차 없었다. 자신의 문제와 자신의 불행에 매몰되어 나의 불행은 단 한 귀퉁이도 떼어 나눠들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상처를 주는 사람이 누구든 오로지 너만 생각하라고. 처음엔 위로인 줄 알았던 그 말이 지금은 '네가 아무리 힘들고 불행해도 나는 나만 생각할 거야'였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모든 게 괜찮아지면 이야기 나누자는 그녀는 아직까지 먼저 소식을 전한 적이 없다. 가벼운 안부에도 몇 마디 주고받기 무섭게 '다음에' '나중에'로 도배되는 문자 메시지 창을 바라보며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아, 나는 왜이다지도 어리숙할까. 아아, 아무리 긴 세월을 함께한 친구라도 온도가 같지 않음을 왜 몰랐을까. 친구가 내 마음 같지 않았던 적이 비단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속이 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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