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손잡이의 비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양손잡이가 세상을 사는 법

by 마리뮤
(이미지 출처: https://magazine-k.tistory.com/532)


누구에게도 진지하게 털어놓은 적 없는 비밀이 하나 있다. 나는 사실 양손잡이다. 아니, 왼손잡이다. 아니, 왼손잡이이기도 하고 오른손잡이이기도 하다. 그렇다. 나는 오늘 이 복잡하고 미묘한 양손잡이의 비밀에 대해서 털어놓고자 한다.


나는 서너 살 무렵부터 신발을 반대로 신었다고 한다. 오른 신발은 왼발에, 왼쪽 신발은 오른발에 신고 밖에 나가자고 보채면 엄마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신발을 고쳐 신기며 "우리 딸은 왼손잡이라 맨날 이렇게 신발을 거꾸로 신네?"라고 했다. 정말 내가 왼손잡이로 태어나서 그렇게 죽어라 신발을 반대로 신었는지는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제대로 알려줘도 그렇게 신었다고 하니 그냥 '왼손잡이'여서 그랬겠거니 하는 게 자괴감도 덜 들고 설명하기도 편하다.


무엇이든 왼손으로 먼저 집었다는 엄마의 증언과 실제로 학교에 들어가서도 처음엔 왼손으로 글씨를 썼던 것들을 종합해보면 나는 분명 태생이 왼손잡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이 80년대 태어난 아이들은 온전히 왼손잡이로 살아가기 매우 힘들었다. 왼손으로 수저를 들거나, 왼손으로 연필을 쥐면 '탁!'하고 손등을 때리며 "오른손으로 해버릇해야지 못 써!"하고 면박을 받기 일쑤였다. 아빠는 내가 무슨 손으로 밥을 먹든 상관하지 않았고, 엄마는 '글씨만은 오른손으로'라고 타협해 주었지만 할머니나 동네 어르신들은 완강했다. 자기 딸내미도 아닌데 어찌나 언성을 높이며 '왼손은 절대 안 된다'는 식으로 오지랖을 부리던지... 인생은 부조리하다는 것을 꽤 어릴 때부터 깨달았다.


나는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았고, 나는 불편함을 꾹꾹 참으며 오른손 글씨 쓰기의 달인이 됐다. 깍두기공책(네모칸으로 채워진 공책을 옛날엔 이렇게 불렀다)에 한 자 한 자 정성껏 쓰면 엄마는 아랫집 아줌마에게 '우리 딸내미 글씨체 좀 보라'며 그렇게 자랑을 하곤 했다. 엄마의 자랑이 어느 정도였으면 아랫집 동생을 커서 다시 만났을 때 "언니 글씨 잘 쓰던 윗집 언니 맞지?"라는 인사를 들었다.


처음엔 억지로 오른손 글씨를 연습해야 하는 현실이 억울하고 괴로웠지만 금방 적응했다. 끝까지 왼손으로 글씨를 쓰며 매일 쉬는 시간에 새끼손가락에 묻은 흑연가루를 지우개로 벅벅 지우는 다른 왼손잡이 친구들을 보며 왠지 모를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글씨 쓰기를 시작으로 나는 더욱 많은 것들을 오른손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사과 껍질을 칼로 깎는다든가, 체육시간에 공을 던진다든가, 용변을 처리하는 일까지 오른손으로 척척 해냈다. 하지만 내가 알게 된 양손잡이의 실태는 기존의 상식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보통 '양손잡이'의 정의는 '오른손과 왼손을 모두 자유로이 사용하는 사람'이지만 이는 몰라서 하는 소리다. 선천적인 양손잡이가 정녕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인구의 0.1%에 해당한다는데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후천적인 양손잡이로서 답을 하자면 위 정의는 엄밀하게 말하면 틀렸다.


특정 행동은 왼손이 편하고, 다른 행동은 오른손이 편해서 각각의 손을 필요에 맞게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좀 더 그럴싸하다.


나는 왼손잡이로 태어났지만 후천적으로 양손잡이가 되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양손을 모두 사용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특정 행동은 왼손이 몰아서 맡아하고, 또 다른 특정 행동들은 오른손이 몰아서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왼손을 사용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글씨는 오른손으로 쓴다. 물론 그림도 글씨도 한 손 잡이들 보다 훨씬 능숙하게 반대 손을 사용하여 해낼 수 있지만 깁스한 팔로 움직이는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기서 내 행동을 훨씬 면밀히 살펴보면 더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종이에 그린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연필을 오른손으로 든다. 팔을 쭉 뻗어 대상의 크기를 연필 길이에 맞춰 대략 가늠해보고 가로선과 세로선을 종이 위에 슥슥 긋는다. 원하는 비율로 가이드라인을 그은 후에 자연스레 왼손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왼손은 거침없이 그림을 그린다. 명암도 넣고, 세부를 꼼꼼하게 그려 넣는다. 중간중간 자연스러운 그러데이션을 넣기 위해 오른손 손가락으로 문댄다. 만족스럽게 그림이 그려지고 나면 다시 오른손이 연필을 이어받고 그날의 날짜와 싸인을 써넣는다.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럽게 왼손과 오른손의 협업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던 진정한 양손잡이의 정의에 따르며 이 같은 행위를 손을 바꿔 재현해도 똑같이 자연스럽고 편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오른손으로 그리고 왼손으로 사인을 한다고 생각만 해도 어딘가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


이런 예는 또 있다. 내가 주스를 만들어 먹기 위해 과일을 손질한다고 생각해보자. 냉장고 문을 오른손으로 열고 오른손으로 사과를 꺼내 도마 위로 가져간다. 오른손으로 과도를 꺼내 오른손으로 사과의 껍질을 깎는다. 사과는 이내 말끔히 속살을 내비친다. 이때, 왼손이 자연스럽게 칼을 넘겨받는다. 오른손이 사과를 잡아 지탱하는 동안 왼손으로 사과를 4등분으로 자른다. 그럼 또 오른손이 칼을 넘겨받고 꼭지 부분과 가운데 씨가 있는 부위를 도려낸다. 그럼 또 어느샌가 칼은 왼손에 쥐어지고 사과를 작은 조각으로 썬다. 다 썰린 과육을 양손이 사이좋게 들어 블랜더 통에 넣는다. 오른손으로 다이얼을 돌려 주스 모드에 맞추고, 작동 버튼을 누른다. 오른손으로 갈아진 주스를 컵에 담고 왼손으로 수저를 잡고 가라앉은 과육을 다시 잘 섞어준다. 마실 때는 보통 오른손으로 마신다. 무조건 왼손으로 젓가락과 수저를 사용하면서 컵은 오른손으로 들고 마셔야 편한 게 아이러니하다.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어떤 일은 왼손이 편하고, 어떤 일은 오른손이 편하다고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본능적인 행동은 왼손이 도맡아 하는 경향이 있고, 후천적으로 배운 행동은 오른손이 도맡아 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습득한 양치하기, 그림 그리기, 가위질하기, 젓가락질하기 등등을 보면 크게 틀린 분류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어떤 행동들은 오른손을 사용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너 왼손잡이였어?"라는 질문을 받는다. 내가 오른손잡이인 줄 알았다가 나와 밥을 같이 먹을 때 식사하는 팔이 부딪히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그 질문이 날아든다. 특히 내가 한창 탁구 동호회에서 활동할 때에는 매 뒤풀이 자리마다 저 질문을 안 듣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왜냐하면 탁구는 오른손으로 치기 때문이다.


내가 인생에서 정말 후회하는 일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게 바로 탁구채를 오른손으로 먼저 잡은 일이다. 차분하고 얌전한 겉모습과는 달리 나는 승부욕이 강하고 운동을 정말 좋아한다.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를 찾아 헤매다가 탁구 동호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처음 탁구장에 발 딛는 순간부터 이 세계에 푹 빠져버렸다. 내가 처음 탁구장을 찾았을 때 모두가 오른손으로 탁구를 치고 있었다. 탁구채 잡는 법부터 알려준다고 친절하게 다가 온 분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의 오른손에 탁구채를 쥐어주셨다. 아, 그렇구나. 탁구는 오른손으로 하는 운동이구나.


나는 타고난 운동신경(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ㅋㅋ)으로 처음부터 잘 따라 했고, 아무도 내가 왼손잡이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른손으로 탁구 치는 것이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편해진 어느 날, 나는 뒤풀이 자리에 참석했다가 또다시 그 질문을 받았다.


"너 왼손잡이였어?!!!!!!"


보통은 그저 신기하다는 투로 말하는데 이번엔 뉘앙스가 달랐다. 내가 왼손잡이인 것이 출생의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격앙된 목소리였다.


"네... 저 왼손 잡인데 둘 다 써요."

"아니 근데 왜 탁구는 오른손으로 쳐?"

"그냥 처음에 오른손으로 채를 잡아서요?"

"(탄식) 하아... 이런이런. 왜... 왜... 왜 오른손으로 쳤어? 왼손으로 쳤어야 하는데..."


알고 보니 스포츠 세계에선 왼손잡이가 엄청나게 유리했다. 통상적으로 왼손잡이의 수가 적다 보니 전술 전략적으로 강점이 많았다. 탁구를 예를 들자면 서브를 넣을 수 있는 위치와 각이 오른손잡이의 반대다 보니 오른손잡이에 익숙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레 낯설고 어려운 상대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핸드 드라이브(라켓을 잡은 팔의 반대편으로 순회전을 줘서 치는 타법)보다 포핸드가 훨씬 강한데 왼손잡이는 이와 반대기 때문에 평상시에 블록 하던 방식으로 상대하면 여지없이 그 강하고 빠른 드라이브에 당황한다. 혹자는 왼손으로 시작하면 처음부터 점수를 몇 알 따고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분통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란 책 제목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지금에 와서 왼손으로 다시 친다면 괴발개발이 따로 없을 것이 자명했다. 늦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왼손으로 연습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나의 연습 메이트이자 남자 친구(현 남편)가 왼손 연습을 도와달라고 하면 자꾸 귀가 안 들리는 척 딴청을 피워서 포기했다. (공 줍기 힘들다는 거 나도 안다고... 흙흙)


어찌 되었든 후천적으로 오른손을 다방면에 활용하게 된 결과 이제 인바디 결과를 받아보면 오른팔의 근육이 왼팔을 능가한다. 그래서 힘을 써야 하는 모든 일은 오른팔이 앞장서서 하고 있다. 평소 아무런 의식 없이 생활을 하다가 최근 공책에 그래프도 그려 넣고 목표도 적어 넣을 때 뭔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를 이용해 선을 그을 때는 왼손으로 하다가 글씨 쓸 때는 오른손으로 하고 동그라미를 크게 그려 넣을 땐 또 왼손으로 자연스레 바꿔 그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것을 주제로 진지하게 글을 써 보고 싶었다.


별건 아니지만 참 재밌지 않은가?

나는 왼손잡이로 태어났지만 양손잡이로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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