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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Apr 24. 2020

오늘 찾아온 우울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모자를 쓴 잔느 에뷰테른,  모딜리아니 作








집안일은 잠시 옆으로 치우고, 컴퓨터를 켠다. 지금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게 시급하기 때문이다. 아침 운동도 다녀왔고, 출근 전에 끝내 놓아야 할 일들이 많지만 그 어디에도 마음이 가지 않는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매일 지속되어 온 평온함 감정과 잔잔한 평화에 물결이 인다. 우울은 예고 없이 불쑥 나를 찾아왔다.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우리 사이. 


우울한 감정은 묘한 중독성이 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내 주변을 감싸는 우울의 장막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으면 잠시 현실 속 다른 차원이 빼꼼 열리는 기분이 든다. 현실과 분리된 채 그 특별한 공간에서 나만의 우울한 여행을 계속한다. 


오늘 찾아온 우울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가만히 들여다본다. 가만히 응시를 하고 있으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우울의 눈동자, 우울의 귓불, 우울의 콧망울, 우울의 보조개까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 나를 찾아온 우울은 엄마의 눈동자를 하고, 친구 A의 귓불을 하고, 귀여운 아기의 콧망울을 하고 있다. 





엄마가 또다시 4일째 전화를 하지 않는다. 마지막 통화는 대략 30초 만에 끝났다.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걸려 온 엄마의 전화. 나는 좀 귀찮았다. 그게 내 목소리에서 분명 티가 났을 것이다. 귀신같이 감정을 읽어내는 엄마와 귀신같이 상처 받은 엄마를 감지하는 딸. 엄마의 안부에 적당히 네, 네, 별일 없어요, 뭐 맨날 똑같아요 같은 무성의한 대답만 했다. 엄마는 어, 그래 잘 지내라 하시더니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말 '지내라'의 '라'자가 채 발음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진 것을 보며 엄마가 나의 냉랭함에 상처 받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오던 엄마의 전화가 당분간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엄마를 실망시켰다는 생각이 가시가 되어 박혔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의 지나친 걱정과 애정에서 사춘기 소녀처럼 어떻게 해서든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고 싶어 버텼다. 나를 조금만 놓아주세요. 엄마에게 커가는 동안 꼭 하고 싶었던 한마디였지만, 그게 얼마나 불효한 말이지 스스로도 알았기에 결코 입에 담지 않았다. 한편으론 이런 내가 나와 꼭 닮은 딸을 낳아서 몇십 년 후에 똑같은 말을 듣게 될까 봐 두렵다. 우울의 눈동자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친구 A는 여전히 연락이 없다. 이 친구의 세계에서 내가 완전히 분리되어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엄마에게서 느낀 감정을 이 친구는 나에게서 느낄지도 모르겠다. 나를 상처 주고, 상처 주고, 지독하게 이기적으로 구는데도 불구하고 친구 A에 대한 나의 숨길 수 없는 애정에 매일 베인다. 우리 사이가 다시는 과거의 한 때로 돌아갈 수 없음이 명백하지만 산산조각 난 우리의 과거를 투명 테이프로 붙여서라도 애써 모른척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우울의 귓불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낭성 증후군 때문에 난임센터에 가서야 제대로 된 임신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젠 2달, 3달 동안 매일 배란 테스트를 하며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3달 만에 가까스로 배란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남편의 일 때문에 시기를 놓칠 때면 혼자서 그렇게나 울었다. 그렇게 나의 3개월간의 기다림이 수포로 돌아가고...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의 지옥을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병원의 도움을 받은 후로는 우리에게도 매달 기회가 왔다. 평범한 부부들에게는 규칙적으로 찾아왔을 그 기회가 우리 부부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졌다. 지난달의 실망을 오늘 되풀이하면서 또다시 실망한 내가 밉다. 실망했는데 실망하지 말자며 나를 타이르는 스스로가 싫다. 그건 위선이잖아. 지금 마음 아프잖아, 속상하잖아, 울고 싶잖아. 그럼 그냥 울면 안 되나? 꼭 괜찮다고, 앞으로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데 이까짓 일로 우울해하냐고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나? 오늘만 좀 울자. 하루 정도는 괜찮잖아? 우울의 콧망울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를 찾아온 우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어루만져 본다. 너는 이렇게 생겼구나, 여기가 이렇게 올라가고, 여기가 이렇게 푹 파여 있구나. 우울의 얼굴이 더 이상 낯설지 않자 내 마음도 차츰 안정을 찾는다. 오늘 정말 반가웠다고 비로소 인사를 하고 떠나보낼 준비가 되었다.



다음에 찾아올 우울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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