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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Jul 05. 2019

내가 청소할 때 핸드폰을 하는 그대에게

내 표정 안 보이니?

지친 모습으로 퇴근한 남편을 토끼처럼 뛰어가 안아주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대문을 여는 그 순간이 아마도 하루 중 그가 가장 사랑스러울 때이리라.

나는 그가 새벽에 일어나 회사에 나가서 온갖 스트레스를 이겨가며 벌어오는 돈으로

혼자였다면 시도해 볼 용기조차 낼 수 없었던 일들을  도전하고 있다.

여태까지는 투자 대비 벌이가 시원찮아서 여간 미안한게 아니다. 

그래도 남편은 자기가 버티고 있으니 젊었을 때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어보자며 듬직하게 말한다.

그런 그가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데 어찌 뛰어나가지 않겠는가.



여기까지는 참 달콤하고 아름다운 결혼 생활의 단면이지만

우리의 삶은 티비에서 방영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왜냐하면 교묘한 편집이 가능하지도 않고, 정해진 분량이 지나면 다음 시간을 기약하며 

그 자리에서 뚝 끝나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Life goes on...




그렇다. 내가 그렇게 토끼처럼 뛰어가 수고한 남편을 안아주고 난 후에도 

우리의 일상은 계속된다.



간만에 치킨과 맥주가 땡겨서(내가 술이 생각나는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일이다)

사이좋게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요새 정주행중인 추억의 미국 시트콤 프렌즈를 깔깔거리며 봤다.

배가 기분 좋게 불렀고, 누구하나 먹고 남은 것들을 치울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시트콤을 한 두편 더 봤다.



어느새 남편은 귀엽게 봐주기엔 조금 큰 소리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잠깐 자고 일어나는 것은 남편이 퇴근 후 즐기는 그만의 삶의 낙이었다.

나는 옆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면서 머리를 좀 식히다가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슬슬 치우지 않은 식탁이며 너저분한 방이 신경 쓰여 일어났다. 

곤히 잠든 남편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움직였다.


남편이 마구잡이로 벗어 둔 바지, 구석에 팽개쳐있는 상의.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가방들과 치워도 치워도 쌓이는 머리카락.

내가 낮에 바쁜 일이 있어서 청소를 못하는 날이면 집안은 정말 개판이다.



변수는 항상 나다.


내가 청소를 하면 좀 덜 개판이고,

내가 청소를 못하는 날은 아주 개판이다.




그러니까 남편의 값은 항상 정해져 있다.

남편 = 청소하지 않음


그는 내가 물리력을 사용하거나 정확한 언어로 값을 입력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기계같은 인간이다.






청소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이랬다.


'남편이 힘들게 일해주니까 새로운 일도 도전해보고 여유를 부릴 수 있지! 그러니 집안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자! 게다가 청소는 내가 더 잘하잖아!!'


여기저기 놓인 큰 물건들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고,

자잘한 쓰레기들을 분리해서 버리고, (이때쯤 남편이 잠에서 깼다)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모아서 옷방에 가져다 놓고, (핸드폰을 찾아서 침대에 다시 가 누웠다)

아까 먹은 식탁을 치우고, (뭘 보는지 실실 웃으며 핸드폰만 쳐다본다)

음식 쓰레기도 따로 분류하고, (이따금 나한테 "자기 뭐해?"라고 묻는데 몰라서 묻는지 진심 궁금했다)

설거지도 하고, (내 청소가 길어지니 한두번 어슬렁 내 옆에 와서 볼에 뽀뽀를 하곤 다시 침대로 갔다. '뭐지? 이 인간? 뽀뽀할 시간에 식탁이라도 좀 닦아주지??')

방 걸레질을 구석구석할 때까지도 해맑은 표정으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남편을 보니

피가 꺼구로 레이싱한다. 하하하핫. 



뭐지 이 억울함?!




차라리 집안일이 아니라 내가 회사에서 야근을 했더라면 덜 억울했을까.

너무나 태연하게 '집안일은 난 몰라요'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핸드폰을 하는 모습을 보니

미간에 슬며시 주름이 잡혔다.



넓은 마음으로 열심히 청소하려던 처음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의 걸레질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남편은 나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고 눈치를 보다가

청소가 거의 마무리 될 때쯤 "내가 뭐 좀 도와줄까?"라고 물었다.





하핫. 기가차서 웃음이 나왔다.



자, 이제 청소도 다 끝났겠다 본격적인 바가지 긁기 타임인가...


"여보 자기 힘들게 일하는 것도 알고, 엄청 고마운데 그래도 집안일은 같이 하면 안될까? 내가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적긴하지만 일을 안하는 것도 아니고 낮시간에도 노는게 아니라 집안일하고 내 스케쥴이 있는데 저녁시간에까지 손하나 까닥 안하고 여보가 핸드폰 하고 있으면 정말 속상해. 내가 자기 대신 집안일하려고 결혼한 건 아니잖아..."


"미안해, 잘못했어 자기야. 내가 뭐 도와줄까?"


'이미 청소 다했다고 이 인간아...'


...인정이 5G급이다. 이 티없이 맑은 눈망울 보소.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며 미안하다는 남편에게 

무슨 더 할말이 있을까... 싶지만, 나는 할말이 많다.


왜냐하면, 이 똑같은 레파토리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 몇 번은 그의 사과에 '아, 참 착하기도 하지. 나는 참 착한 사람과 결혼했구나!' 싶었지만

이런 상황이 수십번 반복되다보니 '아놔, 장난하나?'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습관적인 그의 사과에는 무언가 중요한게 빠져있었다.

두 글자고 지읒으로 시작하는 단어다.

.

.

.

.

.

.

.

.

.

.

진심.



생각 좀 하고 사과해라! 쫌!!


적어도 내 말이 끝나고 2~3초라도 쉬며 생각이라는걸 좀 한 후에 사과하면

그럴싸하게 속아 넘어가겠는데 이 인간의 사과는 지나치게 명랑하며 거침이 없다.





그의 명랑한 사과를 가볍게 무시하고

그간 쌓였던 잔소리를 조금 더 쏟아냈다.


"여보, 맨날 미안하다고만 하지말고 진심으로 집안일은 서로 노력하는 걸로 생각해주면 안돼? 반대로 내가 매일 야근하는 직장에 다니고 퇴근해도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것은 내 몫일 것 같아. 자기가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면 너무 피곤한 건 알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최소한 집안일에 대해서 자기의 책임을 잊지 않는 태도라고. 청소를 못 도와주면 어지르지라도 말던가, 옷은 사방팔방 벗어놓고... 청소를 해도 자기가 집에 오면 또 똑같아지잖아. 그리고 내가 진짜 억울한게 뭔 줄 알아? 나는 일상적으로 집안일을 하며 노력하고 있는데 자기는 가끔 내가 부탁해서 청소를 해놓고 엄청 생색을 낸다는거야! 우아, 거실이 왜이렇게 깨끗하지? 우와, 누가 설거지를 다했네?라는 말을 들으면 고맙다고 멋지다고 칭찬하면서도 쳇, 나는 맨날 하는 일인데 매번 고맙다는 인사도 못 받는데, 가끔 한 번 해놓고 드럽게 생색이네라는 생각이 든다니까? 만약에 내가 기분 좋게 집안일을 하도록 도와주려면 매사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칭찬을 해주던가, 그게 아니면 적어도 내가 집안일 할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 생각해서 한 두개라도 거들어주면 좋겠어! 막말로 내가 아침 일찍 출근하고 야근을 밥먹듯 하는 회사를 다녔어도 집안일에 관해서는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단말이야. 이건 단순히 집안일을 누가 더 많이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집안일을 대하는 그 태도에 대한 문제야. 자기가 나 먹여살리려고 결혼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자기 집안일해주려고 결혼한게 아니잖아? 나도 내 몫의 경제활동을 하려고 노력 중이니까 자기도 집안일에 대한 자기 몫의 노력을 해주었으면 좋겠어!"


"아잉, 알았어. 미안해 자기야.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이번 대답도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아아, 이 맑고 투명한 인간이여.




적어도 속에 있는 말은 시원하게 내뱉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또 다시 이 진심이 담기지 않은 깃털같은 사과에 만족해야겠다.








으이그, 귀엽다가도 징글징글하다가도. 

참 내 남편이지만 신기한 사람이다.




내가 열나게 청소할 때 핸드폰을 하는 남편의 모습에 현타가 오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기에

툴툴 털고 오늘도 그의 속없는 약속을 믿어보기로 한다.







어쨌거나 Life go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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