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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Jun 28. 2020

외계인과 기도응답

외계인을 만난 기독교인

테드 창의 SF 단편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드뇌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 2016' Arrival>(왜 한국에서는 영어 제목 그대로를 사용하지 않았을까?)를 본 것은 오래전 일이다.  어느 날 몇몇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술자리이기에 하지 않았어야 할 종교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 나는 문득 이 영화를 떠올렸다. 당시 술자리에서 나누던 대화의 주제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의 삶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반영될 것인가 정도로 기억한다.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것들 조차 신의 결정을 기다려야 하며 자신의 선택과 기도에 대한 응답을 구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는 종교인들의 행동을 변호하는 누군가를 보며 예전에 내가 느꼈던 혼란이 떠올라 슬퍼졌다.


나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쩔 수 없는 모태신앙인으로 살아왔다. 유학시절 균열이 생겼던 나의 신앙은 불신으로 확증되었고 시간이 흘러 나는 불가지론(?)과 무신론자의 사이 어디 쯤의 입장이다. 


유학 시절  '도대체 왜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인가?  그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고 계획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왜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인가? 왜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설계해둔 세상에서 그저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들으려고 기도나 하라는 건가? 그렇다면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등등의 의문들로 기독교에 대한 불신의 키웠기에 나에게 인간의 자유의지는 매우 중요한 삶의 화두였다.


술자리의 대화를 이어나가며 기독교인들이 신과의 영적 대화라고 주장하는 '기도'라는 것이 어쩌다 이렇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모든 일상을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맡겨버리는 삶의 태도를 정당화하는가?라는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던 외계인들과 인간이 대화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 나는 절대자와 소통하기 위해 인간이 하는 의식()적 행동인 '기도'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불현듯 외계 비행물체가 지구에 출현한다. 외계 생명체는 인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언어학자인 주인공은 인류를 위해 외계 생명체의 메시지를 해석해야 할 임무를 가지고 그들을 대면한다. 외계 생명체의 메시지는 인간의 선형적인 시간 차원보다 매우 월등한 통시적이고 전달의 오류가 없는 고차원 언어로 표현됨을 주인공은 깨닫는다. 주인공은 이윽고 그들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게 되고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오게 된 목적을 추적하게 된다. 외계 생명체의 언어를 해석하려는 노력을 통해 주인공은 점차 그들과 동화되어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예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다가올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주인공이 과연 미래를 선택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부분은 영화를 보는 사람마다 달리 판단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메시지를 내포하기에 나는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사랑이라는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불행해보이는 미래를 선택하게 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너무나도 짧고 부족한 요약이기에 궁금하다면 영화를 제대로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영화는 외계 생명체와의 대화 시도라는 장치를 통해  인간과 신의 관계를 우화적으로 비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관계 설정이 닮아있다.  인간은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애쓴다. 기도응답을 받은 증거를 찾아 헤맨다. 언어로 정의되지 않아야 할 신비로운 과정을 인간은 또 언어로 정의 내리고자 노력한다. 신의 메시지는 포괄적이다. 신은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창세와 종말을 기획한 인간의 상상이 닿지 않는 존재다. 우리는 인간의 언어적 능력을 총동원해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가두고  인간적 정의를 내린다. 신의 언어는 인간에게 너무나도 모호한지라 외계인이 남긴 메시지를 두고 갈등하는 영화 속 인류의 모습처럼 언어로 쌓은 종교의 위계와 논리들은 바벨탑처럼 다시 언어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그러한 파멸을 막기 위해 메시아적 존재가 필요하다.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 실체로써 구현하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 영화를 통해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인 메시아의 새로운 기능적 가치를 깨닫게 된다. 왜 굳이 신은 인간의 몸에 자신의 존재의 일부인 아들을 구속하여 지구 상에 보낼 수밖에 없었나라고 하는 질문에 매우 직관적이고 납득이 되는 설명을 영화에서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 인간의 선형적 사고가 지배하는 시공간에 신의 존재를 욱여넣어야만 인간들이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써 기능하는 새로운 메시지를 인간의 언어로 남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메시아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끔찍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비극이 예정되어 있음을 태어나는 순간 혹은 창세전부터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을 입은 메시아는 신에게 기도한다. 가능하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해 달라고. 인간의 몸으로 구속된 신의 아들도 절대자가 계획한 십자가형의 고통이 두려웠던 것일까?  자신이 창조한 세상의 변화를 기획한 신에게는 피조물의 몸을 입은 분신의 기도도 한낱 넋두리에 불과하다. 신이 기획한 이 모든 이야기의 완결성을, 영원성을 우리가 가늠할 방법은 없다. 신의 존재는 우리가 사는 세상 저 멀리 위에 있지만 우리는 그 밑바닥 조차 볼 수가 없다. 메시아 역시 자신에게 온 잔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메시아의 육신적 소망이 담긴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지만 신의 계획은 성취되었다.


기도라는 것이 나의 오늘을 위해, 나의 이익을 위해, 나의 미래를 위해 신에게 외치는 소리라면 그 기도에 대한 제대로 된 응답은 기대하기 힘들다. 나의 삶을 좀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완벽한 존재의 계획과 응답을 기다려본들 시공간 너머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곳에 존재하는 신의 응답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결론으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결론을 우리는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우리가 알거나 모르거나 세상과 나의 삶이 신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모르고 나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한 번뿐인 이 인생을 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신이 우리에게 선물한 자유의지는 바로 우리가 신이 조종하는 로봇이 아닌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결정할 수 있는 독립적 개체로 기능하라는 메시지는 아닐까? 또한 이미 모든 것이 기획되고 예정된 이 세계에 당신을 만족시킬 기도 응답을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에게 베풀었다간 정말로 신의 계획은 엉망진창이 되고 세상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짐 캐리가 신의 능력을 부여받아 마음껏 모든 이의 기도응답을 들어줘 생기는 온갖 해프닝을 그렸던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는 그래서  마냥 우습지만은 않다. 당신만을 위한 당신의 기도에 대한 만족스러운 신의 응답을 기대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전통 기독교적 사고의 종말은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당신의 삶을 위한 기도는 신과 대화를 하기 위한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메시아)의 제자가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묻는 장면이 등장한다.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라는 제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이 대답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충고는 적어도 너희들은 너의 현재의 삶의 개선과 미래에 벌어질 일을 위해 기도하지 말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그 계획의 절대성을 위해 기도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인간세상을 사랑해서 이 땅에 내려오신 메시아가 우리의 기도를 그렇게 정리해준 것은 기도 속에 너의 욕망과 야망을 담지 말고 절대자의 뜻을 순종하고 그 뜻을 따르며 인생을 살다 보면 이미 당신의 기도는 응답받은 것과 다름없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교회들은 어떤 기도를 가르치고 있는가? 여전히 기도하면 복이 와요, 소원을 빌어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의 일신의 영광과 가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기도는 나의 복을 위함이 아님을 가르치지 않은 종교인들의 잘못이고 그들 또한 자신의 영욕을 갈구하기에 한국의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타락해버렸다. 기도의 본질적 목적을 곡해하고 대가를 바라는 마음은 한국 기독교 어디에서나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추악하고 비열한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키워드 두 개를 꼽으라면 '언어' 그리고  '사랑' 일 것이다.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인간적 감정은 불행으로 예정되어 있는 미래를 극복하는 개인의 의지 표현으로 그린다.  인간의 언어인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유한한 삶에서 더없는 영원성을 희망하는 의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끝이 정해져 있는 우리의 연약한 삶에서 우리는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러한 관계에 애정을 가지며 결국 사랑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통합한 외계인 혹은 절대자가 우리와 동일한 언어적 감성으로 사랑을 하기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존재이며 또한 완벽한 존재이기에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회적 감성으로 사랑을 할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이란 지극히도 인간적인 감정이다.  


외계인이 사랑을 알까? 신의 사랑은 무엇인가?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사랑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며 매우 질투하며 잔혹하고 때론 피를 부른다. 어느 때는 인간의 사랑만도 못해 보인다. 절대자의 피조물을 향한 감정 중 인간이 사랑이라고 정의 내린 어떤 행동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신의 그러한 행동을 사랑이라는 단어에 가두어버린 인간 언어의 한계다. 혹은 오래전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언어로부터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언어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라는 단어는 사랑을 돌려받을 수 없는 상태의 폭력적 반응이라는 양면성 또한 내포하는 단어로 그 범주를 키워왔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간 언어가 가진 시간의 한계이고 우리가 절대로 신의 생각을 경전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오늘날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우리가 서로 공유하고 나누는 사랑의 감정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기에 아름답다.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고 있는 언젠가는 사라질 혹은 이미 사라져 버렸을 별이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바꾸어가며 빛을 발하는 것을 우리가 경탄하는 것처럼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타자를 사랑하는 감정이야말로 절대자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감정 이리라.


#외계인 #기도응답 #종교 #기도 #메시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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