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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Jun 28. 2020

코로나 19 이후의 한국 재즈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에서  


코로나 19 사태가 종식된 이후에도 재즈 뮤지션은 여전히 아무런 소속감 없이 그저 각개전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지역의 모든 축제들이 연달아 취소되고 클럽이 문을 닫고 호텔 연주도 종료된 마당에 코로나 19 이후를 준비하는 아이디어들이 필요해 보인다.  


이런저런 유사 예술 단체를 잘도 만들어 내는 클래식에 비해 재즈 뮤지션들은 워낙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탓인지 문화예술계에서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 같다. 코로나 19 사태로 말미암아 문화예술계 너나 할 것 없이 돈을 못 버는 형편이 되어버린 현실에 그나마 지역문화예술재단이나 정부에서 공모하는 문화예술 지원 사업을 따박따박 받아 챙겨 먹고 그것도 모자라 알아서 떠먹여 주는 음악계의 독보적 장르는 클래식으로 보인다. 그들을 공공의 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문화예술계 주류의 한자리를 차지한 그들 공동의 노력은 축하받을만하다. 일제 강점기로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사회로 뿌리내린 클래식 음악은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를 콩나물 대가리라며 음자리도 분간 못하던 우리나라 사람에게 교양의 상징이었고 새 시대의 장을 열어갈 배경음악이었다.

피아노 학원이 초등학교 주변에 깔리고 학교마다 오케스트라를 세우는 등 정부의 지원하에 관리된 클래식 음악계는 우리의 문화 속에 오래도록 뿌리내린 역사가 존재하기에 클래식은 순수예술장르를 표방하는 문화예술계의 주류임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현재 코로나 19로 인한 긴급 창작예술지원 사업과 같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야 할 공모사업들은 클래식 일색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미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충분히 받고 있는 오케스트라, 합창단, 오페라단, 중창단은 기초공연예술단체로 분류되어 보호되어야 할 음악분야로 구분된다. 그에 비해 순수예술과 대중음악 사이의 경계에 모호하게 서있는 재즈는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서 대중에게는 멀어진 그러나 주류에 편입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한 애매한 장르가 되어버렸다. 재즈 연주자에게 돈을 쥐어줄 대중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정작 대중성을 가진 음악으로 분류되기에 국민의 혈세로 재즈음악을 보호하기 애매하다는 관의 입장이다.


사실 코로나 19가 닥치기 이전부터 재즈 뮤지션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이 재즈를 즐겨 듣는 사람보다 많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일년에 실용음악과에서 재즈를 공부하고 졸업하는 학생들은 어림잡아도 몇천명 정도는 될것이다.  개중에 연주자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학생들은 재즈클럽의 문을 두드린다. 극소수의 마니아 혹은 번듯한 데이트 장소로 젊은 커플들이  찾는 재즈 클럽에서 대부분 연주경력을 시작한다. 그런 생활도 어느 정도 젊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야겠거니 생각하면 안정된 직장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음악을 하면서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제한적이다.


일찍 미국 같은 재즈 선진국에 유학을 다녀온 선배들은 그 해답을 자신들을 교육했던 바로 그 시스템에서 찾아냈다. 음악으로 유학을 가는 것이 생소하던 시절 몇몇 앞서가던 선배들은 버클리 음대 같은 곳에서 유학을 했다. 그들이 귀국한 후 90년대 우리나라 음악계는 본토박이 음악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그들에게 열광했고 그렇게 우리나라에는 실용음악 광풍이 불었다. 2000년대 초반 교양 있는 재즈의 얼굴과 커져가는 음악시장이라는 몸뚱이를 갖춘 매력적인 시장이 대학이라는 이름표 찍기 좋은 정규 트랙에 편승하기 시작했다. 딴따라 취급받던 뮤지션의 대접이 달라졌다. 이 멋진 이름표를 달아야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주인의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아 학생들은 너도나도 실용음악과 입시를 보기 시작했다. 실용음악과 교수라는 타이틀은 학생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거의 모든 실용음악과는 재즈 전공자 특히 미국이나 유럽 등 유학을 다녀온 연주자들을 학교 교수로 초빙하기 시작했다. 실용 음악판은 갈수록 커졌고 실용음악과를 유치하는 학교는 갈수록 늘어났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대학에 누가 얼마를 줬네. 누가 누구를 음해했네. 누가 교수가 되기 위해서 누구를 밀어냈네 등등의 흑막이 드리운 정치적 수사들이 재즈판을 뒤덮기 시작했다. 어느덧 학생들은 교수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라인에 줄을 서기 시작했고 그 라인에 들어가느니 마느니로 연주자들이 평가받는 상황이 빈번했다. 하지만 늘어나는 연주자에 비해 재즈 시장은 여전히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 크고 작은 축제가 생겼지만 모두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아니었다.


재즈 연주자들이 주로 연주하는 클럽의 연주 페이는 갈수록 줄어들거나 예전과 다름이 없었고 여러 클럽이 그 와중에도 성했고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 우후죽순 생겼던 실용음악과는 저조한 취업률로 인해 쓸모없는 학과로 전락하기 시작했고 그나마 성했던 곳은 대중음악의 새로운 조류와 맞물려 변해갔다. 더 이상 학생들은 돈벌이 안 되는 재즈를 존중하지 않는다. 너도나도 떠났던 재즈 유학러쉬에서 돌아온 연주인들을 반겨줄 학교는 없어지거나 줄어들어 경쟁은 심해지고 교수자리를 위한 비지니스 시대가 열렸다. 갈 곳 없는 연주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용음악학원을 만들고 누가 누구를 좋은 대학으로 보내줄 수 있느니 유학을 보내주느니 하면서 이제는 그 선배들이 자리잡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시대가 도래했다. 끔찍한 쳇바퀴다. 이런 시대의 변화 중간 어디쯤에 자리잡기 위해 노력했던 나의 삶도 여기저기서 생채기를 받았고 염증으로 번졌으며 나는 서울 재즈판을 떠났다.


대체로 무대에 서는 연주자를 동경해 음악을 시작했던 사람들이 그저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했던 일이 확장되어 기득권화되고 고착화되다 보니 병폐가 하나둘 생기면서 순수했어야 했던 재즈판을 오히려 위축시켰고 그 상황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한국 재즈 뮤지션은 사람들에게 멀어져 갔다.


 현재 한국 재즈 씬은 앞뒤로 막혀 그저 존재할 뿐 과거의 영광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 사정을 잘 모르는 대중들은 일 년에 한두 번 국제적 축제 성장한 자라섬 국제 재즈 페스티벌이나 서울 재즈 페스티벌이니 하는 곳을 찾아가 한국 재즈의 위상이 놀랍게 발전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판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가로젓는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물론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좋은 연주자는 꾸준히 나올 것이고 좋은 연주공간이나 축제는 꾸준히 나오겠지만 그 모든 것은 이제 각개전투의 일환일 뿐 다리 하나 건너면 서로 다 아는 재즈 뮤지션들의 집단의 목소리는 들을 곳이 없다. 또한 수도권에 편중되어 있는 우리나라 문화적 구조 덕분에 지역기반으로 활동하는 재즈 뮤지션들의 삶은 더욱 비루하고 보잘것없다. 수도권에서 활동하지 않는 지역 뮤지션이라는 딱지는 어디 축제 포스터에 제대로 이름도 올리지 못하고 그저 제주 지역 뮤지션으로 뭉뚱그려지기 일쑤다.  


재즈음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대중음악으로 출발해 순수예술로 변해가는 큰 줄기가 있다. 1920년대 미국을 강타한 스윙 시대를 지나 1940년대 예술적 가치를 추구한 몇몇 진지한 연주인들의 언더독 문화였던 비밥 시대에 재즈의 예술적 가치가 싹을 틔웠고 이후 재즈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해 수많은 다른 장르를 포용했고  새로운 음악적 조류를 만들어냈다.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힙합도 따지고 보면 제임스 브라운의 펑키 음악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고 펑키 음악 역시 리듬 앤 블루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리듬 앤 블루스도 재즈의 원형인 블루스 음악으로 귀결된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구분할 수도 없거니와 그런 장르적 구분이 불가능한 음악이라는 이야기다.


한국 재즈 1세대 어르신들은 이제 거의 대부분 세상을 떠나셨다. 그들이 남긴 족적은 제대로 기록되거나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 그들을 기념하는 공간도 없다. 그저 순수한 딴따라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무대에 서고 연주비를 받으며 살아가던 순수한 음악인 들이였다. 그중 몇몇은 한국 대중음악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우리나라에 재즈음악이 뿌리내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누군가에게 학위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원래 재즈는 그런 음악이었고 재즈 연주자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왜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기념하지 못하는가?


 미국에서 재즈는 그들의 전통음악이기에 다양한 정책을 통해 보호한다. 그래미 같은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매년 다양한 카테고리의 재즈 뮤지션들을 시상하며 그들의 연주와 리코딩을 치하한다. 지역별로 재즈협회들이 존재해 연주자들의 권익을 보호한다. 그들의 음악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도 할 수 있었던 일이다. 한국 2세대 재즈 연주자들부터 미국 유학을 다녀왔던 선배들이 실용음악과에 취업해 새로운 음악 주류로 등장했을 때 왜 우리는 이런 일들을 하지 못했던가. 유명 재즈 뮤지션은 훌륭한 기획사에 의해 제대로 관리되고 있기에 이런 나의 주장은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다음 세대에 등장할 재즈 뮤지션이나 현재 실용음악과에 재학 중이며 꿈을 키우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오늘날 한국 재즈의 현실은 암담하기 그지없다.


위기 속 기회다. 코로나 19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춰진 이때 재즈 연주인들의 생계고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코로나 19 사태가 종료된 이후에도 재즈판이 이전과 다를 것 없이 흘러간다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유사 사태에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연주인들이 있을까?  이 참에 바꿀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이 있다면  그런 활동들을 시작해야 한다.  더 늦어지기 전에 바꿀 수 있는 것들은 서로 힘을 모아 바꿔야 한다. 재즈 뮤지션도 하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순수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고 더 좋은 음악시장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더 이상 주류 재즈 신에서 활동하지도 않는 내가 이런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건 당장 오늘을 걱정해서가 아닌 다음 세대 뮤지션들을 위한 걱정이다.  학교에서 키워내는 학생들을 위한 걱정이다. 나도 먹고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언제까지 학생들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선생이고 교수임을 자랑스러워할 작정인가. 적어도 괜찮은 시장을 만들어주기 위해 싸울 것은 연대하여 싸우고 지킬 것은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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