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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Aug 18. 2023

중년소년의 잠깐 트레블로그

5. Saint Jean Pied de Port - Zubiri

순례길 DAY 1. Saint Jean Pied de Port - Roncevalles

새벽 다섯 시 무렵 내내 뒤척이다 선잠에 깬 나는 급할 것 없는데도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낯선 사람들에게 서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른 아침에 여유를 가지고 출발하고 싶었지만 서툰 패킹 때문에 괜히 옆에서 곤히 자는 사람들만 깨워버렸다. 능숙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에 살짝 거북함을 느꼈다.  밖을 나서니 여전히 밤이었고 보름달에 가까워진 달이 앞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하지만 도로는 여전히 어두워서 스마트폰에 미리 설치해 둔 GPS 가이드 애플리케이션이 없었더라면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농가를 벗어나 한참을 걸으니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며 지나온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 설익은 초록 언덕 사이를 흐르는 물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알 것 같았다. 점점이 자리한 농가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 위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이곳을 걷고 있다는 기쁨이 샘솟았다. 생장에서 론세바에스로 향하는 순례길 첫날의 아침은 이렇게 산뜻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었던 포장도로 구간을 지나니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었다. 해는 중천에 떠올랐는데 주변엔 마을하나 상점하나 없는 길이 계속되다 보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배는 고파오는데 어디쯤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가파른 산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곳에 검은 옷차림에 독특한 모자를 쓴 외국 여성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영어로 간단한 대화를 시도했다. 그녀 이름은 '아나벨라' , 멕시코에서 온 건축 관련 일을 하는 친구였다. 아나벨라의 영어는 서툰 편이어서 나는 그녀가 말하는 문장을 드문드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침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배가 고파서 잠시 쉬고 있다고 했다. 이걸 어떡하나. 나도 가지고 있는 먹을거라론 아침에 숙소에서 나올 때 챙겨 온 빵 한 덩어리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침을 어느 정도 챙겨 먹은 상태라서 좀 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빵을 건네주고 우린 이런저런 대화를 더 나누며 함께 휴식을 취했다. 10분쯤 지났을까 어제 같이 저녁을 먹었던 '페페'와 한 숙소에서 같이 묵었던 '닉'이라는 뉴질랜드 남성이 일행에 합류했다. 모두 비슷한 페이스로 걷는 편이였다. 일찍 일어나 조용히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피레네 산맥을 올랐다. 원래의 순례길 코스가 아닌 겨울철에만 운영되는 회피로라서 적당한 높이의 산을 넘겠거니 했는데 옆에 솟은 산과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의 정상을 바라보니 높이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보니 원래 루트는 능선을 따라 천천히 상승하는 오르막길이라면, 겨울철 회피로는 계곡을 따라 걷다가 가파른 산행을 해야 하는 코스였다. 그러다 보니 순례길 경험이 부족한 우리에게 체력이 바닥나는 마지막 20km 구간은 정말 힘들었다. 

 물이 거의 다 떨어져 가던 지점에 마침 마실 수 있는 지하수가 있었다. Peppe, Anabela, Nick과 함께

이를 악물고 어찌어찌 오르다 보니 우리는 피레네 산맥을 넘을 수 있었고 걷기 시작한지 9시간 정도가 지난 오후 2시경에  비로소 론세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대충 풀자마자 허기진 배를 붙잡고 숙소 앞 레스토랑에서 달려가 점심을 먹어치웠다. 순례길을 걸으며 아침식사를 챙기는 것, 그리고 간식과 물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첫날이었다. 다행히 나는 무릎이나 발에 어떤 통증도 물집도 생기지 않았지만, 그날 저녁 알베르게는 첫날 가파른 등산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순례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오늘 순례길 일차 오디션을 끝냈구나.' 우리는 이제 겨우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었다.


순례길 DAY 2. Roncevalles - Zubiri 


짐을 챙겨 알베르게 밖을 나서려고 하니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는건 아니여서 지체하지 않고 우비를 두르고 길을 나섰다. 작은 마을 하나를 지나치니 야트막한 언덕 사이 초원길이 나왔다. 길고 가느다랗게 뻗은 길을 따라 걸으며 귓가에 떨어지는 빗소리, 바람소리, 개울물소리, 간간히 말의 목에 매단 방울소리를 들었다. 한국에서라면 집구석에서 시간을 때우거나 회사 사무실 창문밖에 내리는 비를 흘깃 바라보고 마는 그런 날이였을 것이다. 우중에 걷는 즐거움은 다양한 소리를 듣는것임을 나는 이날 알게 되었다. 

순례길 첫날부터 걷는 페이스가 비슷한 동료들과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페페와 나, 그리고 닉, 아나벨라 등 다른 순례자들에 비해 조금 부지런한 그룹이였던 우리는 비슷한 시간에 출발해 비슷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음식도 나눠먹고 커피도 함께 마셨다. 어둡고 조용한 새벽길을 홀로 걷는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것이 기뻤다. 우리에게 많은 대화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휴식처에서 만나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눈인사를 하는것만으로도 충분한 공감대가 생겼다. 묵묵히 내 뒤나 앞을 걷고 있는 친구들이 벌써 든든한 동료처럼 느껴졌다. 특히 이탈리아 친구 페페에게는 이날부터 특별함을 느끼게 되었던것 같다. 무거운 가방을 매고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듬직함과 발이 다친 친구들을 살뜰히 보살필줄 아는 그의 따스함이 좋았다. 

Zubiri

정오가 되어가니 구름이 점점 옅어지며 해가 드러났다. 20km를 조금 넘는 2일차의 여정은 생각보다 일찍 끝날것 같았다. 하지만 험난했던 등산의 여파와 오전에 맞았던 차가운 비때문인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가방의 무게 때문에 어깨근육도 뭉쳤고 발도 욱신거렸다. 이미 이 순례길을 한번 걸었고 10년만에 순례길을 다시 찾은 한국인을 숙소에서 만났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분 말로는 일주일 지나면 몸이 적응하고 점점 근육통이 사라질거라고 했다. 나는 왠지 그렇게 되면 서운할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길위의 모든것이 계속 낯설고 새롭게 느껴질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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