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Carrion De Los Condes - Calzadilla
순례길 DAY 17. Carrion De Los Condes - Terradillos De Templarios
아침이면 내리던 서리가 그쳤다. 이날 우리는 끝없는 대초원을 걸었다. 처음 만나게 되는 지역도로를 제외하고 나머지 17km 정도는 마을하나 없는 황량한 들판에 난 흙길이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들에 봄꽃이 어느새 완연하게 피어있었고 들판에도 들꽃이 하나둘 맺히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가장 추운 지역인 메세타에도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메세타에 자리한 마을들은 규모가 아주작은 농가마을이고 그 외의 수익은 대부분 순례자들로 부터 얻는것 같았다. 이 오래된 마을들이 황량한 메세타에서 천년이 넘게 여태 사라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것이 순례자들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스페인에서 순례길이 유무형의 역사자원으로서 가지는 위상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날 묵게 될 'Albergue Jacques De Molay'라는 숙소의 이름이 스페인어가 아닌 프랑스어라는 점이 특이해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중세시절 유명했던 프랑스 출신 기사단장이자 유명한 저주의 주인공이라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궁금해 검색을 해보았다. 순례길에서 배우는 유럽역사 특히 나에겐 중세의 역사가 흥미로웠다.
자크 드 몰레이(Jaques De Molay)는 신실하고 충직한 십자군 기사단의 단장이였다. 2차 십자군을 위해 기사단을 개혁하고 봉건 군주들의 지지를 얻으며 군세를 모아갔던 것이 당시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에게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수익성 있던 무역을 독점하던 기사단에게 왕실이 많은 빚을 지고 있던 것도 골치거리 중의 하나였다. 당시 교황의 폐위도 좌지우지 하던 권력을 가지고 있던 필리프 4세는 교황 클레멘스5세를 압박해 자크 드 몰레이에게 동성애자, 이단이라는 죄명을 씌워 화형을 시켰다고 한다. 이 억울한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인 자크 드 몰레이는 화형을 당하기 전에 필리프4세와 그의 후손을 신의 이름으로 심판해달라는 저주의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의 저주 때문인지 몰라도 당시 형을 내린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형이 집행된지 33일 만에 사망했고, 필리프4세 역시 몰레이가 처형된지 1년 이내에 사망했다. 그리고 몰레이가 죽은지 14년이 채 안되어 300년의 역사를 지닌 프랑스의 카페왕조가 무너졌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야기다. 이외에도 스페인에는 카톨릭과 관련된 전설이나 설화가 많이 남아있다. 700년이 넘는 기간동안 무슬림에 대항해 종교전쟁에 가까운 국토수복전쟁을 수행한 스페인의 카톨릭 문화는 그 전통성과 역사성의 뿌리가 깊다. 정말 작은마을에도 성당 하나쯤은 꼭 있고 좀 더 큰 마을에는 반드시 하나이상의 성당과 수도원, 수녀원이 있을 정도다. 오랜세월 이슬람에 대항해 세대와 세대를 거듭하며 이어온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신앙의 힘이 필요했을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팜플로냐, 부르고스 같은 도시에서도 스페인의 문화예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카톨릭의 깊은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피흘렸던 스페인 조상님들 덕분에 이렇게 우리가 안심하고 순례길을 걸을 수 있게 되어 참 감사하긴 하다. 국토수복전쟁이 북부에서 약 200여년간 교착상태에 빠졌을때 얼마나 많은 북부사람들이 전쟁터에서 희생 당했을까? 스페인 북부사람들이 유난히 콧대높다는 소리를 들을만큼 자부심을 가질만도 하다.
순례길 DAY 18. Terradillos De Templarios - Calzadilla de los Hermanillos
어느덧 제주를 떠나 여행길에 나선지 한달이 조금 넘었다. 가끔 두고온 집생각이 나고 음식이 그립다. 바람도 많이불고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니 김치찌개에 소주한잔이 먹고 싶다. 지금 체중이 얼마나 줄었는지 모르겠지만 체감 상으로는 대략 7-8kg 정도가 빠진것 같다. 걷는것도 그렇지만 역시나 달라진 식습관 때문에 몸이 한결 가버워진것이 확실하다. 요즘 개인 운동 코치에게 두세달정도 PT를 받으면 200만원 정도 든다고 하던데 차라리 그돈으로 순례길을 오는건 어떨까 싶다. 꼭 순례길이 아니더라도 좀 고생스러운 여행이나 트레킹을 하다보면 건강은 좋아지는 듯 하다. 순례길을 떠나오기 전에 다니던 회사는 주로 대행업을 하던 기획사였다. 대행업이란 기본적으로 갑의 머릿속에 있는것을 눈에 보이게 구현해주는 업무가 주를 이룬다. 기획력보다는 운영과 관리, 임기응변이 더 중요한 업무였다. 그럭저럭 큰 문제 없이 나에게 주어진 일들은 잘 마무리 했지만 그저 일을 마치기만 했다는 허탈함이 컸다. 아무것도 내것이 아닌것 같고, 업무로 보낸 시간이 나의 삶이 아닌것 같았다. 몇달동안 주말도 반납하고 일해온 것들에 대한 신체적 보상은 잦은 음주와 흡연으로 인해 망가진 컨디션과 불어난 뱃살 뿐이였다. 통장에 찍힌 돈은 그저 숫자에 불과했다. 의미가 없었다. 어느날 바다 근처에 사는 친한 형님과 술한잔을 하고 혼자 바닷가에 나가 별을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이대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여행을 떠나자. 내 인생을 한동안은 내버려 두자.' 내 나이 마흔 셋, 전반적으로 아무것도 이룬것이 없는, 태어나서 살고 있지만 별 볼일없이 삶을 마감할 것 같은, 그래도 주어진 삶을 사랑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싶었다. 그래서 이 낭만적인 생고생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순례길의 단순한 일상이 좋다. 여기서 먹는것들은 지극히 단순하고 건강하다. 아침과 점심은 걷는 도중에 쉬면서 때운다. 아침에 만들어 둔 샌드위치와 미리 사둔 과일을 점심까지 나눠먹고 저녁엔 주로 파스타나 간단한 고기요리를 해먹곤 한다. 때론 동료들과 함께 식사준비를 한다. 하루 일과도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한 식사를 하고, 길에서 먹을 점심거리를 준비하고, 짐을 챙겨 길을 나선다. 길을 걷다 피로하면 길위에서 쉬거나, 바에 들러 커피나 음료한잔을 곁들인 점심을 먹는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침구와 짐을 정리하고 샤워와 빨래를 한다. 오후엔 장을 보거나 휴식을 취하고, 동료들과 함께 저녁준비를 한다.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대화를 하거나 산책을 나간다. 자기전에 간단히 일기를 쓴다. 먹고 걷고 먹고 자고 의 반복이다. 이 단순한 일상에서 경험하는 새로운 풍경과 새로운 만남이 좋았다. 이 단순함이 좋아서 순례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이나 끝이 있고, 사람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이 필요하다.
친구들에게 한국음식을 한번 더 만들어 제대로 대접하고 싶은데 식재료가 마땅치 않아서 쉽지가 않다. 곧 우리는 레온이라는 큰 도시에 들리게 된다. 꼭 아시안 마켓에 들려서 고추장이 들어간 얼큰하고 매운걸 만들어 먹일 생각이다. 무슨요리를 해주면 좋을까? 이제 순례길은 370km 정도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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