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Astroga - Ponferada
순례길 DAY 23. Astroga - Foncebadon
산티아고까지 약 일주일을 남겨두었다. 한 달 정도 걸리는 순례길 여정의 마지막 주차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도에서 고도로 하루종일 끝없는 오르막을 올랐다. 어젯밤 나는 존경하는 뮤지션인 류이치 사카모토의 타계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의 인터뷰처럼 2022년 연주가 정말 그의 마지막 연주가 되어버렸구나.
곤궁했던 나의 하루하루가 내 삶을 먹어치울 때 그는 나에게 다시 예술로, 그리고 음악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용기와 영감을 주었었다.
Art is long, life is short.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에도 그가 추구하던 음악적 방향은 일관되었던 것 같다. 사람들 그리고 지구. 소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
이날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부디 편하게 쉬시기를 기원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곡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영화 바벨(BABEL 2007)의 OST.
Bibo no Aozora(美貌の青空, Beauty of a Blue Sky)
안온한 피아노 선율 위에 평범한 스케일의 경계를 넘나들며 대립하다가 호응하는 두 현악기 소리가 마치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낸 것 같다.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이고 은유적으로 잘 드러내는 명곡이라고 생각한다.
전업 뮤지션으로, 재즈드러머로 살아갈 때 한동안 재즈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만큼 회의에 사로잡혀 있던 때가 있었다. 음악이 나를 배신한 것 같다는 생각에 지배되었다. 음악을 사랑하지만 음악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이 흘러가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재즈의 치열함과 관객을 의식하는 연주가 좀 지긋지긋했다. 내 마음보다는 내 연주만으로 평가받는 무대가 싫어졌다. 그럴 때 류이치 사카모토를 만났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어릴 적 내가 처음 음악과 사랑에 빠졌던 시절이 떠올랐다.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다시 작곡을 시작하고 가사를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드러머가 아닌 뮤지션이 되고 싶어졌다.
이날의 종착지인 폰세바돈은 높고 넓은 산 정상 바로 밑에 자리 잡은 작고 정겨운 산동네다. 식료품을 살 마켓이 없어서 식사는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저녁을 먹을 수밖에 없는 불편함이 있는 동네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에 하루정도 더 쉬면서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순례길 DAY 24. Foncebadon - Ponferada
어제의 길었던 등반은 오늘 길었던 하산이 되었다. 아름다운 일출을 보고 폰페라다를 향해 본격적인 걸음을 시작했다. 1504m의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 상징물 중 하나인 '철의 십자가'를 만나게 된다. 11세기에 세워졌다는 철의 십자가 아래에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소원을 담아 올려둔 돌무더기가 작은 동산을 만들고 있었다.
독일 친구 프레데리케는 동생가족과 조카의 건강을 기원했다. 소원을 비는 행위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프레데리케가 돌을 놓고 동생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영상을 촬영해 줬다. 사람이 소망하는 염원을 표출하는 행위는 세계 어디나 다 비슷하게 발현되는 것 같다. 옛 순례자들은 이 철의 십자가 앞에서 순례길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사하고 무사히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도록 기도했을 것이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순례길에서 가장 높은 고도를 무사히 통과했으니 이제 특별한 사건사고만 없다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더 이상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말년병장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된다고, 항상 느슨해지고 안심이 될 때 몸이 아프거나 이상한 불상사가 생길 확률이 높아진다. 아직은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다.
폰페라다로 향하는 길은 산 정상을 넘고 능선을 따라 내리막을 한참 동안 걸어야 하는 코스다. 나는 개인적으로 등산보다 하산을 더 힘들어해서 오늘 18km에 달하는 내리막은 어제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능선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경사가 심한 돌길에서 잠시만 한눈을 팔면 발목을 다치거나 넘어질 우려가 있었다. 어느새 무릎에 무리가 가는 것이 느껴졌다. 발목도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오르막보다 내리막에서 오히려 가방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하고 걸음을 서둘렀지만 알베르게에는 오후 3시경에나 도착할 수 있었다. 쉽지 않은 하루였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무릎이 저리고 아파왔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문제가 될 것이다. 나는 지친 몸을 끌고 약국에 가서 비싸지만 좀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은 열이 나는 크림을 구입했다. 무릎에 바르니 맨소래담 로션과 비슷한 향과 열이 났다. 제발 약이 잘 들어 내일 무사히 걸을 수 있길.
이제 메세타를 지나 산티아고가 있는 갈라시아 주를 향해 걸어간다. 이제 200km 조금 넘게 남은 이 길의 마지막 페이즈가 기다리고 있다. 갈라시아는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까? 여전히 잦은 마른기침 외에는 몸에 큰 불편함 없고 잘 걷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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